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이 교착 상태에 빠지면서 남북 양측은 모두 막대한 인명 피해와 자원 소모를 겪었다. 미국 내에서는 전쟁의 장기화에 따른 반전 여론이 확산되었고, 소련 역시 전쟁의 확대를 우려하여 휴전을 제안하였다. 이러한 국제적 압력과 전쟁 피로감으로 인해 휴전 협상이 시작, 1953년 7월 27일에 결국 협정이 체결되었다. 이때까지 우리는 한 사람도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 잠을 자는 중에 비행기 폭격으로 머리맡에 파편이 박히는 극적인 상황 속에서도 살아남은 우리 식구들이었다. 모두 두려웠으나 서로 한 사람 한 사람을 지켜야겠다는 마음으로 버텼다. 지킬 힘이 있건 없건 중요하지 않았다. 서로의 안녕을 눈으로 확인하면서 살아가는 그 시간들이 소중했다. 언제 죽을지 짐작할 수 없어 두려웠지만 살아있는 가족들의 눈동자를 마주하고 있다는 사실은 생존의 이유였고 힘이었던 것이다.
우리는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이사를 왔다. 서울도 폐허나 다름없었으나 휴전과 함께 미국의 대규모 경제 원조를 통해 전쟁으로 파괴된 산업 및 기반 시설의 복구와 경제 재건의 기초마련이 이곳에서부터 추진되고 있었다. 아버지는 천막으로 하늘을 가린 큰 시장에 가게를 얻었다. 방이 하나 딸려있었는데 여덟 식구가 지내기엔 턱도 없이 좁았다. 그래도 쫓기는 삶이 아니어서 좋았다. 글자를 다시 접할 수 있게 되어서 기뻤다. 가게에서 솜씨 좋은 엄마는 순대, 만두, 두부 등 팔릴 만한 먹거리를 죄다 만들어 팔았다. 맷돌에 콩을 갈아 녹두전도 만들어 갑판대위에 올렸고, 메주도 만들어 가게 허공에 매달아 두었다. 아버지는 필요한 재료를 공수해 오고 엄마가 만든 물건을 팔면서 힘쓰는 일을 맡았다.
엄마의 손은 빨랐고 쓱쓱 만들어내는 먹거리는 인기가 있었다. 시장사람들도 가게의 큰 손님군으로 자리 잡았다. 가게의 이름은 촌스럽게도 '연임이네'였다. 그렇게 가게가 정신없이 돌아가는 동안 우리는 멈추었던 교육을 다시 받을 수 있었다. 정숙이와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했고 엄마는 아들을 낳았다. 우리는 막내 찐빵이가 걸음마를 할 때까지 엄마대신 가게일을 도왔고 사람들은 정숙이가 큰 딸보다 낫다고 했다. 얼마 되지 않아 엄마는 아들 찐빵이를 업고 이전에 하던 가게 일을 고스란히 감당해 냈고, 아버지도 엄마의 등에서 무거워져 가는 찐빵이를 빼앗아 업고 일하는 날이 많아졌다. 그즈음에 큰 방이 두 개 딸리고 마당에 펌프가 있는 집을 장만하였다. 더 큰 방에서는 우리 다섯 자매가 생활했고 찐빵이는 엄마 아버지와 한 방을 쓰게 되었다. 우리는 그 방을 안방이라고 불렀다. 안타깝게도 그렇게 아들의 아들을 염원하던 할머니는 손자를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전쟁 이후 초등교사 부족을 해소하기 위해 단기 교육 과정을 운영하는 임시 교원양성소가 운영되었는데, 정숙이와 나는 그곳에서 일정 교육 과정을 이수한 후, 교원 자격 검정을 통해 초등학교 교사가 되기로 했다. 전 후 교원 수급 상황과 교육 제도의 발전 단계에 따라 시험의 범위와 깊이가 지금보다 제한적이어서 웬만큼 하면 학교에 자리 잡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나는 이수 후 검정을 통과했으나, 무엇 때문인지 쓰러져서 한동안 방안 신세를 져야 했다. 나는 기력이 없어 넘쳐나는 아이들을 상대할 자신이 없었다. 아버지는 안쓰러운 표정으로 큰 딸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말했다.
"연임아, 몸부터 챙겨라. 아직 엄마 아버지가 있잖니? 억지로 할 필요는 없다. 다른 일 하면 돼."
어이없게도 정숙이는 2년간의 교육과정을 너무도 지루하게 여긴 나머지 견디지 못하고 그만두었다. 그리고 월급도 못 받으면서 '연임이네'에 매일 출근하였다. 엄마는 몸이 약해서 탈락된 큰 딸과 그 한두 해를 견디지 못하고 뛰쳐나온 둘째 딸을 번갈아 쳐다보면서 한숨을 쉬었다. 동생들도 하나하나 졸업과 진학을 이어갔다. 가게가 확장되면서 정숙이와 순자는 가게의 빼놓을 수 없는 일꾼들이 되어갔다. 워낙 일손이 부족한 터라 쓸모없게 느껴졌던 나 역시 뭐라도 거들어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나는 이제 나 자신에 대해 어느 정도 포기한 걸까? 무엇을 딱히 하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 너무 등신 같이만 살지 말자. 밥값은 하고 살자는 생각으로 보수에 상관없이 할 수 있는 일은 하려고 애썼다.
가게가 잘 되자 정숙이는 본격적으로 엄마의 일에 손을 보탰다. 엄마보다야 솜씨가 거칠었지만 일은 막힘없이 척척 해 내었다. 엄마가 찐빵이를 데리고 집에 잠시 쉬러 들어가면 정숙이와 순자가 주방을 맡았고 아버지와 내가 손님들을 상대했다. 몸빼 주머니에 돈이 두둑이 차는 뿌듯한 즐거움이 날마다 늘었다.
그날도 엄마의 부재가운데 네 사람은 정신없이 가게를 지키고 있었는데 그날따라 손님이 많았다. 빠른 속도로 물건과 돈이 오갔고 아버지는 우리를 먼저 퇴근 시켰다. 하루 일과를 마친 가게를 정리하는 아버지를 뒤로 하고 정숙이와 순자와 나는 두둑한 돈주머니를 다른 짐인양 옷보따리 속에 숨겨서 끌어안고 바로 가게 근처에 있는 우리 집으로 향했다. 우리는 오늘의 수확을 공개하여 엄마를 깜짝 놀라게 하기로 약속을 하였다. 미닫이 문을 살며시 열고 엄마와 찐빵이가 있는 방 쪽으로 셋은 살그머니 향했다. 찐빵이를 달래는지 엄마의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계집애들은 다 소용없어. 우리 찐빵이가 최고지!"
엄마의 말소리가 너무도 또렷하게 들려왔건만 우리는 진짜 그 말이 맞는지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하였다. 그러나 세 사람 모두 다리가 풀려있었다. 또한 엄마를 깜짝 놀라게 하고자 하는의욕이 사라진 서로의 두 눈동자를 보고서야 우리 셋 각자가 들은 이야기가 확실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언니들, 언제 왔어? 배고파 밥 차려줘!"
혜자가 기척을 느꼈는지 저 있던 방에서 얼굴을 빼꼼 내밀더니, 우리를 발견하고 큰 소리로 말했다.
"다녀왔습니다."
나와 순자가 안방을 향해 말했다. 나는 돈이 든 옷 뭉치를 안방에 힘없이 내려놓았다.
"엄마, 여기에 놓을게요."
"수고했다."
엄마는 찐빵이에게서 눈길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둘째 언니, 어디 아파? 얼굴이 왜 빨개?"
혜자가 정숙이의 팔에 매달리자 정숙이가 혜자에게 소리쳤다.
"쓸모없는 계집애가 손이 없냐, 발이 없냐? 배고프면 차려 먹을 일이지. 힘들게 일하고 온 언니들을 부려먹을 셈이야?"
아버지가 집안으로 들어 설쯤에는 정숙이로부터 시작하여 나와 순자까지 불손한 태도에 대하여 엄마에게 기나 긴 훈계를 듣고 있었다. 혜자는 울고 있었고 정숙이는 밥도 먹지 않았다. 순자와 나는 가게에서 가져온 몇 가지 반찬을 내어 서둘러 저녁을 준비했다. 밥상을 안방에 들이고 엄마 아버지의 눈치를 살피면서 밥을 삼켰다. 눈물 범벅이 된 혜자만이 큰 밥숟가락으로 연신 밥상을 탐했다. 난생 처음으로 이렇게 적막한 밥상머리라니 머릿속이 아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