궤적을 넓히는 마음으로
나도 사람이라서 이따금 회고라는 걸 한다. 지금과 과거를 두고 저울질도 하고 인과율 분석도 하고 그런 짓을. 즉 짱구를 굴린단 말이다. 그러다 보면 이내 통감하며 외치게 되는 문장이 하나 있으니…
아, 나 궤도를 이탈했구나.
그런데 정확히 어느 궤도부터 이탈이 시작됐는지 잘 모르겠다. 어느 궤도를 돌았어야 ‘옳았’는지 모르겠다. 언제부터 이탈이 시작되었는지, 어떻게, 어떤 궤도로 돌아가야 하는지도. 이토록 많은 모르는 것들 사이에서 아는 것은 오직 하나, 이탈했다는 강렬한 느낌뿐.
내가 걸었어야 하는 길이 애당초 뭐였는지는 모르겠으나 그게 어쩐지 지금의 길은 아닌 것 같다. 이 막연한 괴리를 느끼는 일은 썩 좋지 않다. 갔어야 하는 길을 내정해 둔다면 언제나 가지 못했다는 사실 자체로 괴로움을 안기기 때문이다. 무능함과 무력함에 대한 수용은 고통스럽기도 하고. 그러나 달리 무얼 해야 좋은지,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수학 문제에는 정답이 있다지만 이런 건 정답이 없다. 엄밀히는 문제가 애초에 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물음표만 안은 채 궤도를 이탈한 우주인이 경험할 수 있는 것이란 오직 외로움이다. 광활하다 못해 공허한 우주 속에서 정처 없이 홀로 부유하는 느낌. 나는 지금 어느 구간을 떠돌고 있나. 이곳은 남쪽인가 동쪽인가. 지금은 봄인가 겨울인가. 앞으로 어디로 가야 하나. 날아가야 하나. 헤엄쳐서 가야 하나. 숱한 의문이 들어도 대답해 주는 이는 하나 없다. 듣는 이만 하나 있으니, 바로 나 자신.
그렇게 시작되는 나와의 대담.
— 궤도를 이탈했나?
— 그렇다.
— 언제부터 이탈했다고 생각하는가?
— 내 생각엔 OO부터 아니면 OO부터로 추정한다.
— 그때의 궤도가 알맞은 것이었다는 확신이 있나?
— 그렇지는 않다.
— 그러면 지금의 궤도가 알맞지 않다는 확신은?
— 내키지는 않지만 그것도 없다.
이런 자문자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애초에 걸었어야 하는 길도 걷지 말았어야 하는 길도 없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걷고 싶은 길과 걷고 싶지 않은 길은 있었을지언정. 그래도 걷고 싶은 길에서 이탈했다고 생각하면 어쩔 수 없이 마음이 아파진다. 근데 다시 또 틀어보면 이탈한 게 맞나 싶기도 하다.
소설을 쓰다 보면 캐릭터가 어느 날 시나리오를 제멋대로 벗어나서 엉뚱한 말과 행동을 하면서 작가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성격의 소유자가 되는 경우가 있단다. 마치 진짜 자유의지가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럴 경우 그 캐릭터는 궤도를 이탈한 것인가, 되찾은 것인가. 그건 나쁜 건가, 좋은 건가…
결국은 알 수 없다. 정말로 궤도에서 낙오된 사람이 될 수도, 궤도를 운 좋게 탈출한 사람이 될 수도 있다. 어쩌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제 갈길을 가고 있으면서 모를 가능성도 높다. 누가 알겠는가. 신만이 알겠지.
다만 이탈여부와 무관히 할 수 있는 것은 약간의 희망과 의욕을 품고 하루를 꽃피우는 일. 좀 더 스스로를 독려하며, 잘했다 응원해 주는 일. 가고 싶은 곳이 있다면 가자고 등 떠밀어 주는 일. 버티는 시간이 고되었을 텐데 고맙다고 인사하는 일. 방향키를 왼쪽으로도 오른쪽으로도 움직여 보는 일. 조바심 낼 때에 안아주는 일 등등이다. 어쨌든 지금 이 순간을 살아내야 하니까.
어쩌면 과거의 궤도로부터 벗어날 수밖에 없던 까닭은, 더 많은 궤적을 남기기 위함이었음을. 괴로움을 가르치기 위한 삶의 뜻이었다기보다는 괴로움 가운데서 춤추는 방법을 배워야만 했기 때문이었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