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내 인생 버킷리스트 중 하나이다. 막연히 희망사항으로 가지고 있던 이 소망을 위해 나는 지난 8월 소설 창작을 위한 강의를 수강하였다. 강의 말미에 초단편 소설 3편을 써서 발표하는 시간이 있었다. 제출했던 초단편 소설 중 한 편은 '보름달'이라는 제목을 가졌다. 이것은 보름달 두둥실 뜨던 날 서로의 미래를 약속하고 혼례를 올렸던 내 부모의 이야기를 소재로 한 소설이었다.
합평을 받을 때, 몇몇 사람들이 '그래서 무슨 말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다'는 평을 내놓았고 나는 부끄러움에 얼굴이 한여름 태양처럼 붉게 타올라 폭발할 지경이 되었다. 그 와중에 지금은 누구인지 기억도 못할 어떤 수강자가 말했다.
"천명관의 소설 <고래>를 읽는 것 같은 느낌이 드네요."
천명관이라면 <고령화 가족>밖에 읽어본 게 없는 나는 그 소설 재미있나요,라는 부질없는 질문을 하였고, 내 부질없는 질문에 그 사람은 성의껏 대답하였다.
"저는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홍월님 스타일일 것 같아요."
이렇게 알게된 소설 <고래>를 소설 강의가 다 끝난 지금에야 읽었고 어제 마지막 장을 덮었고 그 사람이 왜 '보름달'을 읽고 '고래'를 추천했는지 조금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고래'는 여인 삼대기의 이야기이다. 아니, 삼대기라고 하기에는 첫 번째 등장인물인 노파는 금복의 피붙이가 아니기에 정확한 용어는 아닌 것 같다. 그냥 여자 3명의 일대기를 다룬 소설이라고 하자.
소설은 아마도 일제시대 어느 시점부터 시작되는 것으로 짐작된다. 소설에는 시대에 대한 구체적 언급은 전혀 없다. 다만, '전쟁'이라던지 '장군'이라던지 '기관원'이라던지 하는 용어로 소설 속 시대를 추측할 뿐이다.
소설은 공간과 시간에 따라 3부로 나누어져 있다. 1부는 '부두' 2부는 '평대' 3부는 '공장'이라는 이름이다.
이 소설에는 수많은 등장인물이 나온다. 우선 주인공에는 앞서 말한 못난이 노파가 있고 노파의 숨겨진 재산을 우연히 갖게 된 금복이 있고 금복의 딸로서 말은 못 하지만 뛰어난 감각을 가진 그리고 통뼈의 괴력을 가진 춘희가 있다.
조연으로는, 노파에게 딸을 가지게 해 준 양반집 반편이, 노파의 딸 애꾸, 금복을 돌보아 준 쌍둥이자매, 쌍둥이자매의 친구이자 춘희의 영혼의 단짝 코끼리점보, 금복의 첫 남자 생선장수, 금복의 남편이자 춘희의 아버지인 걸로 짐작되는 임꺽정 같은 괴력의 사나이 걱정이, 금복을 사랑한 '희대의 사기꾼이자 악명 높은 밀수꾼에 그 도시에서 상대가 없는 칼잡이인 동시에 호가 난 난봉꾼이며 모든 부둣가 창녀들의 기둥서방에 염량 빠른 거간꾼'인 칼잡이, 춘희에게 벽돌 굽는 법을 가르쳐 준 금복의 남자 文, 금복의 어릴 적 친구이자 금복의 재산을 야금야금 뺏고 여자도 뺏어 달아난 약장수, 금복의 여자이자 약장수의 여자가 된 수련, 춘희를 지독히도 괴롭혔던 교도소 간수 철가면, 춘희가 수감되었던 교도소의 소장, 춘희가 여자임을 알게 해 준 춘희의 어릴 적 동무이자 트럭 운전수 등이 있다.
사실 이 외에도 조연들은 수도 없이 많지만 일일이 열거하는 것은 의미가 없을 것이다.
문제는, 이 소설에는 조연으로 등장하는 인물들의 일대기도 다 쓰여 있어서 독자들은 주인공인 금복과 춘희의 인생과 생각을 따라잡기도 바쁜데 조연들의 인생살이까지 챙겨야 하니 소설을 읽는 동안 마음이 바빠진다는 거다. 애꾸가 엄마인 노파에게 쫓겨나는 장면에선 애꾸에게 마음이 쓰이다가 애꾸가 2부 평대에서 금복의 벽돌 공장을 차지하고 있을 때는 얄미워지고 3부 공장에선 애꾸가 춘희의 몸에 들어간 사충을 고쳐줄 땐 고마움을 느끼게 된다. 애꾸가 계곡에서 죽었을지 살았을지 신경이 쓰이는데 작가는 끝까지 말을 아낀다. 조연이니 결말이 필요 없다는 것일까?
첫사랑 게이샤 나오꼬를 닮아서 금복을 사랑하게 된 칼잡이에게선 '파친코'의 한수를 떠올렸고 칼잡이의 어이없는 죽음에선 이 희대의 사기꾼이자 악명 높은 밀수꾼에 호가 난 난봉꾼에 염량 빠른 거간꾼이 불쌍해지기까지 하는 거다.
춘희와 어릴 적 팔씨름에서 승부를 보지 못했던 트럭 운전수는 춘희가 출옥 후 공장에서 혼자 사람들을 기다리며 벽돌을 굽고 있을 때 춘희와 조우한다. 방랑벽이 있던 트럭 운전수는 간간히 춘희에게 들러 생필품을 주고 벽돌을 팔아 주었다. 나는 진심 이 둘이 잘 되어서 자식도 낳으면서 벽돌 공장에서 해피엔딩을 맞기를 책장을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기원을 하였다. 하지만, 독자의 소원대로 이야기가 펼쳐진 소설이 무슨무슨 문학상에서 상을 타는 꼴을 보지 못한 나는('고래'는 10회 문학동네 소설상 수상작이다.) 새드 엔딩을 어느 정도 예상을 하긴 하였다. 하지만 작가여, 셋 다 죽일 필요까지 있었는가! 셋 중 하나라도 살릴 순 없었을까. 모진 사람 천명관. (여기서 내가 말하는 '셋'이 누구인지는 직접 소설을 읽어보시고 알아내시길 바란다.)
1부 부두는 못난이 노파가 어떻게 해서 죽게 되었는지, 그 많던 노파의 재산을 어떻게 해서 금복이 가지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리고 금복의 딸 춘희도 1부 끄트머리에서 등장을 하고 있다. 금복이 부둣가에서 건어물 장사를 하는 이야기가 주된 이야기라서 1부의 제목이 '부두'인 것 같다. 그리고 소설의 제목인 '고래'를 금복이 처음 본 것도 부두가이기에 부두는 소설에 제목을 제공하기는 장소이기에 아주 중요한 곳이라 하겠다.
2부는 평대라는 지명에서 일어난 이야기이다. 부자가 된 금복은 쌍둥이자매를 불러오고 평대에서 벽돌 공장을 짓고 고래 극장을 짓고 남자가 되고 사업가가 되는 이야기가 담겨 있다. 1부 부두에서 당당한 여성 전사였던 금복은 2부 평대에서는 권력의 맛을 알고 돈의 맛을 깨우치며 性의 쾌락을 (남자 여자 모두에게서) 향유하는 지방 유지가 되어 간다. 이 와중에 자신의 딸 춘희는 철저히 배제되며 춘희는 쌍둥이자매의 친구 코끼리 점보와 영혼의 대화를 나누며 스스로 성장을 한다. 금복의 남자 文은 춘희에게 벽돌 만드는 법을 가르쳐 주는데 춘희는 벽돌을 만드는 데 천부의 재질이 있었다. 2부의 마지막은 고래 극장에서 개봉작을 상영하는 날, 우연히(?) 발생한 화재로 극장 안에 있던 팔백여 명의 사람이 죽고 말 못 하는 춘희만 살아남았다는 이유로 방화범으로 잡혀간다는 것으로 장식되었다. 진짜 방화범은 누구였을까?
3부는 춘희의 끔찍한 교도소 생활과 출옥 후 평대에 돌아와 벽돌 공장에서 혼자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제일 짧은 분량이지만 개인적으로는 제일 폐부를 찌르르하니 찌르는 부분이었다. 외부와 고립된 공장에서 트럭 운전수와 교감하면서 벽돌을 구우면서 자식 낳고 그렇게, 자신들만의 왕국을 이루면서 잘 살기를 그렇게 빌었건만, 작가는 '소설상'을 타기 위해서(실제로는 아니겠지만) 모두를 죽이고야 말았다. 꼭 그렇게 사람의 가슴을 답답하게 만들고 눈에서 눈물 한 방울씩 꼭 찍어내려야 만 속이 후련했냐 말이다.
물론, 코끼리점보의 등에 올라타서 우주의 한 점으로 회귀하는 동안 춘희는 불행해 보이지는 않았다. 자신을 버렸다고 생각한 트럭 운전수도 실은 사고로 죽어서 오지 못했다는 것도 알았고 코끼리점보처럼 자신도 영원히 사라진다는 것을 알게 되지만 한편으론 코끼리 점보가 말한 '누군가 너를 기억한다면 그것은 존재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을 느꼈을 것이기 때문이다.
소설에서는 춘희를 아는 사람은 대부분 사라지지만 우연히 발견된 춘희의 벽돌은 건축가를 통해서 언론을 통해서 '평대벽와' 공장 인부들의 증언을 통해서 춘희는 사람들 사이에서 회자되고 기억되었다. 춘희는 코끼리점보의 말처럼 대극장 건물이 없어지지 않는 한, 영원히 기억되고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천부적 이야기꾼 천명관은 소설을 이야기하듯이 쓰기도 하고 평전을 쓰듯이 담담하게 읊어내리기도 하였다. 현재와 과거를 오가기도 하고 가끔은 미래로 건너뛰기도 한다. 꼭 조선시대 전기수가 관객들 앞에서 책을 읽어주는 것 같은 기법인 것 같기도 하고 무성영화 시대 변사가 영화를 읽어주는 것 같기도 하다. 나에게는 낯선 방식의 소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은 흡입력이 있으며 노파와 금복과 춘희의 다음 이야기가 기대가 되었다. 개인적으로는 금복이 나오는 부분보다 춘희의 이야기가 더 흥미진진하였다.
야망에서 욕망으로 포부에서 권력으로 사회적 진화를 하는 금복의 이야기는 요즘 매체에서 너무 많이 보았나 보다. 금복이 얄밉고 속상하고 응원해주고 싶지가 않았다.
춘희는 하얀 눈 같고 개망초같이 청초했고 코끼리처럼 순진했으며 그리고 안타까웠다. 현실엔 이런 인물이 없으니까. 아니 없어야만 하니까. 실제로 있다면 그는 너무 큰 희생을 치러야만 하니까.
소설은 실제 역사 같기도 하고 판타지 같기도 하다. 박정희를 일컫는 '장군'은 진짜인 것 같은데 장군의 명령을 받고 지은 벽돌로 만든 대극장은 가짜일 것이 틀림없을 거다.(내가 모르고 있는 거일지도. 누군가 안다면 제발 내게 알려주시길!)
평대라는 지명이 있나, 찾아보았다. 용인시 어딘가에 평대라는 곳이 있었다. 벽돌 공장이 있던 남발안도 용인시 부근에 있었다. 평대나 남발안도 실제 지명인지, 작가의 창작인지도 애매하다. (누군가 안다면 이것 역시 알려주시길!)
나는 소설을 이런 식으로 써도 된다는 것을 <고래>를 보고 알게 되었다.
'보름달'을 쓸 때, 가급적 현실적 지명을 바탕으로 가급적 현실을 고증하면서 쓰려고 하였다. 그리고 나는 개인의 역사가 사회의 역사와 맞물려 이야기가 전개되는 방식을 선호하는데 <고래>는 이런 방식을 쓰면서도 퓨전인 것처럼 판타지인 것처럼 서술을 하였다. 나는 내 버킷리스트를 완성하는데 <고래>를 읽음으로써 조금 더 자유로워졌다고 할 수 있을 듯하다.
소설 창작 강좌를 끝내고 다시 보통의 나날을(나태하고 소파와 물아일체가 된) 보내고 있던 요즘 <고래>를 읽고 다시 '보름달'을 꺼내 보았다. '고래'에 자극을 받아서 '보름달'의 다음 이야기인 '군대' 혹은 '시집살이' 혹은 '장녀' 같은 다음 이야기도 한동안은 쓸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한동안이 끝나면, 다시 '고래'를 집어 들던지 아니면 '고래'와 비슷한 다른 소설을 찾아볼지 그건 한동안이 끝난 그때 가서 다시 생각해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