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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대택 Aug 31. 2020

032 결렬되는 홍콩 회담,
성공으로 자평하는 남한

남한의 소극적 회담 대응과 책임론 피하기 (63.5-6)


드디어 남북한이 홍콩의 한 자리에서 만납니다. 1963년 5월 15일입니다. 


마주 앉는 순간 북한은 어떠한 생각을 했을까요. 남한은 명확했습니다. 남한은 여차하면 대부분의 의제를 차기 회담으로 미루되 최악으로 결렬만은 막는다는 전략이었습니다 (32-1). 


홍콩 회담이 끝나면서 형식적으로 결렬은 아니었습니다. 차기 회담에 양측이 동의하고 헤어졌으니까요. 그런데 결국 남북은 재회하지 못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지금부터 그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32-2). 



이상백의 보고서북한올림픽위원회의 보고서서로 다른 감각 



홍콩 남북체육회담은 1963년 5월 16일부터 6월 1일까지 홍콩의 페닌슐라 호텔 Peninsula Hotel에서 진행됩니다. 회담은 하루 전인 15일 회담 진행의 방식을 협의하기 위해 연락관들의 liaison 만남을 제외하고 총 18회 진행됩니다. 


회담이 종료되고 이상백은 KOC 회장 대행의 자격으로 6월 11일, IOC 사무총장 오토 마이어에게 보내는 형식으로 12쪽짜리 회담 보고서를 작성합니다 (32-3). 보고서는 회담 장소와 일정, 남한 대표단 명단, 첫 연락관 교섭부터 전체 대표단의 일간 논의 내용, 합동 발표 내용과 합의에 이른 결론, 한국 대표단장의 발표문, 홍콩 동의의 인준 등을 담습니다. 


북한은 북한대로 평양발 북한올림픽위원회 이름으로 6월 13일, IOC 사무총장 오토 마이어에게 보내는 형식으로 10쪽짜리 보고서를 작성합니다 (32-4). 


여기서 두 보고서의 자세한 내용을 모두 번역하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두 보고서가 풍기는 인상을 잠시 소개할 필요는 있을 듯합니다. 남한 측의 보고서는 매우 건조하게 일지 형식으로 진행된 내용과 결과만을 기술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이에 비해 북한 측은 회의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결과에 이르지 못한 상황과 양쪽의 입장을 그대로 기술하는 방식을 사용합니다. 그리고 논의 사안별로 양측의 견해와 태도를 기술합니다. 


만약 이 두 보고서를 받는 입장에서 본다면, 북한의 보고서가 이상백의 것에 비해 더 솔직하고 적나라하게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리고 굳이 회담 결렬의 귀책을 찾고자 한다면 그것은 남한 측에 더 있을 것이라 판단하게 될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이렇습니다. 북한의 보고서는 서론부터 남한의 태도를 지적하면서 시작합니다. 



‘(중략) 1월 로젠 동의에 따라 북한은 단일팀 구성에 최대한 준비하고 노력했음. 그러나 남한은 초반부터 회담의 ‘원칙’과 ‘개념’을 정하자고 했으며, 의도적으로 논의 의제에 대해 ‘승인 안 된 사항’ ‘미 준비 상태’로 돌리며 회피했음.’



북한은 논의 사안별로 결론에 이른 것, 그렇지 못한 것, 그렇지 못한 이유를 적는데 보고서의 대부분을 할애합니다. 그리고 최종 공보를 다음과 같이 적습니다. 



‘회담에서 많은 사안들이 결론에 도달하지 않았으니, 우리는 양쪽 대표가 서명한 공보를 발표하자고 주장했음. 우리는 회담에서 양측이 제안한 사안을 견해 없이 명확히 공보에 기술하자 요구했음. 남한은 양쪽 입장을 공개하는 것에 반대할 뿐 아니라, 회담에서 합의에 이르지 못한 문서에 서명하는 것을 거부했음. 양측은 마지막 공보에 동의된 사안과 차기 회의 의제만을 포함하기로 동의했음. 우리는 반복적으로 회담 과정이 공개되어야 함을 명확히 했으며, 이는 한국민과 세계 스포츠맨들이 회담의 진실을 이해함으로써 단일팀 구성에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함. 이는 회담 4일째 남한위원회 부위원장 이효의 명예 훼손적인 발표에서 드러나듯, 회의 이후에 사실이 왜곡되는 경우가 발생함. 회담이 종료된 상황에서, 특히 선수 선발 장소와 일정 합의에 실패함. 실망스러운 일임. 단일팀은 한쪽의 노력만으로 안 됨. 남측은 회담에서 진지하고 성실한 신의를 보이지 못했고 올림픽 정신을 저버린 정치적 지시를 받았음. 남한이 차후 회담에서 많은 사안에서 합의에 이르기를 기대함. 단일팀 구성이 빠르게 구성되기를 기대함.’



홍콩 회담의 합의 사항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합의 사항은 있습니다. 외교부의 ‘대한민국외교사료해제집 1963’에는 요약된 홍콩 회담의 결과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32-5). 온라인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논의 내용과 합의 내용은 다음과 같죠. 


단일팀 호칭 문제는 초반부터 양측의 주장이 첨예하여 합의되지 않았습니다. 남한은 ‘한국’을 북한은 ‘조선’을 주장했기에 합의에 이르지 못합니다. 선수 선발과 임원 구성 문제도 합의에 이르지 못합니다. 차기 회담 일정과 장소로는 북한이 랑군이나 판문점을 주장했지만 남한은 IOC를 통하자고 해 합의합니다. 그리고 최종 회담 일의 마지막 공동 공보에서는 선수 선발은 전 종목에 걸쳐 예선을 실시하되, 각 경기단체의 협조를 요청해 제3국 심판을 배정받는 것으로 합니다. 그리고 앞으로의 논의에서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 IOC 주선을 요청할 것을 합의합니다. 



홍콩 회담을 마친 남한의 자평



홍콩 회담을 마친 후 6월 4일 주 홍콩총영사가 작성한 최종보고는 남한의 회담 평가를 저울질할 수 있습니다 (32-6). 이 보고는 외무부의 지시에 따라 대표단이 회담을 조속히 종결시키도록 유도했고 이를 성공시켰다는 것부터 시작합니다. 


회담 총평으로는, 북한이 주요 안건의 합의를 적극적으로 보려 했으나 우리 대표단이 끝까지 미결로 미루면서 결렬 아닌 종결로 이끌었다는 점에서 소기의 목적 달성했다고 평가합니다. 또한 북한이 최종 회의 후 합의 문서를 작성하고자 하였으나 문서상의 기록을 남기지 않고 회담을 종결시킴으로써 이를 성공적이라 평가합니다. 


평가는 이어집니다. 총영사는 논의 안건 일부에 대해 원칙적 합의만 했으며, 남측이 성실히 회의에 임했다는 인상을 주었다고 평가합니다. 이로써 북한의 향후 활동에 제약이 있을 것으로 기대하면서, 북한의 추가적인 대책 검토와 강구가 어려울 것으로 판단합니다. 


이후 외무부는 회담 결과에 대한 내용을 관련된 재외 공관과 공유하고 국제 동향과 여론을 수합하는 동시에 차기 회담을 준비하기 시작합니다 (32-7). 



홍콩 회담의 결과를 평가하는 주한 미국 대사관 



남한의 홍콩 회담을 주한 미국 대사관도 매우 주의 깊게 봅니다. 1963년 6월 7일 주한 미국 대사관은 국무성과 홍콩, 제네바에 보고합니다 (32-8). 보고서는 먼저 홍콩으로부터 귀국한 외무부 국제기구과장 지연태와 대사관 직원과의 논의 내용을 적습니다. 지연태는 회담의 결과를 설명하고, 전반적으로 외무부는 한국 대표단의 성과와 교섭 결과에 비교적 만족하고 있음을 적습니다. 


지연태 과장은 후속 회담을 피할 수 없겠으나, 이 경우 남한이 협상을 회피하는 인상을 줄 수 있을 것이라 했다고 적습니다. 운이 좋다면 북한의 올림픽 참가를 막을 수도 있을 것이라 했다고 적습니다. 지연태는 2주 전 IOC 사무총장 오토 마이어로부터 협상 결렬의 원인에 따라 남한만의 출전 또는 남북한 모두의 출전이 가능할 것이라 말했다고 적습니다. 그래서 북한이 회담에 더욱 적극적이어야 함을 설명했다고 적습니다 


지 과장에게 단일팀 구성에 대한 견해를 물었을 때 지 과장은 현재 상황에서는 실제로 불가능함을 말했다고 적습니다. 지 과장은 단일팀 구성을 위한 남북의 장기적 양자 회담은 북한으로의 주도권이 기울 것임과 남한이 이 협상을 지속하는 이유는 오로지 결렬의 원망을 피하기 위함이라고 했다고 적습니다. 이어 대사관은 의견을 적어 갑니다. 


지 과장과 면담한 미국 대사관의 평가와 의견은 이렇습니다. 


대표단의 귀국과 함께 올림픽 문제는 남한 정부의 범부처위원회가 전략을 이끌 것이며, 그 결론이 지 과장의 설명과 같을지는 두고 봐야 할 것이라 적습니다. 홍콩 회담은 양측이 동등한 입장에서 협상했으며, 남한이 올림픽 팀을 내용적으로나 명분적으로 장악할 가능성이 미약함을 적습니다. 그리고 불완전한 단일팀 구성은 북쪽에 더욱 좋은 선전도구와 정치공세의 빌미를 줄 것으로 판단하는데 대사관도 동의했다고 적습니다. 북한은 이미 방송을 통해 ‘만난 것만으로도 중요하며, 논의하고 이해하고 교섭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음’이라고 선전하고 있으며, 또 다른 방송에서도 ‘남북이 미국의 침략 이후 처음을 대표단이 만난 것이므로’ 등등 선전하고 있다고 적습니다. 결과적으로 대사관은 지 과장이 말한 바와 같은 접근을 권장해 볼 수 있을 것인데 이에 대한 의견을 구한다고 적습니다. 



2차 회담을 준비하는 IOC와 북한 



홍콩 회담이 별반 소득 없이 끝남으로써 IOC와 북한은 다음 회의를 준비합니다. 북한은 먼저 회담 장소를 랑군 (양곤) 또는 판문점을 제안합니다 (32-9). 이에 오토 마이어는 6월 17일 양측에 홍콩의 같은 장소에서 6월 26일 만날 것을 제안합니다 (32-10). 그러나 북한과 남한의 일정 연기 요청으로 다시 7월 26일로 미뤄집니다 (32-9, 32-11, 32-12, 32-13). 



2차 회담을 준비하는 남한



홍콩 회담을 마친 남한은 후속 회담 준비에 들어갑니다. 1963년 6월 21일 오후 중앙정보부 제2국장실에서는 올림픽단일팀 구성을 위한 2차 회담 대책 강구 회의가 열립니다 (32-14). 이 회의는 중앙정보부 제2국장과 관계과장, 외무부 정보국장, 문교부 체육국장, 공보부 공보국장, KOC 대표, 그리고 기타 관계기관이 참석합니다. 


이 회의에서 중앙정보부는 홍콩 회담 경과를 보고하고 7월 26일부터 열릴 회담에서 중앙정보부의 판단을 설명합니다. 남한은 대책 방안의 우선순위로, 남한 단독 출전, 쌍방 불출전, 양측 개별 출전, 북한 단독 출전, 단일팀 구성으로 순서를 말합니다. 


이어 중앙정보부가 외무부에 요구하는 사항도 논의합니다. 일본 올림픽준비위원회가 남북한 양측에게 초청장을 발송하겠다는 소식이 있으니 일본 관련 기관과 비공식으로 접촉하여 북한에게는 초청장을 발송하지 않도록 교섭하라는 것과, 10월에 열릴 IOC 총회를 대비하여 회원국 대표와 사전 접촉하여 단일팀 구성에 있어서 북한 측이 성의가 없다는 것을 지적하고 가능하면 결과적으로 남한만이 참석할 수 있도록 하며 부득이한 경우 중앙정보부에서 판단한 상기 방안 우선순위에 의거하여 처리될 수 있도록 최대한의 외교역량을 발휘해 줄 것 등을 논의합니다. 


홍콩 회담에 이은 후속 조치와 방침 등의 최종 판단과 진행은 중앙정보부가 결정한 것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중앙정보부는 단일팀이 남한이 선호하는 최후의 선택이었다는 것이었죠. 







인용자료



(32-1) 국립외교원. [L-0002-06/1264/757.1] 1964년도 동경올림픽 남·북한 단일팀 구성 문제. 전 4권 (V.3 1963. 5-6) p. 28.


(32-2) 국립외교원. [L-0002-06/1264/757.1] 1964년도 동경올림픽 남·북한 단일팀 구성 문제. 전 4권 (V.3 1963. 5-6) pp. 27-159.


(32-3) 이상백이 오토 마이어에게 보내는 회담 보고서 (1963. 6. 11.) Brundage Collection, Lee, Dr. Sang Beck, 1946-1966, Olympic Studies Center, 로젠, 스위스. 


(32-4) 북한올림픽위원회가 오토 마이어에게 보내는 회담 보고서 (1963. 6. 13.) Brundage Collection, North Korea Olympic Committee, Olympic Studies Center, 로젠, 스위스. 


(32-5) 외교부, 외교사료관. [대한민국외교사료해제집 대한민국정책브리핑 1963] 63-165 1964년도 동경올림픽 남북한 단일팀 구성문제, 전5권 v.3 1963.5-6. 생산년도, 1962-1963. 생산과, 국제기구과. p. 172.

http://diplomaticarchives.mofa.go.kr/dev/search_open_docus.do


(32-6) 국립외교원. [L-0002-06/1264/757.1] 1964년도 동경올림픽 남·북한단일팀 구성문제. 전4권 (V.3 1963. 5-6) pp. 160-161.


(32-7) 국립외교원. [L-0002-06/1264/757.1] 1964년도 동경올림픽 남·북한단일팀 구성문제. 전4권 (V.3 1963. 5-6) pp. 162-186, 190-197.


(32-8) 600.3 Amusement Sports, 1963 (기록물명), RG 84 Records of the Foreign Service Posts of the Department of State, 1788-1964 (문서군명), Korea, Seoul Embassy, Classified General Records, 1952-63 (시리즈명), 국립중앙도서관 해외기록물, pp. 53-55. 


(32-9) 국립외교원. [L-0002-06/1264/757.1] 1964년도 동경올림픽 남·북한단일팀 구성문제. 전4권 (V.3 1963. 5-6) p. 182.


(32-10) 오토 마이어가 홍명희에게 보낸 전신 (1963. 6. 17.) Brundage Collection, North Korea Olympic Committee, Olympic Studies Center, 로젠, 스위스. 


(32-11) 오토 마이어가 홍명희에게 보낸 전신 (1963. 6. 27.) Brundage Collection, North Korea Olympic Committee, Olympic Studies Center, 로젠, 스위스. 


(32-12) 오토 마이어가 브런디지에게 보낸 메모 (1963. 6. 27.) Brundage Collection, North Korea Olympic Committee, Olympic Studies Center, 로젠, 스위스. 


(32-13) 오토 마이어가 북한올림픽위원회에 보낸 전신 (1963. 7. 2.) Brundage Collection, North Korea Olympic Committee, Olympic Studies Center, 로젠, 스위스. 


(32-14) 국립외교원. [L-0002-06/1264/757.1] 1964년도 동경올림픽 남·북한단일팀 구성문제. 전4권 (V.3 1963. 5-6) pp. 187-189. 



[사진설명]



옛 중앙정보부 건물, 성북구 의릉에 위치하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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