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깨워드림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파도 Nov 22. 2023

오늘도 여행하는 하루를 삽니다.

결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사를 했다.


원래 살던 집은 지은지 30년 가까이 된 작고 오래된 빌라였다. 내가 원래 결혼 전부터 자취를 하며 동생과 지내던 곳이었는데, 결혼을 하며 그대로 살았던 곳이다.


꾸민다고 꾸몄지만, 엘레베이터도 없는 곳에서 아이 하나를 키울만은 했지만 아내가 둘째를 임신하고 나서는 도저히 돌박이 아이를 안고 계단을 다니며 유모차까지 챙겨서 다니기가 너무 위험했다.


다행히도 상황이 맞아 근처의 엘리베이터가 있는 번듯한 투룸 오피스텔로 이사를 할 수 있었다.


낡고 허름한 집에서 전망이 좋은 오피스텔로 이사하자 정말 행복했다. 


새 집에서 산지 거의 1년 정도가 지났던 것 같다. 


그 집에서 기억나는 어느 저녁이 있다.


그날은 주말이었는지, 아이들이 먼저 이른 저녁 식사를 하고 나와 아내는 해가 넘어가는 풍경을 바라보며 식탁에 앉아 있었다.


오랜만에 여유로움이 느껴졌는지 나는 잔에 맥주를 가득 따라 놓고 행복한 기분에 젖어 있었다.


황금빛 맥주잔과 해가 넘어가는 멋진 저녁 풍경을 보면서, 내 마음속에서는 아랑훼즈 협주곡이 흘러나오며 한껏 근사한 기분에 휩싸였다.


그러더니 문득 나는 어린 시절 꿈꿨던 세계 일주를 하며 사는 삶을 아내한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내가 원하는 여행은 여기저기 짧게 다니며 구경만 하고 다니는 여행이 아닌, 몇 달이고 몇 년이고 여기 저기 새로운 곳에서 그 곳의 주민이 되어 그 곳에서의 삶을 충분히 살아보는 여행을 하고 싶다고 말이다.


결혼 전 인도네시아 수마트라 섬의 한 도시 외곽에서 2년 정도 살았던 적이 있다.


여유있는 아침이면 나는 냉장고에 있는 이런 저런 요리들을 후라이팬에 넣고 볶아내어 접시에 담아 집 앞에 나와 앉아 햇살을 받으며 아침 식사를 하고는 했다.


지나가는 동네 사람들과 인사를 하기도 했고, 풀이 무성한 집앞 풀밭에 피어난 이름도 모르는 열대지방의 꽃을 구경하기도 했다.


아내에게 내가 원하는 여행에 대한 이야기를 했던 그 저녁 이후, 1년 정도 지났을까? 우리 가족은 정말 생각지도 못했던 홍콩이라는 곳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화려한 야경이 보이는 홍콩섬이 바라보이는 구룡반도 침사추기 동쪽의 동네에서, 매일 저녁 아이들은 킥보드를 타고 나와 아내는 손을 잡고 바닷가 산책길을 거닐었다. 살림은 넉넉지 않았지만 매일 매일 함께 걷는 저녁은 행복하게 느껴졌다. 


한국에서의 삶이 그립다는 느낌이 드는 즈음, 나중에야 알았지만 홍콩에서의 격렬한 민주화 운동이 시작되기 직전의 그 시점에 (그리고 그 이후에는 홍콩에서 코로나 환자가 발견되고 급증하면서 폐쇄가 되기도 했다), 우리 가족은 한국으로 돌아와 경상남도의 부산 외곽 도시에 자리를 하게 되었다.


날씨가 좋은 주말이면 아내가 자랑하는 김밥을 싸들고 아이들이 놀기 좋은 바닷가로 나가 텐트를 치고 해가 지기 전 돌아오고는 했다. 모래놀이도 하고 바닷물에서 놀기도하고, 더위에 지쳤을 즈음에는 아이들과 시원한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행복해했다.


개인적으로 이 시기의 나는 나의 경력 개발에 대한 고민이 있었고, 좋은 기회에 서울로 다시 올라와서 나의 경력에 아주 도움이 될 만한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찾게 되었다.


폭등한 집값에 신혼 때처럼 서울로 들어가는 것은 쉽지 않아보였다. 아이들도 초등학생이 되어 너무 작은 집에서 살기 보다는 좀 더 여유로운 동네에서 아이들과 사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너무나도 유명한 사람이 아주 빡빡한 그 경전철 지하철을 타고 서울로 출퇴근을 하는 것은 너무나도 힘들었지만, 그 외의 삶은 행복했다. 


이제는 이 곳에서도 거의 3년을 살면서 어느 집 순댓국이 맛있고, 어느 집 김밥이 맛있고, 어디를 가면 싱싱한 농산물을 저렴하게 살 수 있는지 알게 되며 이 동네 주민이 다 되었다.


거의 10년 전 저녁 노을을 보며 세계 여행을 꿈꾸던 그 저녁의 아내와의 대화를 때때로 떠올릴 때가 있다.


지금 이곳에서의 삶이 어쩌면 지난 날들처럼 여행일 수 있고, 언제 어떤 여행을 또 떠나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나고 나니 그 삶이 다 여행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이제는 현재를 살아가면서도 지금이 여행이라는 것을 알면서 살게 된 것 같다.


여행이라는 것을 알면서 살게 되면, 언제 이 곳을 떠날지 모른다는 생각에 하루 하루를 좀 더 기억하고 싶은 순간들로 채우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것 같다.


아랑훼즈 협주곡:

https://www.youtube.com/watch?v=TLLXh61B78E



매거진의 이전글 그냥 새벽에 일어나서 책을 읽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