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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치 Oct 17. 2024

책만 보는 바보

책벌레의 소확행 14화


목멱산 아래 멍청한 사람이 있는데, 어눌하여 말을 잘하지 못하고 성품은 게으르고 졸렬한 데다, 시무(時務)도 알지 못하고 바둑이나 장기는 더더욱 알지 못하였다. 남들이 이를 욕해도 따지지 않았고, 이를 기려도 뽐내지 않으며, 오로지 책 보는 것만 즐거움으로 여겨 춥거니 주리거나 병들거나 전연 알지 못하였다.

어릴 때부터 21세 나도록 일찍이 하루도 옛 책을 놓은 적이 없었다. 그 방은 몹시 작았지만 동창과 남창과 서창이 있어, 해의 방향에 따라 빛을 받아 글을 읽었다.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책을 보게 되면 문득 기뻐하며 웃었다. 집안사람들은 그가 웃는 것을 보고 기이한 책을 얻은 줄을 알았다.

두보의 오언율시를 더욱 좋아하여, 끙끙 앓는 것처럼 골똘하여 읊조렸다. 그러다 심오한 뜻을 얻으면 너무 기뻐서 일어나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는데, 그 소리는 마치 갈가마귀가 깍깍대는 것 같았다. 혹 고요히 소리 없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뚫어지게 바라보기도 하고, 꿈결에서처럼 혼자 중얼거리기도 하였다. 사람들이 그를 '간서치'(看書痴), 즉 책만 보는 멍청이라고 해도 또한 기쁘게 이를 받아들였다. 아무도 그의 전기를 짓는 이가 없으므로 이에 붓을 떨쳐 그 일을 써서 <간서치전>(看書痴傳)을 지었다. 그 이름과 성은 적지 않는다.

 

간서치로 유명한 조선 후기의 북학파 실학자인 이덕무의 글밥을 먹노라면 햇볕에 잘 말린 무청시래로 오래 끓인 국물을 들이킨 듯 담백 부대낌 없이  속이 편하다.


나도  책만 보는 바보로서 이름과 성을 어느 곳이든 적(籍) 두지 않으며 살았다.

남의 정답에 정착하지 않은 의문의 고삐를 당기는 유목민 셈이다.


한 때 시절을 돌이켜보면 마음속에 빙빙 도는 궁금의 나이테가 늘어가는데, 주변은 어눌한 아이를 걱정하느라 지적질의 칼날로 도끼질했으니 오죽했으랴.

죽죽 뻗어가는 아름드리나무로 광합성을 하지 못하고 내면의 바닥에 움츠려 점점 고뇌로 번져가는 이끼의 생태기를 보냈다.

자연스레  이끼는 책에까지 닿았랬다.


그저 책 읽는 것이 좋았다.


책을 읽는다는 건 다른 사람의 생각과 내면을 바라보는 것에서, 시간이 지날수록  나 자신의 내면을 반영하는 소울메이트를 만나는 시간이 다. 

발을 떼지 않고도 내 안에서  인류를 만난다.

일면식이 없는 사람의 글결에서 나의 숨결을 느끼는 것은 참으로 반가운 일이다.


자정을 훌쩍 넘어 새벽까지 이어지는 소울메이트와의 만남에 항상 잠이 부족하고 창백한 낯빛이라 또래의 싱그러운 생명력의 생글생글함과는 멀찍이 떨어진다.

그러나 홀로 읽는 시간 즉 내가 나를 벗 삼을수록 내면의 성장판 활짝 열 바라보는 시야의 키는 무럭무럭 했다.

궁벽한 골방에서 상념의 중력을 벗어나 상상의 나래가 우주에까지 닿을 지경이었으니까!


가장 행복한 시간




가장 행복한 시간.


학교를 파하면 좌심방 우심실 두근 반 세근 반으로 부푼 채로 헌책방을 후비고 다녔다.

켜켜이 꽂힌 책들과 잉크 냄새, 눈이 가는 대로 집어들 때면 펄펄 날리는 책먼지들의 반짝반짝함.

다시 태어나면 책페이지에서 서식하며  글밥 갉아먹는 책벌레의 인생도 나쁘지 으리라. ㅎㅎ


한아름 묶음책들을 말괄량이 삐삐의 괴력을 발휘해 터덜터덜 버스를 타고 집까지 데려왔을 때는 끼니를 거른 것도 잊은 채 포만한 행복감으로 피둥해졌다.

성마른 몸에, 외모에도, 이성에도, 장난감으로 즐비한 바깥놀이에도 심드렁한 아이였다.

오직 내가 나를 벗 삼은 시절이었다.



지금은 그 좋던 시력도 나이 들어 민함이 빠져  활자를 쫓아가는 데 느릿느릿해졌다.

골방도 더 이상 새 친구를 들일 여력이 부족하다.


하여 요즘은 종이책 대신 전자책을 읽는다.

이북리더기 하나면 언제 어디서든 꺼내 책을 읽는다. 마치 이동식 도서관을 휴대하는 느낌이다.

활자도 크게 조정되니 한결 활자를 따라가는데 여롭다.

핸드폰에 설치한 이북앱에는 듣기 기능(tts)도 있어, 눈을 감고 귀 기울이기만 해도 되니 이 또한 좋지 아니한가!


구부정한 거북목에 침침한 노안이 왔어도 책을 통해  나를 읽는 시간은 늙어가지 않는다.


노을 진  단풍처럼 발갛게 피어 담금질되는 순간.


그러므로 력은 한 점 먼지 같은 지구의 삶에서 벌어지는 막장드라마를 한 발짝 떨어져 희극으로 재해석하는 태도 교정리라.


윤동주의 시구처럼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듯 지안의 읊조리는 목소리가 나의 달팽이관을 스쳐 울릴 것이다.


(이북 듣기 설정 목소리가 지안으로 되어 있어요.  공교롭게도 드라마 나의 아저씨의 여주인공과 같습니다. 지안至安. 안함에 이르렀나? 네. 네...)








인용글  : 한서 이불과 논어 병풍 <이덕무 청언소품>


그림 : 이북리더기 바탕화면에 깔기 위해 다운로드한 그림인데, 혼자 보기 아까워서 삐뚤빼뚤 떨리는 손으로 옮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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