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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예 Dec 09. 2023

구체적인 욕망에 대하여

어떻게 칼날을 벼릴 것인가

구체적인 욕망의 가치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게 된 것은, 어느 날 문득 솔트 24의 크루아상이 먹고 싶다는 느낌이 불쑥 머릿속을 메웠기 때문이다. 가끔 이렇게 일상에서 구체적인 욕망을 만나는 일이 생긴다.


그런데 빈도는 예전만은 못한 것 같다. 정말이지 드물어졌다. 왜일까?


대체로 구체적인 욕망이란 구체적인 경험을 전제로 한다. 그렇다면 10살의 나보다 30살의 내게 구체적인 경험의 횟수는 훨씬 많은데도 불구하고 어째서 구체적인 욕망의 빈도 자체는 줄어들고야 만 것일까.


식탐에 대해 논해보면 쉽다.


이를테면 어려서는 먹고 싶은 게 명확히 떠오르곤 했다. 그제는 짜장면이, 어제는 김치찌개가, 오늘은 초밥이 먹고 싶다는 식이다. 간혹 피자와 치킨이 충돌하는 때가 있기는 했어도 구체적인 메뉴 자체가 없는 날이 별로 없었다.


그러나 요즘은 점심에 무엇을 먹으러 가는 게 좋을지가 늘 고민이다. 나름대로 넉넉한 식대를 들고 전 세계 음식을 다루는 음식점이 즐비한 거리를 얼마든지 갈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딱히 먹고 싶은 무엇이 도통 없는 때가 왕왕 생긴다. 그러다 보면 오히려 ‘이것만은 정말로 먹고 싶지 않다’ 메뉴를 고른다.


만일 오늘은 정말 쌀국수만은 먹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면 그날의 점심은 적어도 쌀국수는 아니게 되는 것으로 만족이다. 무엇을 먹든 점심 식사를 맛있고 감사히 즐기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게 최선의 메뉴였다고는 생각하지는 않는다. 차악의 메뉴에 가까울 것이다.


이렇듯 음식에 관하여라면 구체적인 욕망이 부재한 지가 꽤 되었다. 달리 말하면 무슨 음식이라도 가리지 않고 잘 먹을 수 있다는 얘기도 된다. 지속가능한 식사 차원에서는 적당한 쌀밥이나 적당한 채소와 적당한 고기가 있는, 편안한 식사가 좋다고 생각하는 건 있다. 고로 그런 식사를 지향하려고는 하나, 그것이 구체적인 욕망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가끔 구체적인 욕망이 불현듯 뇌리에서 팝업화면처럼 딸깍하고 나타나면 신기하게 느껴진다.


오늘은 크루아상이 먹고 싶다 정도라도 그렇고, 오늘은 솔트 24의 크루아상이 먹고 싶다 정도의 구체성이라면 놀랍다.

맛있는 라떼를 마시고 싶네 정도의 생각은 비일비재하지만, 꼭 파스텔 커피웍스의 아이스 라떼를 꼭 마시고 싶다 정도의 구체성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달리 생각하면 욕망은 저빈도일지언정 예전보다 훨씬 구체적인 차원의 무엇이 된 셈이다. 뾰족하고 날카로워졌다. 이것이 비단 나에 국한된 얘기일까?


아닐 것이다.


시간과 경험에 취향과 추억을 덧입히다 보면 두리뭉실하던 욕망은 점차 구체적인 형상으로 변모하게 된다. 그러다 보면 어쩌면 깊이라고 불러도 좋을, 구체성이 전면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음이다. 아마 앞으로 세계는 더더욱 그런 구체적인 욕망의 가치에 초점을 맞추리란 생각이 들었다. 개개인의 낱낱한 욕망의 가치가 과거에는 가짓수가 적어, 소위 쪽수와 단가가 맞지 않아 무시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앞으로는 기술의 발전에 따라 소수니 다수니 하는 층위를 넘어서게 될 것이고, 그 이후에는 구체적인 개개인의 욕망의 충족에 집중하는 시점이 오지 않을까.


직업적인 차원에서도 마찬가지란 생각이 든다. 일단 의료를 업으로 삼은 입장에서도 뾰족하게 약을 잘 쓰는 것의 중요성을 무척 실감하기 때문이다. 환자는 단순히 목감기약을 달라고 할 때에도 기침이 많은지, 가래가 많은지, 열은 나는지, 기침한 지는 얼마나 되었는지, 감기약은 먹었는지, 먹었다면 언제까지 먹었는지 등 묻고 따지다 보면 제한된 선택지들 안에서도 건네주는 약의 종류와 가짓수는 달라지게 마련이다. 구체적인 불편과 구체적인 해결책이 맥을 같이 하는 것 같다.


결국은 칼날을 얼마나 뾰족하게 벼릴 수 있는가가 관건인가 싶다.


비단 직업적인 차원에 국한해서 하는 말은 아니고, 구조 자체가 구체적인 욕망이 도드라질 수밖에 없는 국면에 처해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무슨 크루아상 먹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 해요.


한때는 욕망이란 커다란 솜뭉치 같은 것이기도 했겠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고밀도의 쇠구슬 같은 것이 되었다. 떠오르기 쉽지 않지만 떠오른 이후에는 사라지기도 어려운 것. 그래서 구체적인 욕망은 드물고, 힘이 세며,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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