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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스터 Y May 10. 2021

제 22회 전주 국제 영화제 관람작 단평

*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검열>

  전주 국제 영화제에서의 첫 영화. 나는 영화제의 영화를 선택할 때 원칙이 있다. 개봉이 예정된 영화 혹은 개봉이 확실시되는 영화는 선택하지 않는 것이다. 영화제는 두 번 다시 볼 수 없는 영화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의 장이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2013년의 <아자가사미의 말>은 이제는 어디서도 볼 수 없고, 2017년의 <행복한 날이 곧 올 거야>를 다시 보고 싶었지만 실패했다. 아쉽지만 <검열>은 다시 보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흥미로운 지점은 1980년대 검열이라는 것을 소재로 삼았다는 것과 현실과 환상이 붕괴되는 지점을 표현하는 것이 영화라는 환영과 맞닿아 있다는 것이다. 다만 그 흥미는 설정에 그친다. 영화의 연출은 아마추어가 만든 것이 분명하다는 듯 티가 난다. 물론 아마추어리즘 같은 의미가 아니다. 그리고 설정으로만 그치는 많은 설정들. 논리적 허점들이 영화의 완성도를 절감시킨다. 논리적 허점은 생각했을 때 드러나면 상관없지만 그것이 느껴지는 순간 감정선이 무너지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여하간 영화제에서 만나는 완전히 엉망진창의 영화는 아니고 아쉬움이 남는 영화라는 것은 분명하다.      


<튤립 모양>

  한국 독립 영화에서 볼 수 있는 어떤 특정한 미학으로 접근한 듯하다. 즉흥 연출은 아닌 것처럼 느껴지고, 쇼트의 분절은 계산된 것처럼 느껴지지만 그 지점에서 즉흥 연출을 원하는 미학적 방법과 그렇지 못한 연출이 충돌하면서 묘한 이질감을 자아낸다. 물론 난 불호에 서있다. 이 영화가 <만춘>에서 자전거를 타는 장면이나 오즈의 필로우 쇼트 등 많은 장면들이 오즈 영화의 오마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도 불호에 선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긍정적인 부분들도 많은 부분 존재한다. 사랑이라는 감정을 표현하는 이 멜로 영화는 굉장히 흥미로운 지점이 존재하는데, 그건 환상의 믿음이다. 유리코는 일본에서 단 15분간 만난 남자에게 사랑에 빠져 그를 찾아 한국으로 온다. 공주라는 도시에서 그를 찾기 위해 돌아다닌다. 그리고 결국 그를 만난다. 이 믿음과 영화를 좋아하는 석영이 흠뻑 빠져있는 가와키타 유코와 똑같이 생긴 여자인 유리코를 만난다는 설정이 예상된 전개로 뻗어나간다. 그 전개가 예상되는 것은 이미 여러 영화에서 사랑이라는 환상을 깨부수는 것을 봤기 때문이다. 최근 우리는 <스파이의 아내>에서 그 환상의 작동을 목격했다. 그렇지만 그 예상된 전개임에도 불구하고 서로가 서로를 있는 그대로를 보지 못하고(물론 그것은 불가능하다) 자신이 보고 싶은 모습으로 보는 과정이 흥미롭다. 가장 흥미로운 장면은 찢어진 스크린을 애무하는 석영의 손길이다. 연출자라면 누구나 생각해 봤을 법한 장면이며, 어쩌면 이 장면은 데이빗 크로넨버그에게서 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에로틱함이 스크린 저편에 있는 허공에의 몸짓처럼 느껴진다. 난 이 한 장면만으로도 이 영화를 볼 가치가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결말의 아쉬움을 덧붙이고, 또 하나의 가장 흥미로운 장면인 유리코와 석영이 만나는 초밥집 장면을 언급하고 싶다. 자전거를 타는 장면이나 필로우 쇼트들이 오즈의 리듬감을 자아내지 못했지만 초밥집 장면만큼은 굉장히 인상적인 리듬감을 연출해냈다.      


<창밖은 겨울>

  볼 것이 없어서 보았다는 편이 적당할 것이다. 아이돌 가수가 연기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진 않는다. 영화를 다 보고 나서 한선화에게 미안한 감정이 들 정도로 한선화의 연기는 인상적이었다. 그렇다고 그녀가 연기를 훌륭하게 한 것은 아니다. 다만 내가 생각한 것 이상의 배우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소화해냈다고 하는 편이 옳겠다. 게다가 한선화의 얼굴은 영화에 출연하기 어울리는 얼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배우들에게 미안한 이야기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스크린에 등장하는 어울리는 얼굴이 있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물론 각 영화마다 그 얼굴은 달라지겠지만 극장을 점유하고 있는 대부분의 영화들에서 비슷한 얼굴들을 보는 것은 그 이유도 크다. 한선화를 발견한 것보다 이 영화의 더 큰 수확은 고작 MP3로 장편 영화를 만든 섬세함이다. 이 영화가 연출적으로 인상적인 것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렇지만 모난 점도 거의 없다. 아주 평범하기 그지없는 영화였다. 하지만 시나리오만큼은 꽤나 디테일하다. 사실 내가 배우고 싶은 지점이기도 하다. 아주 사소한 사건으로 전개된다. 그 사소한 사건은 인물의 내면 깊숙이 파고들어 인물의 삶을 뒤흔든다. 탁구 시합에서의 반전은 그동안 버린 물건이라고 주장한 영애의 말에 공기사가 왜 그렇게 집착했는지가 드러난다. 아주 작은 물건 하나로 인물을 뒤흔들 수 있는 것은 능력이다.      


<숨겨진>

  자파르 파나히의 작품이기에 이번 영화제에서 기대작 중 하나였을 것이다. 티켓팅에 성공한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의 구성은 단순하다. 이란 당국에 의해 노래를 금지당한 여성을 찾아가 그녀의 노래를 듣는 것이 영화의 전부다. 카메라는 핸드폰 두 대가 끝이다. 노래를 금지당한 이유는 그녀의 노래가 저주를 불러오기 때문이다. 간단하다. 자파르 파나히 감독은 저주를 전 세계인에게 퍼붓기 위함이다. 우리는 영화의 결말부에서 커튼에 가려진 여성이 노래를 부르는 것을 듣는다. 그녀의 노래가 커튼을 뚫고, 그리고 스크린을 뚫고 우리의 귓가에 울려 퍼진다. 그녀가 저주의 노래를 부르는 것을 우리는 듣는다. 그리고 우리에겐 저주가 내려졌다. 하지만 우리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비센타>

  <숨겨진>과 같이 상영된 애니메이션이다. 하지만 여타 다른 애니메이션과는 다르게 찰흙으로 만들어진 캐릭터들이 등장한다. 고로 인물들은 움직이지 않는다. 그들은 입모양도 움직이지 않는다. 하지만 카메라가 지속적으로 움직인다. 영화 상영 종료 후 감독과의 인터뷰를 통해 감독과 평론가와의 대화로 많은 의도를 드러냈다. 그 대화를 여기서 반복하는 것보다는 내 생각을 한 가지 거론하고 싶다. 이 영화의 카메라의 움직임은 정적이다. 아니, 정확하게 말해서 모든 장면의 리듬감은 거의 동일하다. 바스트 쇼트까지 들어가긴 하지만 클로즈업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카메라의 움직임이 인물의 감정을 대변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감독은 말했다. 내가 느낀 건 이 영화의 줄거리가 지적 능력이 다른 아이들에 비해 부족한 한 여자아이의 낙태 이야기이기 때문에 극영화로 제작하여 실제 사람을 스크린에 등장시키는 순간 어떻게 재현시킬 것인가에 대한 문제가 뒤따라온다. 그리고 거의 확실하게 따라오는 것은 관객의 분노다. 하지만 찰흙으로 빚어진 인물이 대신하자 우리는 거리감을 확보한다. 즉, 실제 인물이 스크린에 등장하는 것보다 사건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위치가 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물의 감정을 카메라 워크가 대신하더라도 우리는 거리를 확보할 수 있다. 그들에게 카메라가 다가갈 때도 우리의 말초신경이 자극받기보다는 우리는 이성적으로 생각할 여지를 남겨둘 수 있게 된다. 낙태는 현재 많은 국가에서 토론되는 문제다. 지구에서 여성은 억울함이 육화되어 있다. 개인의 인생이 국가의 정책으로 인해 허비되고 있는 것이다. 낙태에 대한 적절한 제도가 확립되어 있다면 그녀들은 자율적인 삶을 누릴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비센타의 승리는 값지다. 그 승리는 아마도 자율적인 삶으로 향하는 길일 것이다. 아마 비센타가 자신을 1인칭으로 칭하지 않고 2인칭으로 칭한 까닭은 지금의 그녀가 당시의 그녀를 보고 말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결과가 승리여서 다행이지만 그 사건이 발생한 것은 비극이다. 우리는, 그리고 비센타는 사건 속에 있는 비센타를 응원한다.      


<나이트 크루징>

  5분이 지나서 단편 영화 섹션을 선택한 것을 후회했다. 첫 장면과 뒤이은 장면의 톤은 맞지 않고, 허술함 투성이다. 웹 드라마 같은 시나리오와 연출을 영화제에서까지 봐야 하는 것인가? 이 섹션은 특이한 것이 3명의 감독으로 이루어진 6편의 영화고, 앞 쪽에 상영된 영화들은 배달의 민족에서 지원을 받아 찍은 것처럼 보이는 영화들이다. 그래서 음식이 계속해서 등장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앞의 3편은 엉망이다. 이런 섹션은 누가 기획한 것일까. 이런 섹션이 기획된 순간 이 자리에서 상영될 수 있었던 다른 단편 영화가 기회를 잃는다는 것을 생각해 봐야 할 일이다.      


<맛있는 엔딩>

  역시 별 볼일 없다. TV 드라마에서 볼 듯한 시나리오와 연출. 단 한 쇼트를 보고 불호로 확정이었는데, 뒤에도 볼 건 없었다. 책상에 물건을 쏟는 장면을 앙각으로 촬영했으며, 물건이 쏟아지는 책상은 유리이기 때문에 유리에 쏟아진 물건들 사이로 인물의 얼굴이 보인다. 다음 쇼트로 바뀌면 유리는 나무 책상으로 바뀌어있다. 어처구니없는 장면이다. 단, 손수현이라는 배우를 기억하게 되었다.    

  

<좋은 날>, <자유로>

  이 둘은 묶어서 이야기를 해야 한다. <나이트 크루징>을 찍은 감독이 <청이>를 찍었다는 것을 믿을 수 없고, <달이 기울면>을 찍었던 감독이 <맛있는 엔딩>을 찍은 것을 보고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했지만 <좋은 날>과 <자유로>는 여전히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 감독이라고 느껴졌다. 중년 여성의 욕망을 다루는 것인데, 나는 이게 궁금하다. 정말 그것이 중년 여성의 욕망인 것인가? 내가 영화를 보면서 느낀 것은 중년 여성의 엄마를 둔 딸이 엄마가 그러했으면 하는 욕망을 중년 여성의 캐릭터로 만들어버린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니까 주인공은 중년 여성인데 그녀의 욕망이 느껴지지 않고, 감독의 욕망이 느껴진다. 이건 보는 입장에서 위험한 생각일지 모른다. 왜냐하면 나도 중년 여성의 욕망이 무엇인지 모른다. 게다가 영화 속에 나오는 인물의 욕망은 영화 속에 설정되어 있기 때문에 영화 밖의 이야기를 끌고 들어오는 것은 위험하다. 다만, 두 편의 영화를 보면서 나는 영화를 관람하는 관객으로서 이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정말 엄마들이 저런 걸 원하는 걸까?      

<청이>

  <나이트 크루징>의 허술함과 어이없음으로는 같은 연출자라고 생각할 수 없다. 굉장히 인상적인 단편 영화다. 시각 장애인인 아버지와 초등학생 딸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연출이나 연기 같은 경우는 허술함이 드러나지만 영화가 전개되면서 감정을 쌓아나간다. 특히 마지막 결말을 어떤 방식으로 장식할지 궁금했는데, 결말이 마음에 들었다. 같이 살고 있어도 이해하지 못할 수 있다. 특히 청이는 어리다. 하지만 마지막 장면으로 인해 청이가 성숙해지고, 영화가 그것을 돕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꽤나 인상적인 단편 영화.     


<달이 기울면>

  역시 <맛있는 엔딩>과 같은 연출자라고 생각하기 힘들다. 이 영화의 경우 단편 섹션에서 가장 좋은 영화였다. 오래전 작품이지만 올해 <불모지>나 <오토바이와 햄버거>보다 훨씬 더 시네마틱 한 영화다. 보면서도 놀라움을 금치 못 했는데 전반적으로 기울어진 공간을 어떻게 연출했는지가 궁금했다. 물론 몇몇 쇼트를 지나치면서 기울기가 이상하게 달라지는 점들이 있었던 것 같은데 두 번 보고 확인해보고 싶은 부분이다. 그리고 시나리오 또한 훌륭하다. 오빠의 의족과 기울어진 집이 쌍을 이루면서 죄책감이 드러나는 장면은 굉장히 인상적이다. 현실과 환상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했다가 영화 전체가 죄책감으로 이루어졌다고 결론 내렸다. 다시 볼 수 있다면 여러 관점에서 분석해보고 싶은 영화였다.      


<친구들과 이방인들>

  전주에서 서울로 올라온 뒤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온라인으로 장편 영화 한 편과 단편 영화 2-3편을 보기로 했다. 추천작과 보고 싶었던 작품들이 있었지만 수상작으로 골랐다. 굉장히 독특한 영화로 현대 청년들의 기분을 연출한 영화다. 영화가 시작하면 스틸 사진과 같은 쇼트들이 이어진다. 그리고 레이의 대사가 이어진다. 레이는 도시가 살아있는 것처럼 느껴진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 살아있는 도시는 대부분 시점 쇼트로 표현된다. 즉, 그 살아 움직이는 공간에 보고 있는 인물은 들어갈 수 없다. 인물의 시점 쇼트가 아닌 풍경 쇼트가 이어질 때는 레이는 그곳 어딘가에 어울리지 못하고 프레임을 빠져나가거나 정착할 곳을 찾지 못해 두리번거리는 모습이다. 마치 가고 싶지 않은 술자리에 가서 어디에도 어울리지 못하는 경험을 하는 것처럼 말이다. 레이는 할 일 없이 앨리스를 따라나선다. 둘의 대화는 별 의미가 없이 미끄러진다. 가장 중요한 순간은 앨리스가 섹스를 원하지만 레이는 알아가는 단계를 원하는 것이다. 레이는 그렇게 엇나간다. 항상 무언가를 원하면 상대는 다른 것을 원한다. 넓은 의미의 친구이면서 이방인인 우리 청년들의 관계는 항상 그렇다. 섹스에 실패한 앨리스는 올라가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던 그 산을 올라가 셀카를 찍는다. 장면이 바뀌면 친구한테 일화를 들려주지만 친구는 자신의 일 때문에 자리를 뜬다. 레이뿐만 아니라 앨리스도 현대 청년이긴 마찬가지다. 레이는 아르바이트를 하기 위해 웨딩 촬영장이자 저택으로 향한다. 하지만 계속해서 생각지도 못한 사건들이 발생한다. 차가 퍼지고, 길을 막고 짐을 느릿하게 옮기는 청년으로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하고, 도착하자 일자리를 소개해 준 친구는 복통으로 쓰러진다. 사건이 되지 못하는 에피소드들이 나열된다. 그 에피소드들은 우리가 경험하는 것들이다. 즉, 시나리오에는 쓰면 안 되는 사소한 문제들. 하지만 그 감각이 이 영화를 지탱한다. 영화는 계속 어긋나고 미끄러지며 레이는 이방인처럼 떠돈다. 마지막엔 레이가 잠에서 깨며 엄마와 고용주가 대학 시절 같은 수업을 들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기성세대는 그런 세대였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던 시절. 하지만 레이는 앨리스를 보고 도망가는 세대다. 우리는 그런 세대를 살고 있다. 단골가게의 사장님이 아는 척을 하기 시작하면 그 가게에 가지 않게 되는 시대. 우리는 계속해서 떠돈다.      


<불모지>

  인상적인 단편 영화. 웰 메이드라는 수식어가 어울리는 영화다. 상업 영화의 프리퀄처럼 만들어졌다. 어쩌면 정말 상업 영화를 노리고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연출이나 촬영은 군더더기가 없고, 연기나 대사는 훌륭하다. 다만 이 영화를 지탱하는 가장 중요한 것인 화천댁의 부탁이 그럴 수 있는가라는 의문이 지워지지 않는다. 그럴듯함, 영화의 짜임새, 갈등의 강도가 의문을 지워버리지만 영화의 엔딩에서 다시 피어오른다. 왜냐하면 영화의 엔딩은 화천댁의 목표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엔딩에서는 설득되지만 발단에서 영화를 이끌어가는 원동력은 설득되지 않는다. 다만 확실한 건 이제 단편 영화의 기술적 성취는 여기까지 왔다는 것을 증명한다. 여러모로 의미 있는 작품인 것은 확실하다.      


  <오토바이와 햄버거>

이번 영화제에서 단편 영화 대상 작품이다. <불모지>와 비교하면 초라하다. 그럴 수밖에 없다. 배우들은 아마추어고, 연출 또한 아마추어다. 배우들의 앙상블이 전혀 맞지 않는다. 특히 누나와 동생이 대화하는 장면은 연기가 하나도 맞지 않아 어색하다. 이 영화에 상을 준 까닭은 가장인 누나의 캐릭터 설정과 남동생이 누나의 노고를 이해하는 것으로 결말을 지은 것 때문일까? <불모지>와 연속으로 봐서 그런지는 몰라도(어쨌건 같은 영화제에서 상영되었으니 비교는 불가피하다) 대사는 형편없고, 연기는 부족하며, 캐릭터는 어울리지 않는다. 이렇게 부족한 점 투성이지만 이런 부족한 점이 단편 영화의 특징이지 않은가. 그냥 볼만했다는 평이 적절할지도 모르겠다. 


  202년 05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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