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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월 Oct 13. 2024

황제의 설움이여, 헤이그의 울분이여!

졍변과 저항의 역사 - 덕수궁 중화전

지금으로부터 겨우 117년전인 1907년 양력 7월 19일,

살아있는 황제 고종은 아들 순종에게 황제 자리를 내어주었습니다.


일본은 고종에게 퇴위를 강요했으나 고종은 아들 순종에게 대리청정을 시킨다는 조칙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일본은 고종의 뜻대로 되게 놔두지 않았습니다. 일본의 고종의 대리청청 조칙을 멋대로 황제위 양위로 일을 진행시켰습니다. 이에 고종 황제의 양위식이자 순종의 즉위식을 대대적으로 준비하였습니다. 순종의 양위식 행사와 축하연이 준비된 곳이 지금의 덕수궁이자 당시 경운궁의 정전인 중화전입니다.


고종과 순종은 중화전 축하연에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고종의 퇴위나 순종의 양위가 자의에 의한 것이 아니고 일본에 의해 강제적인 것이었기에 참석의 필요도 의지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일본은 양위의 공식 석상에 고종과 순종이 참석했다는 증거가 필요했습니다. 이번 양위가 자의에 의한 것이었다고 대내외에 대대적으로 왜곡 선전을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일본은 다른 사람 두 사람을(아마도 내시라고 생각되어지는) 데려다가 고종과 순종의 옷을 입혀서 행사에 참석하게 했다고 합니다.


고종은 왜 강제로 황제자리에서 쫓겨나게 되었을까요?

바로 헤이그특사 파견 사건때문입니다.


1905년에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는 바람에 대한제국은 외교권을 뺏기고 말았습니다. 고종은,

"을사늑약은 무효이니라!!!"

라고 강력하게 주장을 했지만 이미 힘 없는 나라가 되어버린 상태여서 아무도 그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어요.  일본은 이때 즈음부터 고종을 거의 연금 상태로 만들어 놓고 행동 하나, 말 한마디도 감시하였기에 고종은 할 수 있는 일이 아주 제한적이었습니다.


고종은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제2차 만국평화회의가 열린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대한제국이 2차만국평화회에 초대되었다는 이야기도 들었지요.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고종은 결심했습니다.

"헤이그에 밀사를 보내야 겠다. 그래서 우리 대한제국의 목소리를 전달해야겠다. 온 나라들이 모일터이니 우리를 측은히 여기고 일본의 간악한 행동을 멈추는데 필시 도와줄 것이다."


일본이 고종의 일거수 일투족을 전부 감시하고 있는 상태에서 고종은 어떻게 밀사를 파견할까 고민을 거듭하였습니다. 어느 날 고종은 미국인 선교사 헐버트를 덕수궁으로 불렀습니다. 그리고 직접 쓴 친서를 전달하면서 헐버트에게 당부를 합니다.

"그대는 이 친서를 들고 일본의 특사인 척 하여 헤이그로 가주게. 일본이 지금 내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감시하니 제국의 신하들에게 하교를 함부로 내릴수도 그들을 밀사로 파견하기도 어려워. 그대가 일본의 눈길을 따돌려준다면 내 이 나라의 신하들을 헤이그로 보내서 우리의 사정을 이야기하고 조약의 부당함을 알리려 하네."


고종은 동시에 이준, 이상설, 이위종 세 사람을 몰래 헤이그로 떠날 밀사로 임명하였습니다. 일본이 눈치를 못채게 하려고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백지에 수결과 옥새만 찍어서 궁 밖으로 보냈습니다. 밀지를 들고 이준은 1907년 4월 어느 날 헤이그를 향해 한양을 떠났습니다. 이준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법학교육기관인 법관양성소 1기 졸업생이며 한성재판소 검사보로 임명되기도 했지만 고관의 비행을 탄핵한 일로 눈 밖에 벗어나 한 달만에 검사보에게 쫓겨나기도 했습니다.  

왼쪽부터 이준, 이상설, 이위종


헤이그 밀사 세 사람의 접선은 첩보 영화처럼 극비리에 진행되었습니다.

이준은 혼자 한양을 떠나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에 도착했습니다. 블라디보스톡에는 헤이그 밀사의 정사로 임명된 이상설이 먼저 도착해 있었습니다. 이상설은  국제법을 공부한 대한제국 관리였다가 일본의 압제로 만주로 떠나 교육 독립운동을 펼치고 있었는데 이마저도 운영하던 학교가 일제에 의해서 문을 닫아버린 상태였습니다. 이준과 이상설은 블라디보스톡에서 합류하여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기나 긴 여행을 시작했습니다. 기차를 탄 이준과 이상설, 어디로 가고 있었을까요? 그들은 마지막 헤이그 밀사인 이위종을 만나야 했습니다.


6월이 막 시작된 어느 날, 이준과 이상설을 태운 기차는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그에 도착했습니다. 이곳에서 두 사람은 독립운동가이자 주러시아 대한제국 공사인 이범진의 둘째 아들인 청년 이위종을 조우했지요. 청년 이위종은 23살의 아주 잘생긴 청년이었습니다. 이위종은 외교관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미국, 러시아 등에서 살았기에 무려 7개 외국어를 할 줄 알았는데 그중에서도 영어, 러시아어, 불어는 원어민 수준의 실력을 갖고 있었습니다. 탁월한 외국어 실력으로 이번 밀사 임무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되었습니다.

 

이위종은 헤이그에 밀사로 갈 당시 이미 결혼을 한 상태였습니다. 이위종의 부인은 러시아 여성 엘리자베스 놀켄이라는 사람이었는데 러시아 외교관이자 남작 작위를 가진 귀족의 딸이었습니다. 이위종은 그녀를 어느 음악회에서 보고 첫 눈에 반해 버렸습니다. 위종은 엘리자베스의 사랑을 얻으려고 그녀의 오빠에게 다가가 그와 친구가 되었고 동생인 엘리자베스와 안면을 틔게 되었습니다. 선남과 선녀의 만남과 사랑은 자연스럽게 이어졌습니다. 두 사람은 결혼까지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준, 이상설, 이위종 세 사람은 샹트페테르부르그를 출발하여 베를린을 거쳐 늦은 6월의 어느 날 드디어 헤이그에 도착했습니다. 헤이그의 한 호텔에 여장을 풀고 호텔에 대한제국 국기인 태극기를 게양하고 대한제국 황제의 특사가 헤이그에 도착했다는 것을 만방에 알리기 시작했습니다. 일본은 그제야 고종이 헤이그에 밀사를 파견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토 히로부미는 이 사실을 알고 고종에게 가서 노발대발 따져 묻고 역정을 내었다지요.


특사들은 만국평화회의 의장인 러시아 사람 넬레도프 백작에게 가서 일본의 국권 침탈과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설명하고 회의장에 참석시켜 줄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또한 다른 여러 나라 대표들도 방문하여 같은 내용의 호소를 하였습니다. 하지만 만국평화회의가 시작하기 전부터 영일동맹, 가쓰라-테프트조약 등으로 일본과 동맹을 맺은 제국주의 나라들과 서구 열강들은 대한제국의 처지를 동정은 했지만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외교란 본시 자국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하는 것입니다. 자국의 이익을 위해 일본과 이미 협약을 맺은 터여서 대한제국을 도와줄 수도 없었고 도와줄 필요도 없었을 것입니다.


특사들은 다른 방법을 찾기로 했습니다. 특사는 일제의 침략상과 대한제국의 입장을 담은 편지를 각국 대표에게 전달하였고 이준은 회의장 입장은 못하지만 대신 회의장에서 간절함이 담긴 호소문을 발표하였습니다. 외국어에 능통한 이위종은 호의적인 영국의 기자인 윌리엄 스테드와 다음과 같은 인터뷰를 하기도 했습니다.


-스테드: 여기서 뭘 하십니까? 왜 이 평화 회의에 파문을 던지려 하십니까?

-이위종: 저는 아주 먼 나라에서 왔습니다. 이곳에 온 목적은 법과 정의를 찾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각국 대표단들 은 무엇을 하는 겁니까.

-스테드: 그들은 세계의 평화와 정의를 구현하려는 목적으로 조약을 맺게 됩니다.

-이위종: 조약이라구요? 그렇다면 소위 1905년 조약은 조약이 아닙니다. 그것은 저희 황제의 허가를 받지 않은 채 체결된 하나의 협약일 뿐입니다. 한국의 이 조약은 무효입니다.

-스테드: 하지만 일본은 힘이 있다는 걸 잊으셨군요.

-이위종: 그렇다면 당신들의 정의는 겉치레에 불과할 뿐이며 기독교 신앙은 위선일 뿐입니다. 왜 한국이 희생되어야 합니까? 일본이 힘이 있기 때문인가요? 이곳에서 정의와 법과 권리에 대해 말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왜 차라리 솔직하게 총, 칼이 당신들의 유일한 법전이며 강한 자는 처벌받지 않는다고 고백하지 못하는 겁니까?


이 인터뷰와 특사단의 호소와 활동은 '만국평화회의보'에 사진과 함께 크게 게재되어 현지 언론인과 시민단체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습니다. 이 인터뷰는 서구열강들이 대한제국을 동정한다는 결의문을 채택하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더 이상의 성과를 남기지 못하자 특사단은 좌절에 빠졌습니다. 울분을 못 이겨 몸이 편치 않았던 이준은 그만 헤이그의 호텔방에서 죽음을 맞이하고 말았습니다. 이준의 죽음에는 자살설, 독살설, 신병설 등이 있으나 아쉽게도 정확한 이유를 아직까지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만국평화회의가 끝나고 이상설과 이위종은 대한제국으로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돌아가면 일제에 의해서 고문이나 죽음을 맞을 게 뻔하기 때문입니다. 일제는 두 사람을 처벌하기 위한 재판을 강행했습니다. 당사자도 없는 재판에서 일제는 이상설과 이위종에게 각각 사형과 종신형을 선고했습니다. 만국평화회의는 끝났지만 이상설과 이위종 두 사람은 각각 자신의 방법으로 독립 운동을 계속하였습니다.


헤이그 특사 사건 이후 일제는 '허락도 없이 멋대로 일을 처리한' 고종을 그냥 내버려 둘 수 없다고 판단하였습니다. 하여, 만국평화회의가 끝나자마자 바로 고종에게 퇴위를 강요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고종의 강제 퇴위와 순종의 강제 양위가 덕수궁 중화전에서 일어나게 된 배경이 되었습니다.




▶중화전은 원래 중층의 규모가 큰 건물이었으나  대화재이후  자금난으로  단층으로 지어졌다.

▶중화전은 대한제국의 궁궐이라 황제국의 흔적이 많이 남아있다.

→중화전 답도는 다른 궁궐처럼 봉황이 아니라 용이다.

→전각의 문살은 황금색이다.

→전각 앞 드므에는 ‘만세’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만세'는 황제국만 쓰는 말로 전에는 '천세'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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