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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 해외 출장을 갈 때면 문득, 가족들에게 더 잘해주게 된다.
한동안 같이 못 지내니까 어디 근사한 데 가서 밥을 먹기도 하고, 좋은 카페에 가서 커피를 한잔하거나 아이들에게 평소에는 잘 주지 않던 간식을 준다던가 하는 선의(?)를 베풀고는 한다.
오늘도 출장을 하루 앞두고 아내와 아이들과 좋은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아이들은 오늘 줄넘기 학원에서 줄넘기 대회를 나갔다.
학원차를 태워 보낼 수도 있었지만 굳이 새벽부터 일어나서 아이들을 챙겨서 태우고 경기장으로 향했다.
어린 시절 태권도 시합을 나가면 부모님이 와주시면 그렇게 든든할 수 없었다.
그런 생각에 나도 따라가고 싶었고, 아이들이 하는 모습도 직접 보고 싶었다.
아이들은 정말 많이 컸다. 친구들과 잘 어울리고, 선생님들과도 잘 지냈으며, 낯선 경기장에서의 공공질서도 잘 지키고 있었다. 그렇게 커가는 모습들을 보고, 평소에는 잘 볼 수 없었던 아이들의 일상을 보는 것이 너무나도 큰 기쁨이었다.
어찌 보면 출장 전에 그런 모습을 보면서 '아이들이 많이 컸구나'하는 흐뭇한 마음을 갖고 출장을 떠날 수 있어서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린 시절 태권도 시합을 마치면 가족들끼리 함께 돼지갈비를 먹으러 가곤 했었다. '왕초 갈비'라고 하는 뭔가 박력 넘치는 이름의 돼지갈비구이를 파는 식당이었는데, 태권도 시합이 끝나면 그 식당에서 맛있는 갈비를 먹을 생각에 시합이 더 기다려지기도 하고 힘이 나기도 했다.
아이들과도 오늘 시합이 끝나면 먹을 메뉴를 정했다. 바로 '마라탕'. 어느 식당에서 먹을지까지 정해놓았다.
시합이 끝나고 아이들과 마라탕을 먹고, 후식 아이스크림까지 먹었다.
아이들은 만족스러워했고, 만족스러워하는 아이들을 보며 아내도 흐뭇해했다.
예전 회사에서 해외 프로젝트를 간 적이 있어서 거의 2주는 한국, 2주는 해외에서 지내는 시간을 가진 적이 있다. 그 이후로도 2주 정도 해외 출장을 간 적은 있지만, 이번에는 참 오랜만이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그때는 아이들이 더 어렸지만, 지금은 많이 컸다.
아이들을 위해, 그리고 가족들을 위해 아빠가 매일매일 어디에서 무얼 하는지, 아빠가 있는 곳은 몇 시인지를 상세하게 적어서 표로 만들어서 주었다. 이제는 세계지도를 보면서 아빠가 어디에 있을지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영상통화도 하고 사진도 찍어서 보내겠지만, 이번에는 기회와 시간이 된다면 현지에서 편지를 써서 한국으로 국제우편으로 보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연 그런 시간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한번 찾아봐야겠다.
내일 오후 비행기라 내일 짐을 싸도 되지만 오늘 미리 짐을 쌌다.
가서 입을 옷가지들과 세면도구 등을 모두 챙기고 있는데, 옆에 와서 구경하는 아이들이 못내 아쉬워하는 표정이 역력하다.
어떤 선물을 사 올지 물었다.
아빠가 가는 나라에서만 있는 기념품을 사 오란다. 예쁜 볼펜을 사 오기로 했다.
그 나라의 느낌은 나되, 특이하면서도 너무 튀지 않는 심플한 디자인이면서 0.7mm 두께 심이었으면 좋겠다고 한다.
가끔은 이런 상세한 요구사항이 명확해서 좋다.
둘째는 현지에서 유명한 동물이나 캐릭터, 사람 모양의 피규어를 사 오라는데, 이런 선물을 사 와서 며칠 뒤 그냥 방에 나뒹구는 광경을 너무 많이 봐왔기에 썩 내키지는 않는다.
아내의 선물 요청은 냉장고 자석이다. 집의 한쪽 벽에 우리가 함께 여행하거나 내가 갔다 온 곳의 냉장고 자석을 수집품처럼 모은다. 이제는 어떤 종류가 자석이 오랫동안 질리지 않고 퀄리티가 좋고 하는 안목도 생겨서 어떤 자석을 살지도 명확하다. 다만 이번에는 환승하는 곳까지 포함해서 3개국 5개 도시를 가기에 5개의 냉장고 자석을 사게 될 것 같다.
아이들을 재우고 와이프와 함께 반려견 두 마리를 데리고 (한 마리는 임시 보호 중이다) 밤산책을 나섰다. 행선지는 편의점, 캔맥주를 사서 집에 왔다.
캔맥주를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한다. 당분간 이런 시간을 가질 수 없기에 맥주를 마시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지만 피곤한 아내는 먼저 들어가 잔다.
출장 가기 하루 전, 뭐 출장 가는 게 대수냐 싶겠지만 나름 나에게는 매번의 출장이 긴장되기도 하고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결혼하고 아이가 태어나고 첫 출장길을 기억한다. 새벽 비행기라 자고 있는 아내를 뒤로하고 나오는데 한 살짜리 우리 첫째 딸이 깨서 엄마 옆에 누워서는 나를 보며 너무 예쁘게 웃어주는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마치 잘 다녀오라는 듯 인사하는 듯이 웃어주던 우리 아가.
그렇게 결혼 후 아이가 생긴 뒤의 출장길은 나에게 그 미소를 잠시 뒤로하고 떠나야 하는 시간이 된 것이다.
어쨌든 이제 내일 출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