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여름은 도대체 무슨 정신으로 지나갔는지도 모르겠다.
한껏 후드려 맞은 것 같기도 하고 이미 오랜 상처들에 소금을 뿌린 것 같기도 하고 울다가 웃다가 미친 사람처럼 배회하다가 소리 지르고 화도 냈다가 괜찮은 듯 보이다가도 침잠하고 침잠하고 침잠했다.
아직도 생각난다. 7월 21일 아침에 펑펑 울었다.
몇 문장 사이 그 행간 사이의 어떤 상황이었을지가 다 그려져서, 그리고 선생님께서 너무나 혼자 너무나 외로우셨을 것 같아 엉엉 울었다. 교사라면 누구에게나 있었던 일, 지금도 있고, 언제라도 있을 수 있는 일. 그냥 너무나 알겠어서, 그리고 그 고통을 감히 헤아릴 수 없이 모르겠어서, 소리내어 울부짖으며 우는 울음이 가슴 속 깊은 곳에서 터져나왔다.
가장 처음에 든 마음은 미안함이었다.
서이초 선생님께 죄송했다. 나도 고작 몇 년 차 선배이지만, 선생님께서 신규교사이셨던 게 마음이 아렸다. 내가 바로 그 학교 옆 반 선생님이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학교는 각자도생인지 오래이니까, 당장 내 학급도 너무 힘드니까, 가까이 있었어도 어쩌면 적당하고 얕은 수준의 공감만 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각자 짊어진 짐들이 각자 너무 많아서, 담임업무 외 수많은 행정업무 분장표에 나눠진 표 구획처럼 결국 내 일은 내가, 네 일은 네가 하는 것으로 여겼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각자 다 힘들고 서로를 너무나 알고 서로를 너무나 모른다.
그래도 가시는 길에 손을 잡아주고 싶었다. 안아드리고 싶었다. 등을 쓰다듬어드리고 싶었다. 미안해서 어떤 말도 하지 못해도 옆에 가만히 있어주고 싶었다. 같이 울어주고 싶었다.
다음에 든 마음은 분노다.
교육이 무엇인지 교육기관이 무언지도 모를 교육부에게 화가 난다. 늘 도대체 뭘 교육 현장에 지원해주는지 모르겠는 교육지원청에 화가 난다. 그래도 선배면서, 본인들도 선생님이라고 불렸고, 지금도 불리고 있으면서 교사를 하나도 보호해주지 않으며 뭘 관리하고 있을지 모를 교장 교감이라는 관리자들에게 화가 난다.
아무것도 책임지지 않으면서 교사들에게만 온갖 의무와 책임을 떠넘기는 그들 모두에게 화가 난다. 나는 아니겠지, 또는 뭐 그렇다고 죽기까지 해, 그래도 나는 내 새끼만 가장 중요해, 하고 있을 보호자들에게 화가 난다. 오래도록 교사라는 집단을 싸잡아 쉽게 대상화하고 욕받이로 여기며 손가락질했을 누군가들에게 화가 난다.
그리고 결국에 이런 대한민국 땅에서 초등교사를 꿈꾸고 이 직업을 선택한 나에게 화가 난다.
어쩌면 내가 선택한 게 아니라, 여성으로서 그나마 이 따위 직업이 좋은 직업이라고 선택하게 만들었을, 그래서 선택 당했을지도 모르게 할 이 사회에 화가 난다.
고작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은 이 시점에서 누군가는 이제 그만 슬퍼하고 일상으로 돌아가자, 고 한다.
나의 일상은 이미 학교가 된지 오래다. 내가 살아왔고 지금도 살려고 아등바등 하는 곳이 학교다. 일상과 근무시간이 구분되지 않고, 구분되지 않게 했고, 워라벨같은 건 사치였던 게 교직이다. 도대체 어디로 돌아가라는 거야, 당장도 나는 출근을 해야 하는데.
관두면 되지 뭘 죽기까지 해,라고 한다.
함부로 이야기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어떤 사람이 교사이기 전에 ‘사람’으로서 모멸감을 받고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침해받으면 죽고 싶을 수 있다. 죽는 게 나을 수 있다. 아니, 이미 살아있는 게 죽은 거나 다름없을 수 있다. 너무 힘드니까 그냥 이 생을 다 관두고 싶을 수 있다. 그런 아프고, 죽고싶고, 죽은 교사들은 지금도 셀 수 없이 많다.
그렇게 힘들면 교사를 그만두라,고 한다.
많은 사람들은 생계를 위해 일자리를 갖고 노동을 한다. 교사도 마찬가지다. 교사도 교사이기 전에 그저 노동자고 누군가를 부양해야 할 가족의 일원이거나 스스로를 부양해야 하기도 하며, 그저 한 사람이다. 교사임을 포기당하는것은 한 사람으로서 모멸감과 평생의 크나 큰 상처를 받게 되는 일일 수 있다. 그럴거면 관두라고 쉽게 말을 듣는 것도 때로는 가슴이 아프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면 그만이라고 했던가. 나도 그럴 수 있다. 그럼에도 그만둘 때 그만두더라도 말은 하고 때려쳐야겠다. 이 엉망진창인 학교에 대해, 교육이 없게 하는 사회에 대해, 교사가 교사로서 있을 수 없게 하는, 한 인간으로서 존중받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 대해. 누가 교사를 안정적인 직장이라고 그랬나, 언제라도 꼭 내 의지가 아니더라도 직업을 박탈당할 수 있겠다고 오래 전부터 생각해왔다.
그런데 이 나라는? 교육은? 학교는? 아이들은? 지금 학교는 교육이 없다. 지금 학교는 교육기관이 아니다. 가르치는 일만 하려면 교사를 해선 안 된다. 교사들은 불행하고 그런 불행한 교사와 함께 하는 아이들이 가엾다. 아이들은 그들의 보호자들이 노동을 하는 동안, 또는 돌봄에서 해방되기 위해 그저 싸게 손 쉽게 많이 어딘가에 가둬놓아지고, 잡아두기만 하면 좋을 존재들이 아니다. 이건 너무 웃기고 웃기지 않고 슬프고 화나고 비극적이고 죽어도 끝나지 않을 생생한 지금의 살아있는 이야기다.
“교사들은 가르치고 싶다, 학생들은 배우고 싶다.”
한 여름 지글지글 타는 아스팔트 위에서 검은 옷을 입고 선생님들이 처절하게 외치던 목소리가 절규로 들리지는 않는가. 살려달라는 말이고, 우리 함께 같이 살고싶다, 살자, 살아보자는 말이다.
김언희 시인은 시 <음화>에서 [제 몸이 불타 없어지는 것을 끝까지 지켜보던 둥근 눈이 ... 있었다.]고 했다. 나는 이게 진짜 무서운 거고, 교육부 교육청 관리자 보호자들이 결국에 이걸 두려워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끝까지 지켜볼 한 명, 한 명의 눈. 그리고 그게 모이고 모이고 모이고 계속 되면 어떻게 될지.
그러니 슬퍼하면서 울고만 있지는 않겠다.
지치지 않고 힘을 내어보겠다.
두 눈 똑바로 뜨고 지켜보며 관심을 갖겠다.
작게나마라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할 수 있는 것들을 하겠다.
그래서 먼 훗날 2023년 여름을 떠올렸을 때ㅡ
더 이상 미안해지지만은 않겠다. 슬퍼지지만은 않겠다. 혼자 방에서 분노만 하고 있지 않겠다. 부끄러워지지만은 않겠다. 내가 평소 아이들에게 가르쳐왔듯이 생각한 것을 행동하고 실천하겠다. 두려워하지 않겠다. 말하고 싶은 것을 말하고 쓰고 싶은 것을 쓰겠다. 할 수 있는 것들을 했다고 기억하겠다. 함께 하겠다.
이것은 기필코 살고자 하는 나의 생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