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퇴근 후 남편은 자기 계발 자격증 공부, 나는 브런치의 신입생이 되어 글을 끄적이는 재미에 빠져 산다. 우린 매일 새벽 티타임에 별 시답지 않은 하소연들로 응석을 부리며 잠을 쫓는다. 방으로 가져가려고 정수기의 뜨거운 물을 내리는데 쇼파에 우두커니 앉아 있는 할머니 모습에
깜짝 놀라 부리나케 다가간다.
"아이고, 아니 왜 안자~"
"응... 꿈꿨어. 요상한 꿈"
할머니는 좀 전에 '어떤 허름한 단칸방에 작가라는 사람이 살았는데 그 작가라는 작자가 숟가락 하나 안 남기고 짐을 싹 챙겨 도망을 갔고 아무것도 없는 빈 방을 우두커니 바라보는 꿈'을 꿨다는 거다.
할머니가 꿈 얘기를 자주 하는 편이 아닌데...
남편한테 가서 한 마디 묻는다.
"자기 혹시 내가 브런치 작가 되었다는 거
할머니한테 말했어?"
"아니~ "
남편은 어려운 문장들을 머릿속에 억지로 꾸겨 넣고 있었는지 복잡하고 퀭한, 곧 울 것 같은 눈동자로 나를 쓱 올려본다. 나는 그의 책상에 페퍼민트 허브차를두고
등을 토닥이며 하던 거 계속하라는 몸짓으로
조용히 나온다.시커먼 어둠 속에 고양이 식빵 자세로
앉아 있는할머니... 난 주방등을 켜고 그녀 옆에 앉았다.
"할머니는 작가가 뭔 줄 알지? "
"응. 글짓기하는 사람."
"할머니도 글짓기해봤어?"
"그럼 해봤지. 국민학교 다닐 때 글짓기할 때가 제일 좋았어. 교실에서 밖으로 나가라고 자유롭게 풀어주니까.. 한 번은 상도 받았어. 교장선생 올라서는 단상에 서서 그 글을 낭독했지. 얼마나 떨렸는지.. 그땐 일제시대라 선생들, 학생들 다 일본어를 썼고, 글도 일본어로 낭독했어. 그날 운동장에 안성 읍내에 있는 다른 교사들까지 죄다 구경 와서 날 칭찬해 주었어."
처음 듣는 얘기다.
나는 할머니와 평생을 붙어살지만
since 1926 ~ 인생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특히나 그녀의 어린 시절은 더더욱.
그녀는 그날을 마치 몇 년 전에 있었던 일처럼
생생하게 묘사한다.
그녀는배움에 극성맞은
어머니(나의 증조할머니) 덕에
경기도 안성의 '대덕 국민학교'를 열세 살에 들어갔다.
일본인인 교장 선생님의 집이 바로 학교 옆에 있었는데 그에게는 네 살 정도 되는 아들이 있었단다.
교장 선생님의 아버지도 계셨는데 그 할아버지는 늘
연회색 유카타를 입고 뒷 짐을 지고 다니며 학교 주변의 밭을 관리했다고. 주먹만 한 게 주렁주렁 달린 빨간 토마토 밭, 보라색 가지 밭, 열무 밭 등을. 할아버지 다리 사이로 바람이 홱 불면 유카타 옷자락이 걷혀 새하얀 훈도시(일본의 성인 남성이 입는 전통 속옷)가 보였다고. 어느 날은 선생님 몰래 새빨간 토마토를 하나 따서
한 입 베어무니도대체 이게 무슨 맛인지...
알 수가 없었단다.
"할머니가 그때 썼던 글이 뭐야? "
"일본말로 코스모스였는데... 그땐 한 장을 넘게 썼는데 지금은 생각이 안 나. 껄껄~"
"코스모스..?"
나는 방에서 스케치북과 볼펜을 찾아와 내밀었다.
그녀는손을 절레절레 저으며 기억이 안 나고
오랫동안 글자를 써보지 않아서
아무것도 못 쓰겠다고 했다.
오늘 저녁, 남편과 함께 퇴근을 하고 집에 와보니...
할머니가 빈 스케치북에 무언가를쓰고 있다.
2019.10.22 作. 79년만에 다시 쓰는 할머니의 시
코스머스
코스머스는, 나를바라보면
빵긋,운은,그모습,갓태면
그모습을보면,나는,마음이
즐것고,자나,개나.
내,인생을 이러개
즐거게,해줄줄은몰나썬내
코스머스는,바람이 샨들샨들불면 내가 일러,코스머스야
하고 뽐내 너갓타 내마음이 즐거어서
그 당시 '열다섯'이었던 어린 그녀의 마음을 자나, 개나. 즐겁게 해 준 코스모스...
난 글짓기 시간이 정말 좋았다는 그녀에게 줄 연필 한 자루를 서걱서걱 깎아 가져온다.
"할머니. 매일 한 장씩 여기에 글짓기해봐. 괜찮아. 아무거나 써도. 아무것도 안 써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