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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스터 Y Apr 26. 2022

스파이크 존즈의 <존 말코비치 되기>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겠지만 이 영화는 정신분석학의 개념을 영화적으로 한껏 뽐낸 영화다. 당연히도 프로이트와 라캉이 언급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이 영화가 엄청난 철학을 내포하고 있어서 접근하기에 어려운 영화도 아니다. 쉽고 재치 있게 풀어가고 있어서 아주 조금만 정신분석학을 알고 있다면 기발함을 즐기며 영화를 감상할 수 있다. 크레이그는 인형 조종사지만 인형 조종사로 먹고 살지는 못하는 사람이다. 그는 자신의 실력에 자부심을 갖고 있지만 세상이 기회를 주지 않아서 낙담하고 있다. 엘레이자는 크레이그의 아내 로테가 돌보고 있는 원숭이인데, 크레이그는 엘레이자에게 의식이라는 것은 끔찍한 저주라고 말하면서 자신은 일할 기회만 있으면 된다고 말한다. 의식이라는 것은 저주인가. 의식이란 단어의 사전적 의미는 깨어 있는 상태에서 자기 자신이나 사물에 대하여 인식하는 작용, 혹은 사회적ㆍ역사적으로 형성되는 사물이나 일에 대한 개인적ㆍ집단적 감정이나 견해나 사상이라고 한다. 이 장면에서는 그냥 흘려보내지만 의식이 존재한다는 것은 다른 한편으로는 무의식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무의식도 의식이다. 프로이트가 20세기를 뒤흔든 까닭은 나의 주인이 내가 아니라는 것을 밝혀냈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나는 내 안에도 있고, 밖에도 있다.      


  크레이그는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세상과 빚으로 인해 인형 조종사를 잠시 내려두고 서류 정리하는 직원을 뽑는 구인란을 보고 면접을 보러 간다. 면접 장소는 7과 2분의 1층이다. 7층과 8층 사이에 있는 이 공간은 굉장히 독특한 공간이다. 이곳은 우리의 의식 세계를 공간화시킨 것이다. 여기서는 대화가 미끄러진다. 발화자가 말하는 것은 청취자에게 닿지 못하고, 말해진 언어는 변형되어 청취자에게 인식된다. 레스터는 언어 장애의 탑이라고 설명하기도 하고, 여기서는 알파벳의 순서가 변경되기도 한다. 레스터는 자신을 말더듬이라고 하는데 이곳에서 말하는 레스터는 전혀 더듬지 않는다. 또 하나의 흥미로운 사실은 레스터 박사의 성격에 의한 것이 아니라 여기서는 마치 사회적으로 학습된 것들이 작동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이 공간의 역사가 굳이 영화에서 보이는 까닭은 욕구와 요구와 욕망의 계산법을 보여주는 듯한 느낌이다. 성인이지만 키가 어린아이와 같은 한 여인은 세상이 자신에게 맞춰진 것이 없어 불만을 품는다. 그러고는 이 빌딩의 회장에게 요구를 한다. 회장은 그녀의 요구를 들어주며 자신의 부인이 되어달라고 요구한다. 언제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요구를 하면 잔여물이 남는다. 그것을 우리는 욕망이라고 부른다. 이 장소가 욕망이 가득 찬 곳이라면 우리는 존 말코비치의 무의식으로 들어가는 아주 적절한 장소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7과 2분의 1층에서 크레이그는 맥신을 만난다. 크레이그는 맥신을 보자마자 눕혀버리고 싶은 욕구을 느꼈을 것이다. 물론 첫눈에 반하다는 고상한 표현이 더 적절할 수도 있겠지만 정확하게 영화가 고상함 따위는 치우라고 요구한다. 맥신은 술집에서 크레이그에게 노골적으로 표현한다. 크레이그가 인형 조종사라고 밝히자 그런 시시한 남자와는 대화조차 하기 싫다는 듯 나가버린다. 크레이그는 맥신을 꼬시려고 노력하지만 잘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크레이그는 왜 맥신에게 반한 것일까. 영화에서 설명해 주지는 않지만 크레이그와 라티의 부부생활은 전혀 활력이 없다. 맥신을 만나고 난 다음 집으로 돌아온 크레이그와 라티는 서로 쳐다도 보지 않고 각자의 일을 한다. 그러면서 라티는 임신 이야기를 꺼낸다. 아이가 상황을 호전시켜줄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 하지만 크레이그는 라티와의 관계 호전보다는 바람을 피우는 쪽을 선택한다. 그것조차 잘되지 않자 크레이그는 인형에게 자신의 욕구를 투영한다. 크레이그가 조종하는 인형 맥신은 인형 크레이그에게 말한다. “아마 잠시 동안 다른 사람이 되고 싶은가 봐요. 내 안에 들어와 볼래요?” 이 말은 두 가지 중의적 의미이다. 그런데 이 중의적 의미는 단순히 크레이그의 욕구만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이 영화와도 일치한다. 존 말코비치의 무의식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마치 여성의 질에 들어가는 것처럼 묘사된다.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그것은 마치 성교처럼 묘사된다는 것이다.        


  크레이그는 존 말코비치의 무의식으로 들어가는 입구를 발견한다. 아니,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전의식으로 들어가는 입구다. 우리는 크레이그가 그 입구를 따라 존 말코비치의 의식 세계 속으로 떨어졌을 때 가장 먼저 보는 것은 월스트리트 저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후 말코비치는 거울을 보고, 택시에 올라탄다. 택시 기사는 존 말코비치를 알아본다. 어쩌면 크레이그가 말코비치의 눈으로 세상을 볼 때 자신의 욕구를 대리만족할 수 있는 상황이 주어졌을지도 모른다. 그 근거로 로테가 말코비치의 의식 세계로 떨어졌을 때 그녀는 가장 먼저 말코비치의 몸을 본다. 영화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그건 아마도 산업적 이유였을 것이고, 그녀는 남근을 그곳에서 확인했을 것이다. 타인의 남근이 아닌 자신에게 달린 남근을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존 말코비치의 의식 세계로 향하는 것은 자신의 숨겨진 욕구를 깨우는 일이 되는 것이다. 여기서 다시 한번 프로이트의 증명. 나는 내 안에도 있고, 밖에도 있다.      


  하지만 여기서 한 가지 지적할 점은 맥신은 말코비치의 의식 세계로 들어가지 않는다. 그녀는 오히려 타인의 욕구를 통해 큰돈을 벌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맥신이 하는 행동은 타인의 위에 올라서려는 것이다. 그녀는 말코비치의 의식 세계에 들어가서 결핍을 채우려고 하지 않고 오히려 말코비치의 의식 세계에 들어간 라티와 섹스를 즐긴다. 말코비치의 의식 세계에 들어간 사람들은 관음 욕구를 충족하고 있는 것이 분명한데, 맥신은 그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위치에 서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맥신은 라티보다는 말코비치의 안에 있는 라티를 탐낸다. 또 다른 한 가지는 라티는 진정한 섹스를 원한다. 섹스라는 것은 과연 가능한가. 두 사람이 합일되는 순간은 진정으로 가능한 것인가? 라캉은 성관계는 없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라티가 말코비치의 의식 세계에 있을 때 맥신의 섹스는 합일과 가까워지는 것은 분명하다. 물론, 그럼에도 합일은 존재하지 않지만 말이다.   

   

  이 섹스에서 중요한 것은 누가 누구랑 섹스하고 있는 것인가라는 질문이다. 맥신은 라티와 섹스를 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말코비치와 섹스를 하고 있는 것인가, 혹은 그것도 아니라면 쓰리섬을 하고 있는 것인가. 말코비치는 맥신과 섹스를 하고 있지만 맥신은 라티와 섹스를 하고 있다. 하지만 라티는 의식 세계의 일부일 뿐 신체적인 기능에 대한 권력은 하나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런데 여기서 더 중요한 문제는 그렇다면 맥신이 임신한 아이는 말코비치의 아이인가, 혹은 라티(또는 크레이그)의 아이인가. 이 문제는 잠시 넣어두도록 하자.     

 

  말코비치는 자신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의심하기 시작하면서 결국 자신의 의식 세계로 떨어지는 기다란 통로를 찾아낸다. 그리고 자신이 그곳에 떨어진다. 결국 말코비치 자신이 스스로 의식 세계로 떨어졌을 때 목격하는 것은 말코비치의 말대로 봐서는 안 되는 것들이다. 그의 의식 세계에 억압되어 있는 스스로의 모습들. 어쩌면 그 모습은 평생 억압되어 있을 것이고, 어떠한 모습은 금방 드러날 것이다. 하지만 그 속에 잠겨진 그 모습들은 말코비치의 모습이자 우리 의식 안의 모습이다.      


  말코비치는 고소한다고 큰 소리를 치지만 이제 전의식은 자아를 지배하기 시작한다. 크레이그는 인형 조종을 하듯 말코비치를 조종한다. 여기서 우리는 또 하나의 담론이 파생되는 것을 목격한다. 인형 조종사와 배우라는 것은 결국 하나의 인간을 창출하는 것이다. 어쩌면 크레이그는 자신이 영화 초반부에서 이야기한 인형 조종사로서의 궁극적 목표를 달성했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욕망의 달성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크레이그를 완전히 지배하고 난 뒤 8개월이 지난다. 크레이그는 모든 걸 이룬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맥신이 자신의 진정한 사랑이 라티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뱃속의 아이가 라티의 아이라는 것이 밝혀진다. 물론 우리는 진실을 알 수는 없다. 레스터는 크레이그를 설득한다. 그리고 맥신과 라티의 추격전이 벌어진다. 아마도 전의식과 자아가 지배된 상태여서 그녀들은 무의식으로 넘어갔을 것이다. 말코비치의 무의식이 펼쳐진다. 그리고 이내 크레이그와 맥신, 라티는 모두 말코비치의 몸 안에서 떨어져 나온다. 그리고 맥신의 아이는 7살이 되고, 크레이그는 그 아이의 의식 세계 안에 갇힌다.      


  여기서 다시 한번 물어야 한다. 크레이그가 갇혀있는 딸은 누구의 딸인가. 만약 그녀가 크레이그의 딸이라면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이론을 그대로 가져온 것이 된다. 하지만 라티의 딸이라면 오이디푸스의 이론을 변형하여 가져온 것이 된다. 물론 그 이유는 생물학적 성별 때문이다. 프로이트가 아버지와 어머니의 역할에서 생물학적 설명을 절대적으로 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스파이크 존즈가 꽤나 신선한 해석을 내놓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동성애 부부에서의 자식은 어떤 정신적 구조를 갖고 있을지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말코비치가 된 레스터가 맥신과 라티의 딸의 의식 세계에 들어갔을 때 크레이그를 만나지 않을까. 프로이트의 말대로 인류가 공유하고 있는 어떠한 무의식적 체계가 있다면 그 또한 스파이크 존즈가 익살스럽게 은유한 것은 아닌가. 여하간 마지막 장면은 크레이그가 잠겨있는 의식 세계처럼 카메라는 수영장 바닥으로 가라앉는다.       


P.S 적어놓은 메모들이 엄청 많았는데 발이 달렸는지 사라져버렸다. 굿 노트 필기였는데도 말이다. 그래서 어딘가 빠진 것들이 많다.      


  2022년 4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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