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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ctor Ha Jan 01. 2020

헤게모니 싸움은 또 다른 헤게모니 싸움을 잉태한다.

중동에서 지중해로로 확장된 헤게모니 싸움

 지난글에서도 4차 십자군의 비잔틴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 공격을 언급하였지만 1~3차 십자군 활동은 그나마 종교적 순수함으로 무장하여 저멀리 동방에 위치한 기독교 성지를 이교도들로부터 탈환하고자 하는 의지가 분명히 있었다. 그러나 4차 십자군 이후부터는 로마 교황의 정치적 욕심, 각 왕국과 봉건 영주들의 정치적 이해 관계 그리고 지중해를 둘러싼 경제적 이권과 맞물리면서 이런 종교적 순수성은 점차 희미해져만 갔다.   


 1270년 7차 십자군 전쟁 패배 후 프랑스에서 절치부심하며 명예회복을 노린 프랑스 왕 루이 9세는 7차 십자군에 이어 또 다시 8차 십자군을 조직하였다. 팔레스티나 지역에서 맘루크술탄 바이바르스가 안티오크 공국을 멸망시키고 또 다른 십자군령 트리폴리 백작령을 위협하고 있었던 상황이었음에도 루이 9세는 굳이 팔레스티나로 프랑스 십자군을 출정시킬 이유는 없었다. 초기 십자군 원정때처럼 로마 교황도 더이상 적극적으로 유럽의 왕들 및 기사들에게 이교도 이슬람군과의 성전을 독려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유럽 각 왕국들은 국내 이슈들을 먼저 해결해야 했기에 8차 십자군을 조직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또한 1차에서부터 7차 십자군까지 이렇다할 전쟁의 결과물을 만들지 못했기에 다시 8차 십자군을 다시 조직해서 예루살렘으로 쳐들어 간다고 한들 예루살렘을 회복할 수 없다는 패배감 또한 팽배했으리라... 

참고로 루이 9세는 십자군 원정의 결과에 상관없이 2차례의 십자군 원정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사후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성인(*Saint)으로 시성되어 Saint Louis라는 별칭을 얻게 되었다. 유럽 역사를 보면 수많은 루이왕과 필립 왕들이 등장하는데 보통 이들을 구분하기 위해 'Lionheart Richard I'라든지 'Saint Louis IX'라는 별칭을 사용하여 비슷한 칭호를 가진 왕들을 구분을 하기도 한다. 

루이  9세                                                  8차 십자군 이동로(파란색) : 프랑스 에그모르트항-사르데냐섬-튀지니 카르타고항


7차 원정 때와 마찬가지로 루이 9세는 전통적인 지중해 해상 루트인 이탈리아 도시국가-크레타섬-키프로스-아크레를 통해서 예루살렘으로 향하지 않고 팔레스티나 지역에서 한참 멀리 떨어진 북아프리카 튀니스(Tunis)로 향했다. 기독교의 성지 예루살렘을 탈환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예루살렘으로 향해야 하는게 당연한 것인데 왜 북아프리카로 향했는지 다소 의아한 점이 있는게 사실이다. 이에 대해서 루이 9세가 왜 북아프리카 튀니스로 향했는지 정확한 이유는 알 수는 없지만 정황상 두가지 이유가 있을 듯 하다. 첫째, 8차 원정군이 출정을 할 무렵 맘루크 술탄 바이바르스에 의해서 예루살렘 왕국 및 트리폴리 백작령을 제외한 대부분의 해안 도시들이 이미 점령을 당했기 때문에 영국의 리차드 1세가 주도한 3차 십자군때처럼 처음부터 해안 도시들을 차례로 다시 점령해야 예루살렘으로 갈 수 있었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8차 원정군 규모로는 불가능했다는 점을 들 수 있겠다. 

둘째, 이미 여러 차례 십자군 전쟁으로 학습된 결과 예루살렘을 정복한다고 해도 예루살렘에서 해안 도시까지 보급로가 확실하게 확보되지 않는 이상 예루살렘을 에워싸고 있는 이슬람 제국의 공격에 지속적으로 노출될 수 밖에 없는 환경이기 때문에 예루살렘을 영구히 지켜내기 어렵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7차때 이집트 북부 다미에타항 먼저 점령한 후 맘루크의 심장인 카이로로 진격을 하였고 또한 이러한 전략적 판단하에서 북아프리카를 먼저 점령하여 기독교 세력의 근거지를 마련한 후 동쪽의 맘루크 술탄의 근거지인 이집트 카이로로 진격하고자 하였을 것이다. 

프랑스 주도 8차 십자군 실패 후 1271년 영국 에드워드 왕자의 십자군 활동

튀니스 상륙 이후 몇번의 전투에서 맘루크군을 격파하지만 불행하게도 북부 아프리카의 더운 날씨와 보급품이 제때 제공되지 않아 카이로로 진격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고 설상가상으로 루이 9세는 그만 병을 얻어 튀니스에서 병사하게 되고 수장을 잃은 8차 십자군은 이탈리아 시칠리 왕국으로 퇴각한다. 이후 당초 튀니스 8차 십자군 합류하고자 한 영국의 에드워드 왕자(훗날 영국의 에드워드 1세)는 영국의 십자군(*기록에 의하면 군사는 약 1,000천명도, 기사는 약 225명)을 이끌고 키프로스를 통해 아크레성에 도착한 후 키프로스군과 일칸국의 몽골군의 지원을 얻어 맘루크군에 대항해보지만 이 역시 10년 휴전 협정을 맺는 것을 끝으로 1272년 팔레스티나 지역에서 철수한다. 이후 유럽의 왕국들은 더 이상 예루살렘으로 십자군을 보내지 않았고 동쪽의 몽골 제국인 일칸국과의 관계를 안정화 시킨 맘루크 술탄은 바이바르스 사후 1289년에 트리폴리 백작령을 그리고 1291년에 예루살렘 왕국을 함락시키면서 1차 세계 대전 이후 오스만 제국이 몰락하여 프랑스 및 영국이 이 지역을 신탁 통치할때까지 서양의 기독교 세력은 더이상 팔레스티나 지역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였다.  


 사실 십자군 전쟁으로 가장 이득을 본 쪽은 이슬람 세계도 유럽의 기독교 세력이 아닌 이탈리아 해양 도시인 제노바, 베네치아, 피사등이다. 이들은 아드리아해 해상로-크레타 섬을 포함한 그리스 연안 지역의 섬들- 오스만 제국 점령 전 키프로스-팔레스티나 해양도시를 연결하여 유럽에서 팔레스티나 지방으로 보급품을 수송하였고 이를 통해 자연스레 지중해 해상 무역권을 장악하면서 십자군의 보급품 공급자로서의 역할 외에도 아랍과 아시아등 동방의 물품들을 지중해 해상 무역로를 통해 수입하여 유럽 귀족들에게 공급하여 막대한 부를 쌓게 되었다. 이탈리아 도시 국가의 성장은 지중해 무역권을 장악하려는 신흥 이슬람 강국 오스만 제국과 충돌하게 되었고 이 두 세력은 지중해 무역 헤게모니를 둘러싸고 역사상 전후무후한 해상 전투인 레판토 해전의 도화선이 된다.  또한 중동에서도 투르크계 오스만 제국은 맘루크 술탄, 티무르 제국 그리고 이란계 사파비 왕조를 차례로 무너뜨리고 중동에서 패권을 장악한다. 오스만 제국과 관련해서는 추후 터키 문명 탐험시 다시 이야기를 할 계획이다.    

이탈리아 도시 국가의 지중해 무역권 장악으로 

또한 십자군 원정은 정치적으로도 유럽에 큰 영향을 미쳤는데 십자군 원정의 실패로 인해 로마 교황권이 점차 쇠퇴하는 대신 국왕의 권력이 강화되어 국왕 중심의 강력한 중앙 집권 체제을 확립되는 시기가 도래한다.  


참고로 이집트 카이로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고대 이집트 왕조의 피라미드, 스핑크스외에도 아이유브왕조 및 맘루크 술탄국 시기에 건설된 건축물들을 많이 볼 수 있다. 카이로에 위치한 시타딘이 그 대표적인 건축물인데 살라딘이 아이유브 왕조를 개창하면서 시타딘은 아이유브 왕조의 궁궐 역활을 하였고 또한 시타딘 내에는 3개의 모스크가 있다.    


술탄 하산의 모스크 또한 맘루크 시대의 대표적인 건축물 중에 하나이다. 14C 중반경에 건설되어 이슬람 교리를 가르치는 학교로 사용되었다. 가장 높은 첨탑의 높이가 무려 81m로 카이로에 있는 모스크 중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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