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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이테 Oct 26. 2024

해맑은 미소로 나를

내게 가을바다는 -3

내 전화를 받은 Y의 목소리는 밝고 경쾌했다. 그의 목소리가 원래 이랬었나 싶을 정도였다.

대동제가 시작되었다. 솔로들의 대 반란.


만남에는 장소가 주는 분위기도 무시할 수 없다. 핫플레이스로 뜨고 있는 억새풀밭이 분위기로는 두말할 것도 없었지만 교내 가장 후미진 곳에 위치해서 거기까지는 좀 귀찮았다. 내가 할 데이트 장소도 아닌데 굳이 약속장소를 그곳까지 할 필요는 없었기에 쉽게 갈 수 있지만 운치가 있는 공대 앞 벤치로 정했다. 먼저 Y와 만나서 담소를 나누다가 후배 K가 자연스레 지나가는 척하면 그녀를 불러 세워서 합석하기로 했다. 그런 후에 나는 빠져나오는 것으로 계획을 세웠다. 이후에 얘기가 되든 아니든 그건 그녀 몫이다.


Y는 평소 맨투맨에 청바지 차림과는 달리 내가 좋아하는 댄디한 옷차림을 하고 나왔다. 베이지색 면바지와 카키색 카디건 이너로 화이트 셔츠. 옷차림만으로 봐선 예감이 좋았다.

"오,  멋진데?? 오늘 너 신경 좀 썼구나."

그와 가볍게 시답잖은 근황들을 얘기하고 있자니 그녀 K가 5미터 전방에서 모른 척 우리 앞을 지나간다. 각본대로 그녀를 불러 세웠다. 그리고 잠시 후 자리를 피해주려 일어섰더니 Y가 선수를 쳤다.

"누나, 저도 친구랑 약속이 있는데 어느 쪽으로 가세요?"

우리의 각본은 예상을 빗나갔고 그녀 K는 그렇게 Y에게 말도 꺼내볼 수 없이 끝이 났다.




2말 3초라고 했던가. 2말의 대동제이다. 그때까지 미팅은 두세 번 해봤지만 별로 신통치 않았다. 미팅 후 만남이 개별로 이어진 경우보다 그룹으로 몰려다니며 포켓볼을 치거나 볼링을 하거나 서로 가두판매 티켓을 품앗이하는 편한 남사친의 관계로 유지되었다. 사귀어 본 남자친구 없이 2학년을 마무리해야 했다. 대신 주변에는 누나를 연호하며 따르는 귀찮은 후배들이 들끓었다. 후배들 챙기느라 실속이 없었던 나는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실속을 챙겨보기로 했다. 호기롭게 미팅 약속을 잡았다. 더불어 미팅 주선도 맡았다.

남학생 두 명이 미팅을 원한다는 친구의 부탁에 나는 여학생 두 명을 섭외하기로 했다. 미팅에 나올 남학생 한 명은 친구의 서클 선배로 우리 서클룸 옆 방이 그들의 서클룸이었기에 자주 마주치던 인물 찬이었다. 그리고 또 한 명은 그의 고등학교 친구라는데 다른 학교 학생이었다. 내 미팅 상대도 아니었기에 더는 궁금한 것도 없었고 그 정도의 정보만으로도 충분했다.

아뿔싸. 섭외한 1명에게 급하게 일이 생겨 미팅이 펑크날 지경에 이르렀다. 펑크를 땜빵할 여학생을 찾아 급히 뛰어다녔지만 이런저런 이유들로 미팅이 성사되지 못할 상황이었다. 여학생 주선자인 내가 땜빵을 해서 해결할 수도 있었지만 내 소개팅 시간과 맞물렸다. 결국 미팅 장소에 나가서 나의 죄를 읍소해야 했다.


첫눈에 반한다는 말이 있었지만 그때까지도 나는 그 말을 신뢰하지 못했다. 내 경우도 그랬지만 주변 어느 누구도 첫눈에 반해서 만나기 시작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 사람의 됨됨이가 어떤 줄 알고 사람이 첫눈에 반한단 말인가. 첫인상이 좋은 사람은 있어도 첫눈에 반한다는 것은 도통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그런데 나는 규찬의 친구로 나온 그에게 첫눈에 반하고 말았다.

사죄의 마음으로 그들에게 꼭 시간을 내어주면 다음에 밥 한 번 사겠다고 했다. 이것은 입에 발린 말이 아니었다. 당장은 약속해 놓은 소개팅으로 시간을 낼 수 없었지만 다음 만남이 꼭 있기를 진심으로 바라면서 간절히 아주 처절한 눈빛으로 한 말이었다. 첫눈에 반한 규찬의 친구를 꼭 다시 만나고 싶었다. 그곳을 수습하고 내 소개팅 장소를 향해 가는 발걸음이 무거워졌다. 이미 이 소개팅은 시작도 하기 전에 쫑이 난 거나 마찬가지다.

소개팅남 얼굴에 조금 전 만났던 그의 얼굴이 그려졌다. 차만 마시고 식사도 없이 소개팅을 마쳤다. 소개팅남은 그렇게 의문의 1패를 당했다. 2말 대동제에 드디어 운명의 남자를 만나는 것인가. 혼자서 김칫국부터 마셨다. 내가 그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규찬의 친구이니 나보다 한 살이 많다는 것뿐이었다. 그런데 순식간에 그 가을이 너무 아름다웠다. 낙엽이 봄 벚꽃보다 더 화사해 보였다. 벚꽃 찬가가 아니라 낙엽 찬가라도 만들어야 할 정도로 내 마음은 구름처럼 둥둥 떴다. 그 해 가을이 그렇게 깊어갔다.




2학년 2학기가 끝나고 겨울방학이 시작되면서 동기들이 우르르 빠짐없이 모두 군대에 입대하겠다고 휴학했다. 이제 현역으로 우리와 함께 학교에 남아 3학년을 함께 지낼 동기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만큼 우리는 면회와 위문편지에 바빠지기 시작했다.

금속공예과에 다니는 서클 친구가 공모전에 출품할 작품 제작으로 방학중에도 매일 학교에 나와 작업을 한다고 했다. 나는 친구를 응원할 겸 함께 시간을 보내기로 약속을 잡았다. 외출을 서두르고 있는데 Y의 전화가 왔다.

"누나, 학교에 볼 일이 있어서 가는데 얼굴 볼 수 있어요?"

"그래? 나 수현이랑 점심 약속이 있는데 수현이 만나기 전에 잠깐 얼굴 보면 되겠네. 11시에 도서관 앞에서 만날래?"

방학 중인데 학교까지 와서 봐야 할 Y의 볼 일이 무엇인지 관심도 없었고 수현이 만나기 전에 잠깐 만나면 되겠거니 생각하고 도서관 벤치 앞에서 먼저 Y를 만났다. 날씨가 추워 도서관 지하 매점에 들어가서 커피 잔과 빵을 사주고 방학을 어떻게 보내는지 잠깐 이야기를 나누었다. 수현이가 합류했다. 학분식집에 가서 식사를 마쳤는데도 Y가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어머, 얘는 별 할 얘기도 없으면서 왜 만나자고 한 거야? 이쯤에서 적당히 빠져주면 좋겠는데 왜 갈 생각을 안 하는 거지?'

수현이와 나는 서로 같은 생각으로 눈빛을 주고받았지만 후배 Y는 우리를 따라 일어섰다.

"우리 수현이 자취방에 가서 놀기로 했는데 너도 갈래?"

예의상 물어본 말에 Y는 눈치도 없이 거절을 하지 않고 동행했다. Y는 다른 후배들처럼 자주 만나 시간을 보낸 것이 아니었기에 후배지만 불편했다. 수현이 자취방은 학교와 멀어서 버스로 이동해야 했다. 수현이는 친구와 후배를 위해 이것저것 간식을 내놓았다. 우린 수현이 자취방에서 한 이불속에 발을 넣고 앉아서 이런저런 얘기를 했다. 수현이와 따로 하고 싶은 얘기가 있었지만 Y가 있으니 그럴 수 없었다. 친하지도 않은 후배 앞에서 우리의 연애사를 펼쳐 놓을 수는 없었다. 결국 두 시간 정도 자취방에 머물다가 Y와 나는 다시 버스를 타고 학교 앞으로 돌아왔다. 별 할 얘기도 없으면서 나를 만나자고 한 Y가 좀처럼 이해되지 않았다. 학교 앞에서 Y와 인사를 나누고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방학이 다 지나는 동안 Y의 연락은 더 이상 없었다.




개학을 하고 3학년 생활이 시작되었다. 2학년이 된 후배들이 속속들이 서클룸에 모습을 나타냈다. 방학 내내 냉골이던 서클룸은 다시 활기로 가득 찼고 우리는 신입생 확보에 열을 올렸다. 작년 우리가 했던 역할을 2학년 후배들이 맡아서 진행했다. B는 여전히 깐죽깐죽 나를 친구 대하듯 어깨를 툭툭 치거나 이유 없이 웃으면서 거슬리게 했다. 재수를 했건 안 했건 내게 모두 누나라는 호칭을 쓰는 다른 후배들과 달리 유독 B만 건들건들 선배라는 호칭을 써서 미운털을 날리게 했다.

다른 후배들은 보이는데 원래도 뜸했던 Y의 모습은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 B야, 너희 동기 Y랑 K는 왜 요즘 안 보이니?"

"선배, Y랑 K 군입대 했어요. 몰랐어요? Y는 해군, K는 공군요."

"그래? 언제 입대했는데?"

"그때가 1월 18일이었나?"


기억을 더듬어 보니 수현의 자취방에 간 날은 Y의 입대 4일 전이었다. 그날 Y는 먼저 와서 싸락눈이 얇게 내려앉은 텅 빈 벤치 사이를 서성이며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나 거기 오래 있었는지 끝이 빨갛고 입술이 파랬다. 나를 보는 순간 Y는 춥고 건조한 날의 쨍한 햇살 같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수현의 자취방에서 나와 정류장에서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리다 마주쳤던, 해맑은 미소로 나를 바라보던 Y의 얼굴점차 선명하게 떠오르기 시작했다.

아, 그랬구나. 그제야 나는 Y가 내게 입대 인사를 하려고 왔다는 걸 알았다. 선배나 동기들 대부분이 2학년 1학기나 2학년을 마치고 입대했다. 1학년 마치고 입대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기에 나는 Y의 입대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Y에게 너무 미안했다.


https://youtu.be/yGMOY54lJHg?si=CQF-E-1SVLxwaAVV



https://youtu.be/pBSyRQYYhMI?si=7e20N3gPzafWqaG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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