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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예 Aug 15. 2021

흉터

상처가 아무는 시간

  일을 하다가 손가락을 크게 베였다. 부주의에서 비롯된 사고였다. 어지간하면 그냥 툴툴 털었겠지만, 그날의 상처는 무심히 지나치기엔 컸다. 날카로운 금속에 베인 상흔은 제법 깊었고, 무엇보다도 피가 멎지 않았다. 핏방울이 빨간 잉크처럼 뚝뚝 떨어져 지나가는 길마다 둥근 흔적을 남겼다. 갑작스러운 사태에 판단력이 흐려진 나와 달리 주변 사람들은 난리가 났다. 곧장 응급실로 향했다.


  금속에 베인 관계로 파상풍 예방접종 여부를 확인하고, 항생제 알레르기 반응 테스트도 했으며, 혹여라도 신경이 손상된 건 아닌지도 확인했다. 다행히 감각에는 이상이 없었다. 대강의 확인 절차가 마무리된 후, 응급의학과 의사는 나지막이 한 마디를 했다. “꿰매야겠네요.” 나는 그저 무력히 베드에 누워서 왼손을 힘없이 내어놓곤 고개만 끄덕였다. 분주히 돌아가는 응급실에서 누군가는 소독을 해 주었고, 누군가는 마취를 해 주었다. 가로로 기다란 상처 부위에는 이윽고 여섯 개의 바늘땀이 가지런히 수놓아졌다. 추가적인 소독과 드레싱이 연달아 이뤄졌고, 그렇게 나는 전례 없이 거대한 엄지 손가락을 가지게 되었다. 담당 간호사는 이틀이 지나면 환부 소독을 하면 되고, 필요하면 외래로 예약을 하라고 친절하게 얘기해주었다. 또 실밥은 2주 후에 뽑을 수 있고, 엄지 손가락을 구부리면 상처 부위가 잘 아물지 않으니 주의하란다. 그렇게 봉제 인간이 되어 응급실을 나서는데 그제야 눈물이 핑 돌았다. 불과 한두 시간의 일이었다.


  살면서 엄지 손가락을 무척이나 얕보고 있었다는 걸, 대왕 엄지 손가락이 된 이후에야 알았다. 일단 핸드폰으로 문자를 보내기가 엄청나게 불편해진다. 설거지 같은 기본적인 집안일은 물론, 머리 감기도 안 된다. 엄지손가락이 꼭 사용하지 않아도 구부릴 일이 그렇게나 많다는 사실도 새롭게 알게 됐다. 실밥을 푸는 건 차치하고, 상처가 어느 정도 붙길 기다리는 시간이 너무나 길게 느껴졌다. 불과 72에서 96시간이 그토록 답답할 줄이야! 시간이 흐르니 드레싱도 점점 간소화돼서 대왕 손가락은 다시 자그마한 손가락이 됐고, 엄지 손가락을 점차 자연스레 구부릴 수 있게 되었으며, 마침내 실밥을 풀게 됐다. 그때의 가뿐함이란.


  그렇게 사고 후에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흉터는 남았다. 엄지손가락을 쓰는 데는 아무런 불편이 없지만 말이다. 상처는 아물었대도, 흉터는 남았다. 매만져보면 조금 울룩불룩한 느낌도 나고 살짝 아프기도 하다. 그래도 어루만지다 보면 다친 적 없던 때처럼 매끄러워지겠거니 한다. 어쩌면 완전한 의미의 회복이란 아직은 머나먼 얘기일까.


  먼 훗날에는 아마 흉터도, 울룩불룩한 느낌도 없어질 것이다. 다쳤던 사건 자체를 떠올리지 못할 것이다. 곱씹고 곱씹다가, ‘아, 그때 그런 사고도 있었지’ 하려나.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미래의 일. 현재의 나는 시시때때로 상흔을 바라본다. ‘언제쯤 상처 입은 적도 없었던 것처럼 되돌아갈래?’하고 가늠해본다. 얼마나 걸릴지는 알 수 없지만.


  Red Hot Chili Peppers의 노래 중 Scar Tissue라는 곡이 있다. 곡은 ‘scar tissue that I wish you saw’라는 가사로 시작한다. 누군가가 보아주길 바라는 흉터란 대관절 무엇일까? 흉터라는 것은, 본질적으로 상처의 치유와 회복의 역사를 담고 있기에 멋진 것이다. 인내와 이겨냄의 상징이니까. 일찍이 그 사실을 알아챈 그들은 극복의 여정을 보아 달라는 울부짖음을 노래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영영 아물지 않는 상처는 결코 없으니, 상흔을 남길지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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