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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ctor Ha Nov 10. 2019

리차드, 살라딘을 넘어서다.

1190년 7월의 무더운 여름, 당시까지 전쟁중이었던 영국왕국과 프랑스왕국은 3차 십자군 원정을 위해 잠시 전쟁을 중단하는 신사협정을 맺고 프랑스 베즐레에서 양국의 군사들이 집결한 다음 동시에 팔레스티나 지방으로 진군을 시작하였다.

리처드의 어머니인  알레오노르는 프랑스왕인 필립 2세의 아버지인 루이 7세의 왕비였던 시절에 이미 루이 7세를 따라 2차 십자군 원정에 참여한 이력이 있었다. 그런 어머니에게서 영향을 받았는지 아니면 종교적 신념이 더 강해서였는지 아니면 기사로서의 성지 회복이라는 대의 명분이 중요했는지는 정확히 모를 일이나 그는 3차 십자군 참전 결정을 하면서 착실히 전쟁 준비를 해왔던 상황이었다. 지난편에서도 언급을 했지만 그의 재산까지 처분을 하며 예루살렘으로 향한 것을 보면 종교적 신념은 있었음에는 틀림없어 보인다.


리처드의 영국군은 투트랙으로 예루살렘을 향해 진군을 시작하였는데 공성무기인 투석기, 돌포탄, 보급품을 실은 수송선단은 리처드가 베즐레에서 출발하기 전에 먼저 영국을 출발하여 스페인과 북아프리카가 가장 가까이에 있는 지브롤터 해협을 지나 프랑스 마르세유에서 도착하였고 리처드는 프랑스 남부 육상로를 이용하여 마르세유에서 수송 선단과 만난 후 이탈리아 제노바를 향해 출발하였다. 리처드는 돛과 노로 움직이는 갤리선(*첫번째 이미지 참고)을 기함으로 사용하여 거대 선단을 이끌었고 수송선(*첨부 두번째 이미지 참고)은 돛을 이용해 오직 바람의 힘으로만 움직였기 때문에 아무래도 갤리선에 비해서 속도를 느릴 수 밖 에 없었으나 거대한 공성 무기인 투석기, 돌포탄을 실어야 했기에 튼튼하면서도 내부 공간이 확보된 수송선이 요긴하게 활용되었다.    

노와 돛으로 항해하는 갤리선
풍력으로 항해하는 수송용 범선



아래 빨간색 화살 표시를 통해 리처드의 영국군의 육상 및 해상 이동로를 알 수 있는데 리처드는 필립 2세와는 다르게 팔레스티나 지방으로 바로 진격을 하지 않고 이탈리아 각 도시 국가, 크레타 섬(Crete), 로도스(Rhodes) 그리고 키프로스섬(cyprus)을 거쳐서 이동을 하였고 이로인해 프랑스에서 출발한지 거의 1년여만에 팔레스티나 아크레(Acre)에 도착을 한다.

또한 이탈리아 시칠리아 및 사이프러스를 경유하는 와중에 뜻하지 않은 분쟁에 휘말리면서 이를 해결하기 위해 시간을 다소 허비하기도 하였다. 시칠리아에서는 자신의 누이인 조안나가 시칠리아 왕에게 시집을 간 후 갑자기 그가 죽자 탄크레디라는 자가 스스로 왕위에 오르고서는 조안나를 유폐시킨 사건이 일어났는데 리처드는 그에 대한 복수를 하기위해 군사를 움직여 시칠리아 메시나에서 그를 굴복시켰다. 이로인해 조안나는 유폐가 풀렸음과 동시에 리처드를 따라 예루살렘으로 향하게 되는데 조안나외에도 예상치 못한 동행자가 또 생기는 일이 벌어졌다. 어머니 알레오노르가 스페인 아라곤왕의 공주인 베렝카리아를 시칠리아까지 직접 데리고 와서는 리처드와 약혼을 시키려 한 것이었다. 십자군 원정으로 인해 개인적인 혼사문제에 대해서 크게 신경을 쓰고 싶지않았던 리처드는 마지못해 어머니의 청을 수락하고는 조안나는 물론이고 베렝카리아를 데리고 시칠리아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향한다.  

십자군 이동로(빨간색 화살표시선이 3차 십자군 이동로임)

그리고 키프로스섬(사이프러스, cyprus)의 경우 다른 경유 지역과는 다르게 의도치않게 조안나와 리처드의 약혼자인 베렝카리아가 타고 있던 수송선이 조타를 잘못하여 키프로스섬에 우연하게 상륙을 하게 되었는데 당시 키프로스왕이 그 수송선에 타고 있던 일행의 차림새가 범상치 않음을 여기고 Lionhear 리처드의 누이와 약혼자가 포함되어 있음을 까막게 모른채 그 수송선에 탑승한 일행 모두를 체포하여 감옥에 가두는 일이 벌어졌다. 아크레(Acre)가 눈앞에 도착하여 살라딘과 일전을 치루려고 만반의 준비를 하던 리처드로서는 키프로스왕의 어이없는 행동에 리처드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음은 말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영국의 대선단을 앞에서 진뒤지휘하던 리처드는 이일로 어쩔 수 없이 아크레 상륙을 몇일 더 미루고 뱃머리를 돌려 키프로스섬에 억류되어 있는 조안나와 약혼자를 구출하기 위해 키프로스섬에 상륙을 하였다. 그는 우선 조안나와 베렝카리아를 구출함과 동시에 군사를 시켜 키프로스 왕을 쫒아내고 키프로스를 영국의 통치령으로 귀속시켜버렸다. 키프로스를 영국령으로 귀속시킨 것은 역사적으로 상당히 의미있는 사건이었는데 리처드가 키프러스를 점령하기 이전까지만 해도 그리스정교의 중심인 비잔틴 제국령에 귀속되어 있었기 때문에 같은 기독교 세력인 1, 2차 십자군이 바로 옆 팔레스티나지방에서 이슬람군과 전쟁을 하고 있던 상황이었음에도 십자군에 대한 지원 조치, 예를 들어 보급품 지원등등에 비협조적이었던게 사실이었다.

그런데 리처드가 키프로스를 직속령으로 통치하게 되면서 후방에서의 보급로를 확보함께 동시에 키프로스를 활용해 팔레스티나 연안 지역의 제해권을 장악함으로써 이슬람 세력이 육상에서 해안으로의 확장을 저지하는 전략적 요충지로서의 지정학적 우위도 확보하게 된 것이다.    


1191년 6월 리처드는 드디어 아크레(acre, 상기 지도 오른쪽 하단 위치)에 상륙하였다. 1189년부터 리치드가 도착하던 그때까지 아크레 공성전은 아무런 결론없이 지루한 공방전을 계속하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십자군 진영과 이슬람군 진영 모두 계속되는 전투로 지쳐 있었는데 십자군 진영에서는 영국의 Lionhear 리처드의 출현으로 인해 일반 병사는 물론이고 당시 아크레 공성전을 이끌고 있었던 예루살렘 왕국의 왕 기 드 뤼지냥, 각 십자군왕국의 봉건 영주들, 템플기사단, 성전 기사단 및 유럽에서 예루살렘왕국을 지원하기 위해 모인 유럽의 각 지방 영주들은 하나같이 모두가 기뻐하며 리처드를 환영하였다.


리처드는 사자 문양이 또렷이 새겨진 영국왕의 깃발을 펄럭이며 마치 개선장군처럼 십자군 진영을 가로질러 지휘부 막사로 향했다. 리처드가 십자군 진영을 가로지르는 동안 전투에서 이긴 듯 한 착각을 들게  할 정도로 십자군은 환호성을 지르며 리처드를 열렬히 환영하였다. 이는 곧 3차 십자군의 리더는 바로 리처드임을 모든 이들이 인지하고 있다는 의미로도 해석이 될 수 있는 부분으로 리처드가 도착할 날을 기점으로서 해서 사실상 십자군의 총 대장은 리처드가 자연스레 담당하게 되었고 그때까지 혼란스러웠던 군사지휘계통은 리처드에게 일임되어 리처드의 명령대로 체계적으로 군대를 운용하기 시작했다.

왕국 왕가의 문장

아크레 공방전 당시 십자군과 살라딘의 이슬람군의 군대 배치도를 살펴보면 당시의 전황을 좀 더 이해하기 편할 것 같다. 십자군은 후방의 살라딘 본진을 방어했어야 함은 물론이었거니와 전방의 아크레성과도 공성전을 계속해야 했다. 양쪽 전선에서 동시에 이슬람군을 상대해야 했던 십자군으로서는 이슬람군보다 오히려 더 정신적, 체력적으로 지쳐있는 상황이었다. 다만 위안이 되었더 것은 아크레성 인근 연안지역 제해권은 십자군 진영 이탈리아 제네바, 피사 해군이 장악하고 있었기에 해안을 통해 키프로스, 티루스 및 타 십자군 공국으로부터 보급품이 원활하게 공급될 수 있어서 장기전을 치루고 있던 어려운 상황임에도 끈질기게 전투를 이어나가고 있었다. 또한 가까운 미래에 반드시 유럽에서 지원군이 도착한다는 일말의 희망이 있었기 때문에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아크레성을 탈환하기 위해 공격을 하였다.

아크레 공방전 당시 군사 배치도

리처드는 아크레 공방전을 끝내기 위해 비장의 대책을 세우는데 우선 자신이 가져온 공성무기인 투석기와 돌포탄을 성벽이 아닌 성문에 집중적으로 공격하게 하였다. 아무래도 단단한 돌로 쌓여진 성벽을 향해 돌포탄을 날려봐야 큰 효과를 거두지 못할 것이나 나무로 만들어진 성문을 돌포탄으로 공격한다면 성문이 파괴되어 성내로 진입하는데 용이할 것이라 판단한 것이다. 그리고 후방쪽은 살라딘의 본 진영을 상대해야 했기에 방어에 능하면서도 전선을 흐트러트리지 않고 살라딘의 맹공을 막아낼 수 있는 냉철함을 보유한 군대를 배치했고 전방은 아크레성을 가능한 한 빠른 시일내에 함락시킬 수 있는 템플기사단, 리처드의 직속부대등등 용맹함을 보유한 군대를 배치하고는 투석기와 돌포탄으로 적의 사기를 꺾은 다음 맹령한 기세로 아크레성을 공격하였다. 또한 바다의 제해권은 이미 십자군에 넘어간 상황이었기 때문에 아크레성내 이슬람군은 보급이 끊어진 상태에서 사방의 적의 공격을 감당하기가 점차 어려지기 시작했다.

아크레 공방전 예상도

1191년 7월 드디어 아크레성의 성주는 전명 항복을 선언하며 성문을 열었고 십자군은 성내로 진입함과 동시에 가장 먼저 아크레성의 가장 높은 성벽의 탑위에 영국왕의 깃발, 프랑스 왕의 깃발을 세움으로써 아직도 후방에서 자신들을 지켜보고 있을 살라단에게 아크레성이 카톨릭 세계로 다시 탈환되었음을 공식적으로 선표하였다.


아래 그림은 아크레성 탈환 당시의 모습을 묘사한 그림으로써 그림 왼쪽에 그려진 말을 타고 있는 인물은 리처드 1세이고 오른쪽에 있는 인물은 프랑스 필립2세이다.

Ptolemais [Acre] Given to Philip Augustus and Richard the Lionheart"Painting by Merry-Joseph Blondel

 살라딘은 후방에서 조용히 이를 지켜보며 이제 하틴의 뿔 전투 당시 자신이 마음대로 짓밟았던 그때의 십자군이 이제는 자신을 목을 조금씩 조여오고 있음을 눈으로 목도하였다. 이렇게 되면 이제 예루살렘까지 위험한 상황에 노출된 것이다. 분명 리처드는 예루살렘으로 바로 진격하기보다는 후방의 보급기지를 확보하기 위해 연안지역을 항구도시를 차례로 공격할 것임은 살라딘은 이미 예상을 하고 있었다.


역시 예상대로 리처드는 아크레성을 함락하자 말자 곧바도 아르수프(Arsuf)로 진격을 시작한다. 오른쪽은 바다가 근접해 있었기에 오직 왼쪽의 살라딘의 군대만 완벽하게 방어한다면 아르수프 빨리 도착할 수 있었다. 또한 이탈리아 해군이 3차 십자군과 동시에 연안을 따라 아크레에서 아르수프로 남하하면서 혹시 모를 이슬람 해군의 공격을 방어함과 동시에 보급로를 해상에서 확보함으로써 식량과 부상자의 이동이라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는데 활용되었다. 그렇지만 상대는 당대 이슬람의 영웅인 살라딘이다. 리처드도 이점을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기에 너무나도 조심스럽게 살라딘의 움직을 주시하며 진격을 하였다.

리처드의 십자군의 왼쪽에서 살라단 대군은 십자군을 계속해서 공격하며 십자군 진열이 흐트러지기만을 기다리는데..   


아래 리처드의 진격로를 보면 살라딘의 공격을 철저히 봉쇄하기 위해 해안선을 따라 아르수프로 행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왼쪽과 후방만 철저히 방어하면 되었기 때문에 큰 어려움없이 아르수프까지 진격할 수 있었으며 해안선을 따라 십자군 해군이 보급로를 확보하면서 십자군의 육군과 함께 진격하고 있기 때문에 후방에서 보급품을 충분히 수급할 수 있었다. 리처드는 이러한 방식으로 야파(Jaffa, 지금의 텔아바브)까지 이동하여 예루살렘을 제외한 지금의 이스라엘 지역 해안 지방을 대부분 탈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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