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에서 멈춰 선 여정

놓쳐버린 비행기와 끝없이 이어진 선택의 순간들

by ANNA

이미 비행기는 떠났고 이 사태를 대체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가장 먼저 떠오른 건 리마에서 우리를 맞이하기로 한 가이드였다.

리마가 지금 몇 시인지, 그쪽은 어떤 상황일지 따질 여유도 없이 무작정 보이스톡을 걸었다.


“하.. 비행기 놓쳤어요. 저 이제 어떻게 해야 하죠?”

이미 일정 조율을 하며 한국에서 몇 차례 통화했던 사이라 그 목소리가 낯설지는 않았지만, 지금은 그 익숙함조차 붙잡을 손잡이처럼 느껴졌다.

“저 말고, 한국에서 컨트롤하는 오피스랑 바로 연락하세요. 지금 당장이요.”

곧바로 오피스 연락처를 받아 들고, 한국 시간이 몇 시인지 계산할 생각도 못 한 채 전화를 걸었다.

몇 번의 연결음 끝에 상황이 전달됐고, 대표님과 직원들이 순식간에 단톡방을 만들었다.

한국 시간 새벽 두 시였다.

리마로 향하는 라탐항공 이미 떠나버린 뒤였다.

그 비행기를 타는 선택지는 완전히 사라졌다.

이제는 놓쳐버린 항공편을 붙잡고 있을 시간이 아니라, 여기서부터 다시 길을 만들어야 했다.




우선 손님들을 앉힐 자리를 찾는 것부터가 일이었다.

거대한 LA공항이었지만 스무 명 가까운 인원을 한 번에 정리해 앉힐 공간조차 쉽게 보이지 않았다.

결국 한쪽 카페테리아에 자리를 겨우 확보해 손님들을 앉히고, 음료부터 주문해 드렸다. 적어도 앉아 있을 곳과 따뜻한 컵 하나는 있어야 했다.


그 사이 카톡으로 실시간 대책 논의가 오갔다.

대체 항공을 찾느라 메시지가 쉴 새 없이 올라왔다.

이 노선은 가능하다, 좌석이 부족하다, 환승 시간이 촉박하다, 이 편으로 밀어보자, 다시 안 된다.

결정이 되는 듯하다가도 몇 분 만에 뒤집혔다.

한 번은 항공편이 확정됐다는 연락을 받고 손님들을 이끌고 출발장 쪽으로 나갔다가, 다시 취소됐다는 소식에 발길을 돌리기도 했다.

몇 걸음 전진했다가 그대로 제자리로 밀려나는 기분이었다.


그 와중에 배고프다는 손님들 식사도 챙겨야 했다.

메뉴를 고르고 주문을 넣고, 음식이 제대로 나왔는지 확인하고, 카드 결제를 하고.

나는 물 한 모금 마실 정신도 없었다.

목은 타들어 갔지만 컵을 집어 들 여유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그 질문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절망도 원망도 지금은 사치였다.

감정에 빠질 시간은 없었다.


한국에서 올라오는 진행 톡을 기다리는 동안 나는 망연자실하게 의자에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 몇 분이 몇 시간처럼 늘어졌다.

그 와중에 들려온 소식 하나가 이 상황을 더 깊은 수렁으로 밀어 넣었다.

파업이 예고돼 있던 마추픽추행 기차가 결국 파업을 강행했다는 것.

다시 말해 마추픽추를 갈 수 없게 됐다는 이야기였다.

비행기를 놓치지 않았어도 마추픽추를 진행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그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비행기를 놓친 것만으로도 불안해하던 손님들 사이에서 이미 동요가 시작되고 있었다.

이후 일정이 정상적으로 진행될 수 있는지 묻는 질문이 이어졌고, 차라리 지금이라도 한국으로 돌아가겠다는 분들도 나타났다.

하지만 그렇게 돌아가면 그들은 한 푼도 환불받지 못한다.

어떻게든 설득해 리마까지는 데려가야 한다.

그렇다면 이 와중에 ‘마추픽추 투어 불가’라는 사실까지 전해야 할까?

그 말을 꺼내는 순간 어떤 반응들이 돌아올지, 굳이 상상하지 않아도 뻔했다.


넋이 나간 얼굴로 의자에 주저앉아 있던 내 앞에 흑인 종업원이 다가왔다.

아무 말 없이 따뜻한 차 한 잔을 내려놓더니 말했다.

“이거라도 마시면서 일해. 이건 내가 주는 거야.”

몇 시간째 카페테리아를 떠나지 못하고 있는 우리 일행과, 휴대폰만 붙든 채 표정이 굳어 있던 나를 지켜보다가 상황을 눈치채고 작은 위로를 전한 것이었다.

그 작은 배려에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하지만 고개를 숙여 얼른 눈가를 훔치고 다시 휴대폰을 들었다.

정신줄을 놓으면 안 된다.

감성에 빠질 시간도 없다.

지금 무너지면 전부 무너진다.


결국 그날 남은 항공편은 모두 불가 판정을 받았다.

선택지는 하나, LA공항 인근 호텔에서 하루를 버티고 다음날 새벽 변경된 비행 편으로 리마로 향하는 것

셔틀버스에 몸을 실을 때서야 비로소 공항을 빠져나온다는 사실이 실감 났다.

호텔에 도착해 체크인을 진행하고 방 배정을 마친 뒤에도 일은 끝나지 않았다.

한식을 찾는 손님들을 택시에 태워 LA 시내로 보내야 했고, 그 사이 변경된 일정을 다시 정리해 설명하고, 동의서를 받고, 다음 날 새벽 출발 준비까지 마쳐야 했다.

침대가 눈앞에 있었지만 눕지 못했다.

거의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그렇게 인솔자의 재앙 같았던 길고 긴 하루, 일 라운드가 겨우 막을 내렸다.

그러나 이것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다.

비행기를 놓친 것도 모자라 손님들을 고생시켜 가며 리마로 끌고 간 끝에, 만약 마추픽추를 방문할 수 없다는 사실까지 마주하게 된다면.

그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오자, 지금까지의 혼란은 예고편에 불과하다는 예감이 서서히 목을 조여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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