오랜만에 대학친구를 만났다. 그 친구가 결혼을 한다며 청첩장을 준다고 하는데 어떻게 안나가겠는가.
편의상 A라고 말하겠지만, 난 A와 큼직한 공통점이 있기 때문에 친해질 수 있었다. 바로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는 찌질했다.'라는 부분이다.
대학교 1학년 때 난 B라는 친구를 정말 좋아했다. 흔히 소설책에서 이야기 하는 말 더듬는것 부터 시작해서 그친구와 같은 버스를 타려고 버스정류장에서 한 없이 기다린 경험이 있다. 그런 나를 보고 A는 항상 안타깝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굳이 그렇게까지 찌질해지는 내가 이해가 안간다는 이야기도 해주었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나도 내자신이 이해가 안되는 순간들이 많다. 하지만 그때는 그게 참 소중했다. 그래서 A에게 너가 B를 잘 몰라서 그래! 라고 이야기를 했었다.
그러던 어느날 A가 스타벅스에서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이야기를 하였다. 보통은 친구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면 관심을 기울여서 이야기를 들어줄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난 마음의 여유가 없었고 그 친구의 이야기를 건성으로 들었다.
그 날 이후로 A는 완전히 바뀌었다. 그 오빠 때문에 우는날도 있었고 웃는날도 있었다. 동병상련이어서 그랬던가. A가 그 오빠한테 푹 빠진 이후에는 A와 이야기하는 것이 재밌었다. 무슨 이야기를 해도 죽이 착착 잘맞았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서로 찌질한 이야기들을 하면서 각자의 연애에 충실했다.
시간이 지나서 A는 그 오빠와 연애에 성공했고, 난 B에게 차였다. 그리고 A는 그 오빠와 이제 결혼을 한다고 한다. 결과로만 본다면 A는 연애에 성공(?)했고 난 실패(?)했다. 그런데 연애는 사진을 찍는 것처럼 순간이 성공 실패로 나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배웠다.
A는 오빠와 연애한 이후에 많은 일들을 경험하였고, 그럴 때마다 오빠의 아쉬운 모습도, 본인의 찌질한 모습을 수도 없이 마주하여야 했다. 그럴때면 본인의 찌질함을 인정하며 성숙해 나아갔다고 한다.
나 또한 좋아하는 B를 혼자 곱씹으며 이불킥을 날린 날이 많다. 그당시 B의 의사표현이 애매하다며 불만을 얘기하였지만, 돌이켜보니 사실 B는 그냥 본인의 의사표현을 한 것이고, 그과정에서 나혼자 희노애락을 느끼고 있었구나 하고 자연스럽게 깨닫게 되었다. 그 깨달은 시간들로 인해 지금 나는 좀 더 연애하기에 괜찮은 사람이 되어있다.
친한 친구들은 어느날 나에게 와서 B가 시간이 지난 어느날. 다시 찾아와서 나를 흔든다면 어떻게 할것이냐고 물어본다.
안타깝지만 그럴일은 없다. B는 아무런 생각도 없었고 나혼자 전전긍긍한거니까 말이다. 그럼에도 그 친구가 그럴수 있지 않냐고 물어보는 친구에게는 '만약은 없어.'라고 답변해준다. 애시당초 B에게 내가 그런 사람이었던 적이 없으니 말이다.
다만, 혼자 찌질했던 그 시간들이 너무 소중하다. 그 찌질함들로 인해서 지금의 내가 있다고 생각한다.
일전에 자전거 여행했을 때의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데, 여행을 하다가 길을 잃으면, 정답은 헤매야 한다. 빠른 길을 찾겠다고 멈춰서서 고민하는 순간 변화하는 상황은 없다. 오히려 그 상황을 타개해보려고 이것 저것 하는 와중에 길이 생길 수 있다. 내가 지나온 길, 헤맸던 길이 나에게 알려준다.
30이 넘은 지금도 친구들이 본인들의 찌질함에 아쉬운 소리를 할 때가 있다. 반대로 연애를 잘하는 친구들은 한결 더 뻔뻔해졌다. 양쪽의 이야기를 들으며 마음대로 재단한 적은 없지만, 그만큼 지나온 길이 얼마나 중요한지 느낀다.
지금 당신이 걱정해야 하는건 내가 찌질하면 어떡하지?가 아니다.
그냥 하염없이 시간만 흐르고 있다면 그것이 제일 큰 문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