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처럼 눈발이 날릴듯하고 여전히 나무에 붙어서 낙엽이 되지 못한 홍단풍이 눈에시큰하도록 고운 날에는 찬 바람이 문풍지 틈을 뚫고 들어온 것처럼 한 시절의 기억이 가슴을 서늘하게 한다.
금강 하구에 가까운 곳으로 나가보았다. 금강은 한강, 낙동강에 이은 대한민국 3대 강이다. 전북 장수군 뜬봉샘에서 발원하여 무주, 진안, 금산, 영동, 옥천, 보은, 청주, 대전, 세종, 공주, 청양, 논산, 부여, 서천, 익산을 지나 군산만에서 황해로 유입된다. 오늘 나간 곳은 군산만으로 흘러들어 가기 전 하구 부분 진포대첩지 웅포 곰개나루이다.
유독 두 그루의 단풍이 간신히 강변의 마지막 잎새가 되어 위태위태하게 늦가을의 그림자를 붙잡고 있었다.
지난가을 두 번 만났던 섬진강이 외유내강형이라면 금강은 외강내유형 아닐까 싶다. 물론 곡성 가정역은 하류가 아닌 중류이고 웅포 곰개나루는 하류이기에 강폭이나 유속의 차이가 있는 것은 당연하다. 산을 휘돌아 나가는 섬진강이 섬세하고 다정한 막내 같은 강이라면 주로 평야지역을 유유히 흐르는 금강은 무뚝뚝하지만 든든한 장남 같은 강이다. 이건 어디까지나 두 강에 대한 내 느낌일 뿐이다.
곰개나루는 바다와 만나는 지점이 지척이라 그런지 강폭이 상당히 넓었다. 빗방울이 흩날리는 강변은 바람마저도 잠자는 아기의 숨소리처럼 고르고 차분했다. 낙엽이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만큼 고즈넉하고 한산한 강변길을 나 역시 강물인 것처럼 조용히 걸었다. 거기 처마가 있는 그네가 강물을 마주 보고 앉을 수 있게 마련되어 있었다. 2인용 그네에 철퍼덕 앉아서 발을 굴러 진폭을 크게 작게 하며 콧노래를 바람에 실어 강으로 띄웠다. 낙조가 아름다운 곳이라서 강 건너 산 뒤로 떨어지는 황홀경을 독차지하고 싶었지만 흐리고 가루비가 내리는 탓에 아쉬움을 남기고 돌아왔다.
금강
지각쟁이 단풍
강 건너는 충남 서천군
부여에서 내려오는 물/군산바다로 흘러가는 물
곰개나루/진포대첩지
단풍나무 아래
금강을 따라 자전거길이 이어진다. 군산 금강하구둑에서 대청댐까지 이어진 길
그네
내가 겨울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이유 여럿이 있다.
아버지를 닮아 체질적으로 냉한 기운이 몸에 많아서 유독 추위를 많이 탄다. 게다가 어린 라이테 걸음으로는 40분 정도 걸리는 허허벌판을 등하교하느라 징글징글하게 추웠던 기억이 있다. 뜨개질 이런 것에는 관심이 전혀 없었던 젊은 엄마는 그 흔한 목도리, 귀마개 하나 떠주지 않아서 늘 나이 차이 많이 나는 큰언니가 떠 줬다고 자랑하는 색깔도 고운 장갑이며 귀마개, 심지어는 스웨터까지 든든히 입고 있던 친구 미정이가 참 부러웠었다. 등하교 그 길을 여름에도 걸었을 테지만 여름에 더워서 힘들었던 기억은 없다.
계절이 바뀌는 이 즈음의 나는 마음이 곧 잘 서글퍼지곤 하는데 그래서 초겨울이 힘들기도 하다. 마음이 텅 비고 일탈이 살짝 일어나는 것 같다. 이 일탈이란 게 기껏해야 오늘처럼 강가에서 물멍이나 하는 정도다.
정말이지 미련스럽게 가을에 미련을 못 버리는 이유 중 하나는 20여 년이 다 되어가는 그때가 생각나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이미 딱지까지 다 떨어지고 새살이 오른 지 오래된 상처의 뿌리가 여전히 남아 언제든 생육 조건만 맞으면 다시 싹을 틔울 것 같은. 그 시절이 아마도 내가 노래방마이크를 가장 자주 잡았던 때가 아닌가 싶다. 마이크를 가장 많이 잡았어도 뭐 노래방 도우미 이런 직업적인 이야기는 아니니 기대는 마시기를. (마이크 이야기가 나와서 살짝 옆으로 새자면 노래방 마이크 잡은 것에 비교할 수 없을 만큼의 교회 마이크를 훨씬 더 많이 잡은 교회언니입니다.)
여기까지 글을 쓰고 나니 텅 빈 마음에 희미한 불빛이라도 켜 놓아야 할 것 같은 진동이 일어 깊은 호흡을 한 번 하고 잠깐 백석시인의 시라도 잡고 있아야 할 것 같다.(글 쓰다 잠깐 쉬었습니다.)
흑역사 이긴 한데 노래방 이야기가 나온 김에 속시원히 이야기를 한다. 이 이야기를 하려니 잠깐 쉼이 필요했던 모양이다.
이미 끝낸 매거진의 스토리를 읽어보신 분들이라면 짐작하실 수도 있겠다. 내가 기울어가는 크루즈선에 승선한 것이 결혼이었다. 결혼생활이 이어질수록 난파된 배는 회복이 불가했고 급기야 추심 전화를 피해서 종일 아이 둘을 데리고 낮에는 지인 집을 전전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도저히 무서워서 그 전화를 받을 수 없었다.
나는 남에게 꾸어 주는 한이 있어도 꾸어온 것을 갚지 않고는 못 배기는 성격인데 단 한 푼도 내가 써보지 못한 돈이 내 카드와 은행계좌를 거쳐 남편이 운영하는 일에 쏟아졌고 회생불가 상태가 되었다. 워낙 상가와 땅덩이가 크다 보니 매물로 내놓은 지 몇 년이 지나도 계약이 성사되지 못했다. 계속 은행부채는 늘어갔고 개인회생 제도를 이용하려고 신청했지만 심사에서 탈락되었다.
그런 지난한 일에서 숨통이라도 트이라고 언니가 제안을 했다. 언니의 제안은 형부가 근무하는 군부대에서 고용할 민간인을 모집하고 있으니 거기 지원해 보라는 것이었다. 추심회사의 부채는 언니가 대출을 받아서 해결해 주는 대신 매달 급여로 분할상환하자고 했다.
언니가 사는 곳과 내가 사는 곳은 편도 3시간 거리쯤 되는 곳이었으니 출퇴근은 불가했다. 언니가 내 아이 둘을 돌봐줄 테니 군부대에서 일을 해보라는 것이었다. 마침 모집 관련 부서가 장교로 복무하는 형부관할 소속이라 형부찬스를 써서 이력서만 제출하면 채용이 가능했다. 물론 채용조건에 부적격한 사항은 전혀 없었다.
다른 생각 할 겨를 없이 염체 없게도 군인관사 아파트에서 두 아이를 데리고 더부살이를 하게 되었다. 다행인 것은 아파트평수가 넓은 신축이었고 군부대 내에 골프장, 영화관, 유치원, 어린이집 등 부대 편의시설이 딸린 곳이었다.
그렇더라도 객식구인 동생네를 한 집에서 데리고 있으면서 유치원과 어린이집에 다녀온 조카를 돌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사연 있는 동생을 데리고 있다는 것이 결코 언니에게는 덕이 될 수 없는 일이었음에도 언니는 그런 결단을 내렸다.
그곳에서 한 달이 모자라는 1년 여가 다 되어가는 때에 형부는 다른 곳에 발령을 받게 되었다. 11월 초순 늦가을이었다. 한 달 내에 아파트를 비워야 했다. 다시 나는 살던 곳으로 돌아가야 했고 언니는 틈틈이 이사준비를 해야 했다. 우리 집 경제 상황은 갈수록 더 어려워졌다. 급물살같이 돌아가는 상황 속에서 나는 날마다 눈물이었고 스트레스가 극에 달해 하루 네 끼의 밥을 먹고 몸무게가 2주 만에 4킬로그램 늘었다. 근무하는 건물 지하에 있던 노래방에 날마다 가서 한 시간씩 노래를 불렀다. 노래를 부르다 울다 노래 부르다 웃다 춤을 추다 울다 그렇게 근무 중간 쉬는 시간에 눈이 벌개서 퉁퉁부은채로 오후 근무에 복귀하곤 했다.
해가 바뀌기 전에 언니는 강원도로 떠나고 나는 친정을 향해 떠났다.
그때 그곳에서 친정까지 거리의 2/3 지점을 지날 때까지 두 시간을 용달차 안에서 울었다. 그런 서러운 시간들이 다 지나갔다.
올해 내 가을과 함께 성실한 섬진의 강물도 흘러갔다. 그때아이들은 이제 20대 청년이 되었다.
다시 그 계절이 돌아왔다. 이제는 떠올려도 아플 것 같지 않은 시간들이 여전히 내 마음에 먹먹하게 남아있다.
나는 마이크를 잡아보겠노라고 지난주 혼노를 호기롭게 외쳤으니 호기롭게 가려고 준비한다.
리스트를 뽑아 보았다. 고민하지 말라고 딱 맞는 선곡표를 애정하는 앙티브 글벗님이 댓글로 이미 마련해 주셨다.
우울한 편지(유재하)-내 마음에 비친 내 모습(유재하)-문리버-가을밤에 든 생각(잔나비)-텅 빈 마음(이승환)-.......-마무리는 사랑하기 때문에(유재하)
유재하로 시작해서 유재하로 끝난다. 필을 받으면 서주경도 이은미도 한번 불러볼 참이다. 게다가 수준을 조금 높이고 싶은 마음에 가곡 반주가 있다면 잔향, 첫사랑 노래도 앙콜곡처럼 새침하게 불러보고 싶다. 그리고 교회언니답게 oh Holy night!!
몸살기운이 들썩여서 컨디션이 그다지 좋지 않지만 내일 주일에 잡을 마이크를 생각하며 목청을 아껴서 내질러볼 참이다.
그러려면 먼저 배를 든든히 채워야지.
금강에서 돌아와 막 브레이크 타임이 끝난 지역의 맛집으로 향했다. 여긴 예약 아니면 브레이크 타임이 끝나고 30분이 채 되기도 전에 대기줄을 서는 곳이다. 조금 눈치가 보였지만 4인 테이블에 당당하게 혼자 앉아서 빠네크림파스타를 주문했다. 이럴 땐 속전속결이다. 대기줄이 생기기 전에 얼른 자리를 비워주는 센스를 잊어서는 안 된다. 비도 내리고 어두워진 거리에 꼬마전구는 깜빡깜빡 앙증맞으니 느긋하게 식사를 하고 향긋한 커피도 한잔 마시면서 초겨울의 초저녁 낭만을 즐기고 싶었지만 눈총 받을 용기는 없었다. 맛집만 아니었어도... 아쉽지만 식사를 마치자마자 엉덩이에 선인장이라도 깔고 앉아있었던 것처럼 벌떡 일어나 나왔다.
빠네크림파스타
식당 근처에 코인노래방까지 딱이다. 시설이 깨끗하고 초저녁이라서 그런지 손님이 거의 없었다. 손님이 있더라도 부스 같은 방에 들어앉아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 들 누군 줄 알겠나. 아무 부담도 없이 방 하나를 차지하고 들어갔다. 일부러 청소년 전용방인 끝쪽에 자리를 잡았다. 왜 청소년 전용 방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청소년들이 요란하게 노래를 부르니 끝으로 배치를 해놓지 않았을까 싶다. 그러거나 말거나.
조명이 번쩍번쩍 현란하다. 마이크에 일회용 덮개를 씌우고 한 손에는 마이크를 한 손에는 대형 리모컨을 잡고 전투태세를 갖추었다.
이미 선곡표는 나왔고 첫 노래 우울한 편지부터 시작을 했다. 처음엔 어색해서 30분을 결제하고 얼떨떨하게 서툴러서 노래 몇 곡 부르고 나니 순식간에 시간이 지나갔다. 재미가 쏠쏠했다. 30분을 추가했다.
라이테가 어떻게 추가 시간을 보냈을지는 구독자님들의 상상에 맡기겠다.
사진 찍으랴 노래하랴 와중에 동영상도 살짝, 음성녹음도 조금 하느라 바빴다.
사진은 노래방 화면만 공개하고 동영상과 음성녹음 파일은 비공개다. 혼자 들어도 얼굴 빨개질 만큼 부끄럽다.
이렇게 노는 거다. 혼자 걷고 혼자 먹고 혼자 보고 혼자 부른다.우리 고향 동생 새벽소리 작가님의 일탈 부추김에 힘을 얻은 이런 일탈 참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