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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정수 Sep 09. 2024

산골 어린이들이 아프면?

생태유학 41. 응급의료 붕괴 논란에 부쳐

#1. 곰배령 끝자락 설피마을에 손님이 들렀다. 필자의 대학 선배들이다. 앞자리 5자를 달고 인생 2 모작, 내지는 3 모작에 대해 생각을 나누는 게 인상적이었다. 모두 한의사를 하시는 한 선배를 부러워했다. 사실상 은퇴 없이 계속 직업을 이어갈 수 있지 않은가 하는 부러움이다. 그래도 그 선배는 은퇴 후를 그리고 있었다. 뜬금없이 "선배, 무의촌에 가서 의료봉사 하면서 살면 어때?"라고 말해버렸다. 설피마을은 사실상 무의촌이기 때문에 의료 접근성이 굉장히 목말라 있어서 그랬을 거다. "어.. 하하... 그래... 그.. 그거 좋지..."라고 그 선배는 답을 했고, 다른 선배들이 다른 제안을 연이어 내면서 유야무야 넘어가 버렸다.


#2. 설피마을 산골유학 어린이 가운데 2학년 윤서가 팔이 부러졌다. 자전거를 타고 얕은 내리막을 내려오다가 자전거 앞으로 날아가면서 팔로 떨어지면서 오른쪽 상완부(위쪽 팔) 골절이 됐다. 아이는 혼날 걱정 때문에 바로 엄마아빠한테 이야기를 못하고 옆집 아저씨인 나를 불렀다. 무릎이 크게 까지고 입술도 약간 찧었지만 외견 상 큰 상처는 없었다. 그런데 팔을 들지 못하겠다고 하는 것이 골절이 의심스러웠다. 그래서 윤서 부모님께 곧바로 인계했다. 설피마을에서 가장 가까운 병원은 양양읍내에 있다. (설피마을은 행정구역 상 인제군 기린면에 속하지만 양양군과 경계선에 위치하고 있어 생활권은 사실상 양양에 속한다.) 다행히 양양 읍내에는 정형외과가 한 곳 있다. 윤서 부모님은 윤서를 자차에 싣고 양양읍내로 달렸다. 처치를 받았지만 어린이는 깁스를 좀 더 타이트하게 매 줘야 하기 때문에 다음날 강릉에 가서 다시 조치를 받으라는 지침을 받았다. 울고불고하는 아이를 달래서 다음날 강릉까지 다시 나가야 했다고 한다.


#3. 경진이는 지난주 모나용평으로 체험학습을 다녀왔다. 1박 2일이라 생태유학 친구들이 굉장히 설렜다. 그중 한 친구가 저녁에 열이 나서 중도에 귀가했다. 경진이는 귀가한 날 저녁부터 목이 따끔거린다고 하더니 주말에는 열이 제법 나면서 목이 아프다고 하고 기침을 했다. 열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이 느낌에는 코로나 아니면 독감인 것 같았다. 토요일엔 해열제와 종합감기약으로 버텼다. 일요일엔 양양 읍내를 뒤져 당번약국을 찾아내 코로나 자가진단 키트를 샀다. 일요일 저녁에 일단 검사를 해봤는데 한 줄. 음성이 나왔다. 해열제를 먹으면 열이 내리고 조금 지나면 다시 오르기를 반복했다. 월요일 아침이 돼도 큰 차도가 없어서 학교에는 결석한다고 말해 두고 강릉으로 갔다. 양양 읍내에는 소아청소년과가 없기 때문이다. 속초에 있긴 하지만 속초나 강릉이나 걸리는 시간은 비슷하다. 강릉에서 코로나+독감 검사를 할 수 있는 소아청소년과를 검색해 방문했다. 검사를 하면 속이 시원할 것 같은데, 의사 선생님은 검사할 필요가 없다며 말린다. 독감은 시즌이 아직 아니라서 검사해도 안 나올 가능성이 크고, 코로나 검사는 집에서 음성 나왔으면 여기(의원)에서도 음성이 나올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설령 양성이 나온다고 해도 감기로 처방 나가는 약과 전혀 다를 게 없다며 아무런 실익이 없다고 설명해 줬다. 5일 치 약을 타왔다. 약을 두 번 먹으니 어느 정도 열은 내렸다. 그 과정에서 우리 집 딸내미에겐 아세트아미노펜(타이레놀 계열)보다 이부프로펜(부루펜) 계열이 더 효과적이라는 걸 새삼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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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술(仁術)로서의 의술을 운운하기엔 시대가 너무 나가버렸는지도 모르겠다. 예뻐지고 젊어지고 탱탱하고 팽팽해지겠다는 피부 깊이의 욕망이 대한민국 의사들을 피부과 아니면 성형외과 의사로 만들어 버렸다. 아니면 선후가 바뀌었는지도 모르겠다. 수도권 중심주의, 남들 하는 대로 다 따라 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이상한 근성, 꿈과 이상, 재미와 보람을 좇는 대신 돈을 추종하는 사회 풍조가 오늘날 대한민국을 이렇게 만들었다. 


응급의료가 무너진다면서 시골에 한 명 있을까 말까 한 의사들을 다 대도시 병원으로 데려갔다. 어디가 아프면 병원을 찾아 한 시간도 넘게 차를 몰아야 하는 사람들은 분노할 수밖에... 산골에 워낙 사람이 없으니 의사가 병원을 열 엄두를 내지 못하는 건 이해가 간다. 그러나 군 단위에 병원이 없어 기초진료라도 받으라고 세워놓은 공중보건의사를 도시 병원으로 데려가는 건 어떻게 봐야 할까? 산골사람들은 아프면 산에 올라가서 약초나 캐 먹으라는 소리인가? 못마땅함이 퐉퐉 쌓인다.


그런데 여기서 잠깐. 의사는 꼭 전교 1등 하는 사람들만 해야 하나? 오늘날 의사의 업무가 꼭 슈퍼 엘리트 급으로 똑똑한(학습 능력이 뛰어난) 사람들이 전담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인제군 기린면 진동리에도 젊은 사람들이 꿈과 희망을 따라 살면서 적절한 거리에서 의료 서비스를 받는 그런 세상은 영영 오지 않을 수도 있을 것 같다. 대한민국 아파트 값이 미쳤다고 생각하면서 살아온 지도 어언 20년이 넘어가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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