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변의 역사 - 마지막 어전회의가 열린 창덕궁 흥복헌
-1910년 8월 22일 오전 10시
대한제국 총리대신 이완용은 민병석과 윤덕영을 불렀다. 이완용은 오늘 그동안 해왔던 일을 마무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동안 해왔던 일이란, 대한제국을 대일본제국의 품 안에 안겨주기 위한 절차를 마련하는 것이었다. 이완용은 일본 통감 데라우치와 대한제국과 일본의 병합을 위해 모종의 회의를 거듭해 왔고 마침내 병합을 위한 조약의 내용과 절차를 확정 지어 놓았다. 내용과 절차는 보안을 위해 철저히 기밀로 부첬는데, 오늘은 그 일의 마무리를 위해 관계자들에게 알려야 했다. 그래서 부른 사람이 왕족이기도 한 궁내대신 민병석과 시종원경 윤덕영이었다.
"오늘 예정되어 있던 어전회의에서 일본과 대한의 병합 조약을 체결해야 하오. 상께 이 일을 보고하여 주시오. 회의 전에 상감께서 뭔지는 알고 옥새를 찍어야 하지 않겠소이까"
이완용은 힘을 주어 또박또박 말을 내뱉었다. 민병석과 윤덕영은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별로 놀라지도 않고 알겠습니다,라는 답변을 남긴 채 창덕궁 내전에 자리해 있는 순종 임금에게로 발길을 돌렸다.
-같은 날 11시
이완용이 민병석과 윤덕영에게 어전회의 안건을 말하기 전부터 순종의 거처인 창덕궁과 고종의 거처인 경운궁에는 일본 경찰과 헌병 2,600여 명이 30미터 간격으로 궁궐을 둘러싸고 있었다. 별일이야 없겠지만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서 나쁠 것이 없을 거라고 이완용은 생각했고 데라우치도 동의했다.
일본 경찰과 헌병에 둘러싸인 채 순종은 윤덕영과 민병석을 대면했다. 윤덕영이 입을 먼저 뗐다.
"폐하, 일본과의 병합 준비가 모두 끝났다고 하옵니다. 조약 체결만이 남았사옵니다. 조약 체결을 위한 대한의 전권대사로 이완용 총리대신을 정식으로 임명하는 절차가 필요하온데 오늘 어전회의에서 이완용 대감을 전권대사로 임명함이 옳은 줄로 아뢰옵니다."
황제는 묵묵히 윤덕영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힘없는 나라의 황제가 할 수 있는 게 없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나'
이런 생각을 되풀이할 뿐이었다.
"폐하, 뭐라 하명을 주시옵소서"
민병석이 황제를 재촉하였다. 황제는 대답을 내리었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대세가 된 게 아니오? 1시경에 어전회의를 열도록 준비하도록 하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두 대신은 황제 앞에 머리를 조아렸다.
-같은 날 오후 1시
어전회의를 위해 사람들이 하나 둘 모였다. 총리대신 이완용, 내부대신 박제순, 농상공부대신 조중응, 탁지부대신 고영희 법부대신 이제곤이 왔다. 학부대신 이용직은 병합에 불만을 품고 나오지 않았다. 왕족을 대표하여 이회 공 (고종의 형), 원로를 대표하여 김윤식, 황제의 측근으로 궁내대신 민병석, 시종원경 윤덕영, 시종무관 이병무 등이 자리를 하였다. 이들이 모인 곳은 창덕궁 중궁전인 대조전 옆에 딸린 날개채인 흥복헌이었다. 복을 일으켜 불러들인다는 이름의 흥복헌인데 멀리 달아날 준비를 하고 있던 '복'은 영영 가버리려고 하는지도 몰랐다.
1시가 넘었는데도 황제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대신들은 웅성거렸다.
"아니, 황제는 왜 이리 안 나오신단 말이오?"
혹자는 이렇게 외치고,
"한 나라의 황제가 자리를 잃게 되는 조약을 하는 자리인데 무에 좋은 일이라고 일찌감치 오시겠소!"
혹자는 이렇게 항변하기도 했다.
1시간이 다 되도록 황제는 오지 않고 있었다.
-같은 날 오후 2시
황제의 측근인 윤덕영과 민병석이 황제를 모시고 왔다. 황제의 어깨는 땅에 떨어질 지경으로 보였다. 황제는 황후를 대동하고 나타났다. 황제는 윤덕영의 조카다. 그는 순정효황후라고 나중에 불렸다.
윤덕영이 황제를 재촉하며 조약 문서에 서명하고 옥새의 도장을 찍을 것을 권유하였다. 다른 대신들은 "폐하, 통촉하여 주십옵소서."를 외치며 황제의 서명을 압박하였다. 비록 대한의 국력이 일본으로 기우는 것이 대세라고는 하지만 황제는 자기 손으로 그 운명을 끝내고 싶지는 않았다. 황제와 황후는 비극의 시간이 시작되는 것을 최대한 늦추고 싶었다. 비록 한 시간밖에 벌지 못했지만.
"폐하, 이리 마냥 늦추신다고 되는 일이 아니옵니다. 어차피 조인해야 하지 않사옵니까. 이왕 하실 것, 어서 옥새를 찍으시지요."
처음에는 부탁과 권유의 목소리를 내던 대신들은 점점 강요와 압박의 톤으로 바뀌어 갔다. 황제의 손이 떨렸다. '내가 대한의 끝을 짓는 마지막 왕이 되다니... 이런 치욕이 있단 말인가...' 황제는 차마 옥새를 들지 못했다.
그때였다. 같이 온 황후가 갑자기 옥새를 집어 들더니 흥복헌 방 뒤편에 길게 펼쳐진 병풍 뒤로 숨어 버렸다.
"황후마마, 어찌 이러십니까. 어서 나오시지요."
"황후마마, 옥새를 돌려주시옵소서."
대신들은 일시에 합창을 하듯 병풍 뒤 황후에게 목청 높여 외쳤다. 병풍 뒤에서 눈물을 흘리며 떨리는 목소리로 황후는 말했다.
"당신들은 도대체 누구의 신하이며, 누구의 대신이요? 나라를 넘기는데 황제를 부추기다니요, 어찌 그럴 수가 있소! 조약문에 옥새를 찍으면 이 나라는 끝이요. 대한의 황제와 황후로서 그럴 수는 없소!"
황후는 병풍 뒤에서 옥새를 치마 속에 감추고는 치마를 꼭꼭 감싸고 어린 새처럼 떨고 있었다.
대신들은 아녀자의, 그것도 한 나라 국모의 치마 속을 들춰낼 수가 없기에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보다 못한 황후의 큰아버지였던 윤덕영은 국모가 아닌 조카의 치마를 들어 옥새를 강제로 빼앗아 황제의 손에 쥐어 주었다. '끝났다. 어쩔 수가 없다'라고 생각이 든 황제는 하는 수 없이 한일병합조약문 위에 옥새를 힘 없이 찍어 눌렀다.
-같은 날 오후 4시
총리대신 이완용은 황제의 조인이 끝나자 서둘러 남산에 있는 데라우치에게 달려갔다. 조약 전권대사인 이완용은 모든 권한을 위임받았고 황제가 옥새를 찍은 조약문을 데라우치에게 내밀었다.
제1 조 한국 황제 폐하는 한국 전부(全部)에 관한 일체 통치권을 완전히 또 영구히 일본 황제 폐하에게 양여한다.
이렇게 시작된 8개의 조항으로 된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되어 버린 것이었다.
조약은 1910년 8월 22일 오후 4시에 조인되었다. 하나 황제는 끝까지 서명을 하지 않았고 비준의 절차도 거치지 않았다. 일본의 주장과 달리, 경술국치 조약은 명백한 무효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