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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창우 Nov 21. 2023

군대의 물 주전자와 제식 훈련

일상의 철학: 이유를 물으며 살기

 이유를 묻지 않는 사람들 속에서 이유를 물으며 사는 것은 참으로 괴로운 일이다.
-이어령

 

 군 생활을 할 때의 일이다. 소대에 신병으로 전입했는데, 맞선임이 막내의 일이라면서 알려준 많은 일들 중에(물론 비공식적 업무분장, 다시 말해 악습이다) 하나는 밤마다 생활관에 주전자로 물을 뿌리는 일이었다. 이 걸 왜 하는 거냐고 물었는데 본인도 모른다고 했다. 그리고 그렇게 물어보는 것은 짬이 안 되는 사람이 해서는 안 되는 일이니, 앞으로는 하지 말라고 했다.

 당시 생활관에는 가습기가 설치되어 있었다. 기기 상태가 좋은 걸로 보아 설치된지 얼마 안 된 것 같았다. 추론해보건대, 가습기가 없던 시절에는 소대 내 습도를 유지하기 위해 주전자로 물을 뿌렸던 것 같다. 그런데 그 일을 가습기가 설치된 이후에도 계속 하고 있던 것이다. 맞선임 말로는, 자신이 한 번 까먹고 물을 안 뿌렸던 적이 있는데 고참 선임 하나가 요즘 막내는 왜 이런 것도 안 하냐고 크게 나무라서 계속 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니까 물을 뿌리는 행위(기표)가 최초에 발생했을 때는 습도의 유지라는 이유,의미(기의)가 존재했다. 그런데 그럴 이유가 사라지고 나서도 형식적 행위가 종교적 규범처럼 지속되고 있는 것이었다.


 군대에는 이런 것들이 끝도 없다. 제식훈련도 그렇다. 제식은 전열보병 시대의 흔적이다. 총기의 정확도가 부족했을 때는 군인들이 열을 맞춰 행진한 다음 일제히 사격을 해 화망을 형성해야 적을 맞출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열을 맞추는 제식훈련이 매우 실용적인 훈련이었다. 그런데 총기 정확도가 매우 향상되어 은폐, 엄폐가 중요해진 시대에는 제식훈련은 쓸모가 없다. 그러니 지금 하는 제식훈련은 이유 없이 반복하고 있는 것밖에는 안 된다. 훈련소에서 군인 정신을 함양한다는 명목으로 종교적 의식의 하나로 쓰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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