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란과 역모의 역사 - 덕수궁 즉조당
옛날 옛날에 한 450년 전쯤 전에 성은 이요, 이름은 혼이라고 하는 한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혼이의 아버지는 선조 임금님이었는데 혼이는 선조 임금의 둘째 아들이 된 것이었습니다. 혼이는 태어난 지 2년이 되던 해 낳아주신 어머니(공빈 김씨)가 산후병으로 죽고 말았습니다. 혼이는 유모의 손에 키워졌고 가끔 왕비인 의인왕후가 혼이를 돌보아주시곤 했습니다. 그래도 혼이는 늘 어머니 공빈 김씨의 따뜻한 품을 그리워 하였습니다.
혼이에게는 3살 많은 형, 임해군이 있었는데 임해군은 성격이 난폭하여 주위 사람들로부터 평판이 좋지 못했습니다. 혼이는 자신마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하고 싶은 말을 하면서 살면 돌아가신 어머니를 욕보이고 임금이신 아버지를 실망시켜드릴까 봐, 형과는 달리 열심히 공부하고 칭찬받는 아이가 되려고 노력했습니다.
혼이에게는15명이 넘는 배다른 형제들이 있었습니다. 그들 중에서 의안군과 동생과 신성군이라는 동생이 있었는데 이 둘은 아버지인 선조가 특별히 더 사랑하는 왕자들이었습니다. 의안군과 신성군은 모두 혼이의 어머니였던 공빈 김씨와 사이가 그다지 좋지 않았던 인빈 김씨의 아들이었습니다. 어머니도 없고 난폭한 형을 둔 혼은 선조 곁에서 총애를 받고 있는 인빈과 인빈의 보호를 받고 있는 의안군과 신성군이 부러웠습니다. 부러우면 지는 거라고 생각했는지 이런 생각이 들수록 혼이는 열심히 공부하고 성실히 생활하려고 하였습니다.
선조는 원래 왕의 아들이 아니었습니다. 후손이 없던 임금 명종이 주변 친척들 중에서 제법 똑똑해 보이는 아이로 후계를 정했는데 그 아이가 바로 선조였습니다. 왕의 아들이 아니었기 때문에 선조는 자기의 신분과 왕위 정통성에 커다란 콤플렉스를 갖고 있었습니다. 선조는 후궁의 자식보다는 왕비가 낳은 자식으로 후계를 잇고 싶어 했지만 아쉽게도 왕비인 의인왕후는 아이를 낳지 못했어요. 그래서 선조는 틈틈이 후궁의 왕자들을 테스트해 보곤 했습니다. 누가 영민하고 누가 왕의 자질이 있는지 알아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루는 선조가 왕자들을 불러놓고 질문을 하였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으뜸인 반찬이 무엇이냐?"
이 질문에 의안군, 신성군, 순화군 등은 "떡입니다." "꿀입니다."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고기인 줄 압니다."라는 대답을 했어요. 하지만 평소 학문을 게을리하지 않았던 혼이는 이렇게 대답했어요.
"전하, 소자 가장 으뜸인 반찬은 소금인 줄 아뢰옵니다. 이유인즉슨, 소금이 아니면 온갖 맛을 이루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또 한 번은 선조가 왕자들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너희들이 생각건대 가장 아쉬운 것은 무엇이냐?"
이 질문에 다른 왕자들은 저마다 평범한 답변들을 내놓았지만 혼이는 "일찍이 생모께서 돌아가시어 효를 다하지 못한 것이 가장 아쉽습니다."라고 대답하여 선조는 혼이의 심성을 기특하게 생각했습니다.
또 어떤 다른 날, 선조는 갖가지 선물들을 준비해놓고 왕자들을 다 같이 불러 한 가지씩 가지라고 했습니다. 이에 다른 왕자들은 놓은 것들 중에 진귀한 보물들을 앞다투어 가져갔습니다. 혼이는 무엇을 가졌을까요? 혼이는 보물들 중에서 붓과 먹을 가져갔어요.
이처럼 혼이는 다른 왕자들보다 영민하고 책임감 있고 겸손한 마음을 가진 왕자였습니. 그러나 선조는 총애하던 인빈의 자식인 의안군과 신성군을 더 좋아해서 이들을 세자로 삼고 싶어했습니다. 하지만 혼은 왕자들 중에서도 우수한 자질을 갖고 있었기에 조정 관리들은 혼이를 세자로 세울 것을 주청했습니다. 조정 관리들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혼이를 세자로 세우는 것을 미루고 미루던 선조는 임진왜란이 터지고 나라가 불안해지자 관리들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선조는 마지못해 혼이를 세자로 임명한다는 말 한마디를 툭 내던지고는 저 멀리 의주로 달아나버렸습니다.
아버지에게 인정도 못 받고 억지로 부여받은 세자의 임무였지만 혼이는 나라를 구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멀리 달아난 아버지를 대신해 조정을 떠맡아 강원도로 충청도로 군사를 이끌고 다니면서 백성들을 독려하고 의병활동을 도왔습니다. 이처럼 목숨을 아끼지 않고 열심인 세자 이혼을 보면서 백성들도 하나둘씩 왜에 대하여 저항을 시작했습니다. 조선을 도와 전쟁에 참여했던 명나라도 혼이의 열의와 희생을 보면서 '과연 임금감이구나!'라고 생각했고 오히려 혼이의 아버지 선조를 못마땅해 했습니다.
명나라의 옹호와 백성의 사랑은 혼이에게 득이 되지 못했습니다. 혼이를 탐탁지 않게 생각하던 선조는 사랑을 독차지하고픈 애정 결핍이 좀 있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자신 대신 혼이를 더 좋아하는 것 같으니 아들을 질투하기 시작했습니다. 사사건건 트집을 잡는 아버지에게 충성을 보이기 위해 혼이는 전쟁통에 나라와 백성을 위하기도 바쁜데 이것저것 진정성을 보여주느라 정신이 없었고 아버지가 자신을 의심할까 봐 늘 초조하고 불안해 하였습니다. 동생인 의안군, 신성군, 정원군들과 달리 혼이에게는 자신을 옹호해 줄 엄마도 외갓집도 없었기에 오로지 자신의 힘으로만 버텨내야 했습니다. 임진왜란 중에 선조가 총애하던 인빈의 소생이었던 의안군과 신성군은 병약한 나머지 죽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났습니다.
혼이는 이제 좀 덜 불안해도 될까, 하며 안도를 하던 중 선조의 첫 번째 부인이 죽은 뒤 맞이한 두 번째 부인인 인목왕후가 뒤늦게 아들을 낳게 되었습니다. 선조의 마음은 서자인 혼이보다는 적통인 인목왕후의 아들에게 더 끌렸습니다. 혼이는 또다시 불안의 나날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20살이 넘은 성인 남자가 동생이 태어났음에도 기뻐할 수 없고 동생을 상대로 불안에 떨어야 한다니, 혼이는 이런 상황이 너무 슬펐습니다. 선조가 동생을 사랑할수록 자신은 세자 자리에서 쫓겨나고 심지어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였습니다.
조정 관리들도 왕비에게서 태어난 적통 아들이 세자가 되어야 한다는 사람들과 임진왜란 때 혼이 보여준 헌신과 능력을 보고 혼이 세자로 그대로 있어야 한다는 사람들이 편을 나누어 서로 싸우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며 혼이는 또 너무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몸이 급격히 나빠진 선조는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혼이는 오랜 마음고생 끝에 드디어 임금이 되었습니다. 정릉동 행궁(이후 덕수궁)의 석어당에서 승하하신 선조 임금의 뒤를 이어서 혼이는 석어당 바로 옆에 있는 전각에서 아주 간단한 즉위식을 거행했습니다. 이 전각을 지금 우리는 즉조당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세자 이혼은 나중에 광해군이라고 불리워 졌습니다.
조선 임금들 중에서 서자로는 처음으로 임금이 된 광해군 이혼!
아버지처럼 자신도 왕위 계승의 정통성에 콤플렉스를 갖게 되었습니다. 왕권의 회복과 강화를 위해 광해군은 궁궐 중건에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임금이 되자마자 각 궁궐의 중건을 명령했는데 3년 뒤 창덕궁 중건을 마쳤고 7년 뒤 창경궁 중건도 마무리하였습니다. 창경궁 중건이 끝나자마자 자신이 즉위했던 경운궁(이후 덕수궁)을 확장하는 일도 착수를 하였고 더 큰 궁궐을 지으라고 지시를 내리기도 하였습니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정궁이 된 창덕궁에 머무르고 정무를 보았어야 하나, 창덕궁은 단종과 연산군이 쫓겨난 궁이라 광해군은 정통성이 충분치 않은 자신도 왠지 단종이나 연산군처럼 쫓겨나갈 것 같은 불안을 느꼈지요. 그래서 창덕궁에 있기를 싫어했습니다. 광해군은 계속 경운궁에 머무르고 싶어 했지만 경운궁은 너무 좁았고 조정 대신들도 큰 궁으로 자꾸 옮기라고 하니 더 큰 궁궐을 자꾸 짓고 싶었던 것이었지요.
당시는 중국 땅에서는 명나라와 청나라가 주도권을 잡으려고 각축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사실 명나라는 기운이 다해가는 중이었고 청나라는 떠오르는 세력이어서 힘으로만 본다면 청나라와 친하게 지내야 했습니다. 하지만 조선의 주도 세력들은 여전히 '대명천지(大明天地)'를 부르짖고 있었습니다. 명과 청의 전쟁이 벌어졌을 때 군사를 파견해달라는 명의 요청에 광해는 중립 노선을 견지하였는데 조선의 주도 세력 중 하나였던 노론은 광해를 역적 취급을 하며 그를 몰아낼 궁리를 하였습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역모 사건은 수시 때때로 발생하여 광해를 더욱 더 불안에 빠뜨렸지요. 이런 불안감때문인지 인목 왕비의 소생인 적통 왕자인 동생 영창대군을 죽이라는 명령을 내리고야 말았고 비록 친어머니는 아니지만 어머니인 인목대비를 덕수궁에 유폐하라는 명령까지 내리게 되었습니다.
광해는 자신의 미래에 대한 불행을 느끼고 있었던 걸까요? 아니면 개인의 불안과 콤플렉스가 불행으로 이끈 것일까요? 동생을 죽인 사건과 무리한 궁궐 공사 등의 이유로 광해는 자신의 불안한 느낌대로 조카에 의해 임금 자리에 쫓겨나고 말았어요. 광해는 자신이 즉위한 즉조당에서 임금의 자리에서 쫓겨났고, 자신이 즉위하고 쫓겨난 바로 그 자리, 즉조당에서 자신의 조카인 능양군이 임금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작은 아버지 광해군을 쫓아내고 즉조당에서 임금의 자리에 오른 인조는 광해군이 시작했던 거대했던 궁궐 공사를 멈추게 했습니다. 광해군이 거행했던 더 큰 궁궐의 이름은 인경궁이었습니다. 인경궁은 창덕궁을 능가했고 경복궁보다 더 컸다고 합니다. 공사 중이던 인경궁은 공사를 멈추었고 인조반정이 일어나 화재로 불탄 창덕궁을 복원하기 위해 인경궁을 뜯어 자재로 사용했습니다. 남은 인경궁의 전각들로 이런저런 역사적 사건들로 인해 다 해체되어 다른 곳으로 옮겨지고 헐어져 지금은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네요.
그때 인조반정이 있지 않았다면, 인조반정이 있어서도 창덕궁이 불에만 타지 않았더라며, 인경궁이 뜯기지 않았다면, 우리는 또 다른 하나의 커다랗고 가치가 뛰어난 궁궐을 가질 수 있었을 것입니다. 또한 조선은 병자호란, 정묘호란 등으로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리는 일이 없었을 지도 모릅니다.
비록 역사에서 쫓겨난 임금으로 실록도 아닌 일기밖에 남지 않은 임금이지만, 우리는 광해군 덕택에 창덕궁도 창경궁도 덕수궁도 중건하고 보수하여 지금의 조선 5대 궁궐을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덕수궁 즉조당 앞에서 비운의 임금 광해를 떠올리고 생각한다면 불안과 슬픔의 나날을 살았던 광해가 먼 곳에서나마 흐뭇해하지 않을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