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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혜력 Nov 06. 2024

잊히면 안 되는 이름 -11화

"우리는 누군가의 가슴속에 깊이 새겨질 이름을 가지고 있다. “

1950년 6월 25일.

아버지가 낯빛이 새하얘져서 엄마와 할머니에게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엄마와 할머니의 얼굴에도 어두운 그늘이 역력했다. 나는 방 안에서 그들의 대화를 엿들었다.

"어머니, 전쟁이랍니다. 북쪽에서 남쪽으로 쳐들어왔어요."

 아버지의 말에 엄마는 손을 모아 쥐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우리도 피난을 가야 하나요?"

할머니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이런 날이 올 줄 알았다만, 막상 닥치니 참으로 두렵구나."

나는 중학교 1학년으로, 전쟁이 무엇인지, 그것이 우리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가늠할 수 없었다. 하지만 어른들의 표정에서 상황의 심각성을 느낄 수 있었다.


그날 오후, 동수가 우리 집에 찾아왔다. 정숙이 그를 반겨주었다. 동수는 멋쩍게 뒤통수를 긁으며 대문 안으로 들어섰고, 우리는 마당에 앉아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었다.

"너희도 들었지? 전쟁이 났대."

 내가 말하자 정숙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아버지가 걱정이 많으셔. 피난 가야 할지도 모른다고 하셨어."


동수는 입을 굳게 다문 채 말이 없었다.

"동수야, 너희 아버지는 뭐라고 하셔?"

내가 묻자 동수는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아버지는... 그냥 조용히 계셔.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모르겠어."






얼마 후, 마을에 인민군이 들어왔다. 그들은 마을 사람들을 모아놓고 연설을 하며 새로운 세상이 열렸다고 말했다.

"이제부터는 모두가 평등한 세상입니다. 지주들의 착취는 끝났습니다."

인민군의 말에 일부 주민들은 환호했지만, 대부분은 두려움에 떨었다.

그날 밤, 동수네 아버지와 가지언니네 아저씨는 조용히 만나 무언가를 의논했다. 그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인민군의 지시에 따라 마을의 새로운 질서를 세우는 데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갑자기 고자세로 바뀐 그들의 행동은 마을 사람들에게 달갑지 않았다. 가지언니네 엄마는 이제 사람들을 아예 알아보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고, 동수엄마는 남편의 행보에 좌불안석이었다.

"동수야, 너희 아버지가 인민군이랑 같이 다니시던데, 무슨 일 있어?"

내가 조심스럽게 묻자 동수는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나도 잘 몰라. 아버지가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말씀을 안 하셔."

정숙이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아버지는 인민군이 무섭다고 하셔. 괜히 잘못 보이면 큰일 난다고."

우리 셋은 불안한 마음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애비야, 에미와 함께 이 길로 떠나거라. 내가 아이들을 데리고 있을 테니 세상이 좀 조용해지면 집으로 돌아오면 되지 않겠니? 내가 집 지키고 있을게. "

할머니가 결연한 얼굴로 말했다.

"어머니!"

엄마와 아버지가 동시에 외쳤다.

"나는 살만큼 살았고 아무리 극악한 놈들이라 해도 어린아이들에게 어떻게야 하겠는가?"

할머니는 애써 울음을 참고, 우리 다섯 자매를 보듬으며 말했다.

"에미 애비가 어디 갔는지 너희는 모르는 겨. 무조건 모른다고 해야 해. 알았지? "

엄마 아버지는 새벽을 타고 마을을 빠져나갔다. 나와 정숙이는 두려웠지만 엄마 아버지가 안전한 것이 우선이라는 생각에 얼른 멀리멀리 도망치라고 마음속으로 빌고 있었다.


할머니의 선견지명이었을까?

아침에 동수 아버지가 눈을 시퍼렇게 뜨고 우리 집을 찾았다.

"이장님, 계슈?"

나는 잠에서 덜 깬 얼굴로 방문을 열었다. 마침 할머니가 부엌에서 나오며 동수 아버지를 맞았다.

"어서 오시게. 우리 아들은 볼 일 있다고 아침 일찍 나가는 거 같던데? 무슨 일이신가?"

동수 아버지는 헛걸음한 것이 억울했던지 공연히 할머니에게 퉁퉁거렸다.

"할마씨는 알 것 없고! 들어오는 대로 나한테 기별하슈."

동수 아버지의 이전에 없던 불손한 말투에 부아가 치민 할머니가 동수 아버지를 나무랐다.

"너는 부모도 없느냐? 어디서 무슨 물이 들어가지고 에미 같은 노인네에게 함부로 하는 게야?"

"아니, 세상이 뒤집혔는데 이 노인네는 뭘 모르시나 봐?"

동수아버지는 우리 집 마당에 칵 침을 뱉은 후 빠른 걸음으로 대문을 빠져나갔다. 밖에 서있던 두 남자가 그 뒤를 따랐다.

할머니는 그의 무례함에 충격을 받았는지 머리를 싸매고 곰방대에 담뱃잎을 넣고 불을 붙였다.

"세상 말세여, 말세."


며칠 후, 마을에서 여러 사람들이 체포되는 일이 발생했다. 그들은 인민재판에 회부되어 처형되었다. 인민재판은 법적 절차 없이 동수 아버지 무리의 감정에 따라 즉결로 이루어졌다. 이러한 재판에서 처형된 주요 대상은 공산주의 이념에 반대하거나 우익 성향을 가진 정치인, 군인, 경찰 등은 '반동분자'로 지목되어 처형되었다. 또는 토지를 소유한 지주나 자본가들은 착취 계급으로 간주되어 재산이 몰수되고, 일부는 처형되기도 했다.

기독교 등 종교를 믿는 사람이나 기존 체제에 비판적인 지식인들도 탄압의 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적대 세력과 협력하거나 부역한 것으로 의심되는 인물들도 처형되었다. 이러한 인민재판은 법적 절차와 증거 없이 감정에 기반하여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아, 억울한 희생자가 다수 발생하였다. 마을 사람들은 공포에 떨며 서로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동수네 아버지와 가지언니네 아저씨는 인민군의 지시에 따라 이러한 일에 앞장서서 관여하게 되었다. 그들의 얼굴엔 이전에 없던 자신감과 사악한 웃음이 깃들어 있었다. 그들은 여러명의 장정들을 데리고 우리 집에 쳐들어와 광을 뒤졌고 식량이 될만한 것은 싹싹 긁어갔다. 그리고

아침만 되면 동수 아버지가 찾아와 확인을 했다.

"느이 아버지 오셨냐?"

"아뇨."

"어디 간다고 하고 나갔는지 말해봐."

"몰라요. 아침에 일어나 보니까 안 계셨어요."

"어떻게 눈치채고 쥐새끼처럼 빠져나갔구먼."

동수 아버지는 혼자서 중얼거렸다.


이튿날도 그 이튿날도 동수 아버지는 아침마다 우리 집에 들러서 아버지의 출입을 알고 싶어 했다.


할머니는 우리의 외출을 금했고 우리 다섯 자매와 한 방에서 생활했다. 봉숙이를 비롯해 동생들이 엄마 보고 싶다고 보채기라도 하면 정숙이가 나서서 아이들에게 기합을 넣곤 하였다.

"엄마 아버지가 씩씩하게 기다리라고 하셨는데 너희들 정말 이러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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