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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혜력 Dec 09. 2024

잊히면 안 되는 이름 - 14화

"우리는 누군가의 가슴속에 깊이 새겨질 이름을 가지고 있다."


산 자와 죽은 자

1950년 7월,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우리는 그렇게 모든 것을 뒤로한 채 피난길에 나섰다. 이전에 들어본 적이 없는 폭격 소리와 불타는 마을의 잔해들이 기다리고 있는 줄도 모른 채, 우리는 숲길을 따라 부러질 것만 같은 발가락을 꼼지락 거리면서 꾸역 꾸역 걸었다. 할머니는 기운 없는 목소리로 염불을 중얼거렸고 살아있는지가 의심스러울 정도로 무서운 얼굴을 한 채 버티고 있었다. 엄마는 정숙이를 앞세우고 어린 여동생 셋을 번갈아 업으며 힘겹게 걸음을 옮겼다. 나는 맨 뒤에서 마지막 짐을 끌어안고 따라갔다. 모두의 입술은 말라붙고, 갈증으로 목구멍이 바싹바싹 타들어갔다. 나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감각 없는 발을 간신히 떼어 놓으며 말했다.     

”나는 두고 가요. 나는 여기서 그냥 쓰러져 죽을 테야. “     

가는 길에 여기저기 늘어져 있는 끔찍한 주검들을 치워가며 길을 내고 있던 아버지가 더 이상 못 보겠는지 할머니를 업고 내 손을 끌어 한참을 가다가, 다음엔 나를 업은 채 할머니를 부축하기를 반복하였다.      


한 때는 자신의 의견이 있었을 터이고 배고픔도 느꼈을 것이며,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할 일이 있었을 사람들이 한 낱 쓰레기만도 못하게 군인들에게 또 도망자들의 발길에 짓 밟히고 있는 이 절망적인  

숲길이 끝나갈 무렵, 저 멀리서 무거운 자루를 낑낑대며 끌고 오는 두 사람이 보였다. 그들은 붉게 잘 익은 토마토와 신선해 보이는 오이가 담겨있는 자루를 들고 있었다. 적어도 목마름에 지친 우리 가족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오이도 토마토도 뜨끈거렸을 것인데 한 입 베어 물면 그대로 시원한 즙이 입안에 가득 돌 것만 같았다.     

"어머니, 저기 오이랑 토마토가 있어요!"      

정숙이가 먼저 소리쳤다. 여동생들은 엄마의 옷자락을 붙잡고 서서 안간힘으로 참아온 울음을 터뜨렸다. 엄마는 이내 걸음을 재촉했다.      

“여보세요, 잠깐만요!”      

엄마의 다급한 외침에 두 사람은 멈춰 섰다. 두 남녀의 얼굴에는 피난민들의 절박함과는 다른 여유와 탐욕이 묻어나 있었다. 그들은 엄마의 마음의 소리라도 들은 것처럼 대뜸 대꾸를 했다.     

“오이 하나에 50 , 토마토 하나에 100 이요.”      

남자는 뻔뻔하게 말했다. 그 액수는 우리 같은 피난민들에게는 터무니없이 비싼 금액이었다. 엄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니, 전쟁 중에 이렇게 비싸게 팔면 어떡합니까? 목마른 사람들이 한 두명이 아닐텐데!”      

엄마가 따지듯 물었다. 그러자 남자의 아내인 듯한 여자가 손을 휘저으며 비웃듯 대꾸했다.      

“이걸 구하려고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기는 하믄서? 싫으면 안 사면 그만이지.”     

정숙이는 화가 나서 엄마의 뒤에서 발을 굴렀다.      

“엄마, 그만둬요! 저 사람들한테 뭐 하러 사요!”      

그러나 어린 여동생들은 이미 눈물을 쏟고 있었다.      

“엄마, 나 목말라…”      

여동생 중 막내는 바싹 마른 목소리로 엄마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엄마는 갈등에 잠시 말을 잃었다. 아버지는 엄마에게 실랑이하지 말고 오이 하나씩 입에 넣어 다들 기운을 내자는 듯한 가벼운 눈짓을 보냈다. 엄마는 이내 치마 속곳 주머니를 뒤져 감춰 두었던 지폐 뭉치를 꺼냈다.     

“여기요! 오이하고 토마토 10개씩 줘요.”

엄마의 말은 곱게 나가지 않았지만 목소리엔 이것들이라도 구할 수 있게 된 것에 대한 안도감이 더 크게 담겨져 있었다. 여자는 돈을 받자마자 그제야 만족했는지 선심을 쓰듯 제법 큰 것들로 토마토와 오이를 골라 주었다.

오이와 토마토를 받아 든 순간, 어린 여동생들은 그 자리에서 서로 손을 뻗어 달려들었다. 한 입 베어 문 오이에서 맺힌 물이 입술을 적실 때, 그 청량함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      

“맛있다…”      

순자는 오이를 두 손으로 움켜쥐고 연신 울먹이며 말했다. 나 역시 이렇게 뜨뜻한 오이의 즙이 이렇게 달게 느껴진 적은 처음이었다. 모두 오이와 토마토에 정신이 팔려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우걱우걱 두어 번 씹었는데 오이 하나가 그냥 사라졌다. 토마토 하나는 아버지 입속으로 한입에 들어가는 듯했다. 아버지의 그런 모습이 많이 낯설었다. 항상 여유 있는 아버지가 오늘은 도망자들의 우두머리가 되어 있었다.            

어떻게 된 것인지 숲이 끝나자 기대했던 평화로운 마을이 아닌 폭격에 주저앉은 여러 채의 집들이 보이는 작은 마을이 나타났다.

왜애앵~

어디서 나타났는지 비행기가 낮게 날았다. 아버지는 우리를 모두 엎드리게 하고 얼글을 땅으로 향하게 했다. 비행기의 소리는 실로 두려움 그 자체였다. 우리는 죽은 듯이 엎드려 있었다.   

“미국 비행기야. 적군이 있나 살펴보느라 낮게 날아. 가끔 적인지 아군인지 민간인인지 구별을 못 할 때가 있으니 항상 조심해야 한다.”     

멀리 사라져 가는 비행기를 눈으로 경계하며 아버지가 우리에게 말했다.     

“비행기 소리 땜시 지명에 못 죽겄다.”

할머니는 귀가 먹먹한지 손가락으로 연신 귀를 후비면서 말했다. 엄마는 놀란 아이들을 끌어안고 달래고 있었다. 정숙이는 고개를 끄덕인 후, 주변을 한 번 두리번거리더니 아버지에게 소리쳤다.     

“아부지, 저기 그래도 멀쩡한 집이 한 채 있어요.”     

아버지는 정숙이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으로 먼저 다녀오겠다 했다. 우리는 걱정스러운 마음에 눈으로만 아버지의 뒷모습을 좇았다. 아버지가 집안으로 들어가는 듯하더니 손짓을 하여 우리에게 오라는 시늉을 하였다.      

빈 집이었다. 그래도 기와집이었는데, 이 집도 일부는 폭격에 허물어져서 온전하지 못했다. 어느덧 어둑어둑해지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더 어두워지기 전에 엄마에게 주먹밥을 조금씩만 나눠먹고 내일을 위해서 잠을 자두 자고 했다. 동수네서 얻어온 주먹밥에서는 쉰내가 나는 것 같았지만 그런 걸 가릴 형편이 안되었다. 할머니는 완전히 쉬어버리기 전에 아이들에게 충분히 먹이는 게 좋겠다고 했다.      

마당에 장독이 묻혀 있었다. 우리집 마당에 묻혀 있던 큰 쌀독이 생각났다. 아버지가 뚜껑을 여니 신 김치 냄새가 훅 올라왔다. 이 신 김치 냄새는 우리들의 식욕을 더 자극해 버리고 말았다. 안을 들여다보니 냄새만 요란하고 내용물은 거의 없었다. 엄마가 팔을 걷어붙이고 맨 손으로 김치 잔재들을 집어 올려서 우리들의 입속에 한쪽씩 넣어주었다. 맙소사! 지금껏 먹어 본 김치 중에서 가장 맛이 좋았다! 이런 게 꿀맛이라고 하는 거다! 죽지 않길 잘했다고 생각하면서 사람 마음이 참 간사하게 여겨졌다. 아버지는 집안 살림이 여기저기 흩어져 어지러운 이 곳에서 제일 큰 방을 찾아내었다.  나는 방에 들어가자마자 바닥으로 구르듯이 몸을 던졌고  팔을 베개 삼아 누웠다. 바닥이 우리의 체온을 빨아들여 험한 도보에 달궈졌던 몸을 잠시나마 식혀 주었다. 모두들 피곤했는지 언제 잠들었는지도 모르게 정신을 잃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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