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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쓰리 May 15. 2024

일본 출장 에피소드 #1 - 도쿄에서 팽 당할 뻔

의전 베테랑의 도쿄여행 고군분투기

보스와 오랜 친분이 있는 캄보디아 귀빈분들이 서울이나 도쿄에 개인적으로 오실 때면 내가 의전을 담당할 때가 있다. 나도 보스 따라 20년쯤 뵈어 온 분들이라 그분들의 취향을 잘 알고 있으니 내게 가이드를 부탁하는 것이다.


작년 가을 캄보디아 귀빈분들의 도쿄 일정에 동행했다.이 귀빈은 내가 아는 분 중 취향이 가장 까다로운 분에 속했다. 취향이 까다롭다는 말은 물질적으로 아쉬울 것 없는 삶을 살고 계시니 기대를 만족시키기가 쉽지 않다는 뜻이다. 내가 아는 이 분의 취향으로는 라이카 카메라, 리모와 캐리어, 샤토 오브리옹 와인이 있다. 골프치실 땐 항상 이탈리아 가죽으로 된 신발을 신으시는데, 한 번도 일반적인 골프 슈즈를 신으신 것을 본 적이 없다. 남들과 똑같은 것은 즐기지 않으시는 것이다.


사실 일본여행은 올해 초 벚꽃 시즌에 갈 예정이었다. 보스와 귀빈의 일정이 정해지고, 당시 우리 비서실 직원 S가 여행 준비를 담당했다. 그녀가 일행분들의 일본비자 신청을 진행하던 중에 문제가 생겼고, 대사관 인터뷰를 2번이나 했으나 비자 발급이 최종 거부되고 말았다. 비자가 거부되면 향후 6개월간 재신청은 불가능했다. 귀빈은 크게 실망하셨다. 그 후로 보스를 만나실 때마다 S가 일처리를 잘 못해서 일본을 못 갔다고 푸념하셨다. 가끔 전화를 드릴 때면 내게도 같은 말씀을 하셨다. 귀빈은 보스에게 앞으로 당신과 미팅할 때 비서 S는 데려오지 말라고 하셨다. 그녀는 그 일로 귀빈의 눈 밖에 나버렸다. 귀빈은 소리 지르며 화내시는 일은 결코 없지만, 한 번 아니면 절대 아닌 분이었다.


지난해 가을 귀빈께서 전화하셨다.

“Ms. Lee, 지금 도쿄 날씨가 어떻지?”

“덥지도 않고, 춥지도 않고 딱 좋습니다.”

“그래? 그럼 이번 여행은 Ms. Lee가 좀 준비해 주겠나? Ms. Lee가 같이 가주면 걱정이 없겠는데.”

“네, 알겠습니다.”


이번엔 귀빈분들의 비자가 문제없이 발급되었고, 출발일정 변경이나 인원 변경 등 소소한 변경사항들이 발생했으나 모두 빠르게 처리할 수 있었다. 나는 한국에 체류하고 있었지만, 귀빈분들과 함께 출발하기 위해 프놈펜으로 날아갔다. 도쿄까지의 항공일정은 싱가포르에서 1시간 경유하는 것으로 예약했는데, 라운지에 들를 시간도 없이 짧았던 경유시간을 아주 만족해하셨다. 돈보다 시간이 더 중요한 분들이었기 때문이다.


일본여행의 시작은 순조로웠다. 여행 첫 사흘은 보스가 소유한 골프장에서 라운딩을 하며 쉬는 것이었다. 사흘간 골프를 친 뒤, 도쿄로 이동해서 관광을 하시겠다고 했다. 이런 귀빈분들의 일정엔 변수가 많다. 귀빈의 컨디션에 따라, 돌발상황에 따라 신속하게 대처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골프장에서의 일정은 내가 신경 쓸 것이 거의 없었다. 문제는 도쿄로 이동한 다음부터였는데, 쇼핑은 필요 없고 새로운 경험을 해보고 싶으시다며 모든 일정은 내가 알아서 짜라고 하셨다. 우선 3박을 하셔야 할 호텔을 예약해야 했다. 보통 호텔마다 스위트룸은 몇 개씩 남기 마련인데, 이상하게도 대부분의 5성급 호텔이 스위트룸까지 만실이었다. 알고 보니 도쿄일정 첫 이틀이 하필 일본의 휴일이었다. 아이고. 가는 날이 장날이군. 남아있는 몇 개 안 되는 일반 객실조차 1박에 100만 원을 훌쩍 넘겼다. 보스에게 급히 상황을 보고 드렸으나, ”하룻밤 자는데 100만 원 넘게 주는 건 안 된다. 5성급 호텔이 안 되면, 4성급 호텔이라도 예약해라. 괜찮다“라고 하셨다. 아이고. 마시면 사라지는 와인도 샤토 오브리옹만 드시는 분인데, 4성급 호텔이 웬 말인가요.


여행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호텔이었고, 귀빈께 4성급 호텔은 안 될 말이었다. 도쿄 시내 5성급 호텔을 샅샅이 뒤져서 잔여객실을 알아봤다. 객실 크기가 넓고, 시내에서 가까운 조건을 붙이니 딱 두 호텔의 스위트룸만 남았다. The Okura HotelKimpton Shinjuku Hotel. 전자는 유서 깊은 일본식 호텔로 신라호텔의 모티브가 된 곳이라고 했다. 후자는 오픈한 지 3년 된 따끈따끈한 뉴욕 스타일 호텔이었다. 숙박비는 전자가 더 비쌌다. 후자는 그나마 100만 원대 초반이었다. 호텔비는 우리가 지불해야 할 것으로 예상했으니, 보스는 The Okura Hotel은 너무 비싸서 안 된다며, 후자로 예약하라고 했다.


사흘 내내 골프장에서의 일정이 끝나면 나는 저녁 내내 인터넷 검색으로 도쿄에서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알아봤다. 미술관, 박물관, 정원, 전시회, 맛집, 카페, 헬기 타고 관광하는 코스 등 닥치는 대로 정보를 수집했다. 의전할 때는 상황이 수시로 바뀌기 때문에, 최대한 많은 정보를 수집해 두고 상황에 맞게 일정을 조정하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호텔은 Kimpton으로 이미 예약해 두었지만, 혹시 몰라 다른 호텔들의 잔여객실 상황도 수시로 체크했다.


골프장에서의 일정이 끝나고 도쿄로 이동해야 하는 날 아침이 밝았다. 귀빈을 모시는 차량의 운전은 와타나베상이 맡기로 했다. 젠장. 그는 회사 내에서 싸움닭으로 통할 만큼 무례하고 무책임한 면이 있는 사람이었다. 운전사의 선택은 내가 관여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으므로, 어쩔 수 없었다. 그에게 우리가 방문할 곳들의 목록이 적힌 A4 종이를 건네주고, 맨 위에 적힌 호텔로 가달라고 했다. 우리 호텔은 신주쿠에 위치했는데, 긴자 거리를 달리고 있는 그에게 “호텔 잘못 온 것 같아요. 이 지역이 아닙니다”라고 했으나, 그는 연신 “주소 제대로 입력했습니다. 거의 다 왔습니다.”라고 했다. 망할. 목록에 적힌 맨 위 호텔이 아닌 맨 아래 적힌 주소지로 잘못 입력한 것을 그는 끝끝내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없었다. 잠시 차를 세워 주소지를 다시 제대로 입력하고 다시 출발했다.


Kimpton 호텔은 신주쿠 대로변 코너에 있었는데, 그는 호텔 입구를 놓치고 신주쿠 뒷골목을 두 번이나 빙빙 돌았다. 귀빈께선 운전기사가 신주쿠 뒷골목을 도는 것을 보고 형편없는 호텔을 예약했다고 생각하신 듯했다. 호텔에 도착했으나, 설상가상 호텔 로비는 아주 좁았고 체크아웃하는 사람들로 인산인해였다. 귀빈께서는 로비 안으로 들어오시지도 않고, 호텔 밖 도로에 서 계셨다. 호텔을 마음에 들어 하시지 않는 것이 분명했다. 안 되겠다 싶어 보스에게 급히 전화를 걸었다.


“회장님, 귀빈께서 호텔을 마음에 안 들어하십니다. 호텔 바꿔야겠습니다.”

“그래? 일본이 지금 연휴라서 방이 없어서 그렇다고 잘 설명드려.”

“네.”


통화를 끝내고 급히 The Okura Hotel에 전화를 걸었다. 다행히 스위트룸이 두 개 남았다고 했다. 휴, 하늘이 나를 버리진 않으셨군. 잠시 후 귀빈 일행분께서 다가오시더니, 나지막이 말씀해 주셨다. 귀빈분은 파리에 가시면 늘 포시즌스에 묵으신다고. Four Seasons 호텔이라구요. 호텔 컨시어지에 요청하면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보다 어렵다는 슈퍼볼 티켓까지 구해준다는 그 어마어마한 호텔말인가요. 파리라면 1박에 400만 원도 넘을 텐데. 그런 분께 보스는 4성급 호텔도 괜찮으니 찾아보라고 하셨지. 망할. 순간 보스가 원망스러웠으나, 그럴 시간도 없었다. 당장 이 일을 수습해야 했다. 안 그러면 나도 S처럼 팽 당하고 말 테니. 정신 바짝 차리자.


귀빈께서 어느샌가 옆으로 오셔서 말씀하셨다.

“Ms. Lee, 이런데선 하루도 못 있어. 인터컨티넨탈이나 힐튼 호텔로 갑시다. 거기가 객실이 넓고 괜찮아.“

“네, 확인하겠습니다.”


어젯밤까지 확인인 바로는 귀빈께서 말씀하신 두 호텔도 모두 만실이었다. 혹시 몰라 호텔에 바로 전화해 봤으나, 역시 두 곳 모두 만실이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말씀하신 두 호텔 모두 만실입니다. Okura Hotel에 스위트룸이 가능합니다. 그곳으로 모시겠습니다.”

반쯤 나가던 정신을 동여매고 일을 수습했다. 내렸던 짐을 다시 차에 싣고 Okura Hotel로 향했다. 귀빈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실망하신 기색이 역력했다.


“그 호텔 가봐도 여기랑 별반 다르지 않을 것 같은데… 근데 왜 아까 그 호텔로 예약한 거지? “

보스가 내린 결정이라고 대답할 순 없었다.

“포시즌스, 페닌술라. 인터컨티넨탈, 만다린 오리엔탈, 샹그릴라, 힐튼 호텔 모두 만실이었습니다. 이 호텔이 3년 전에 오픈한 미국 부티크 호텔 체인인데, 5성급 호텔이어서 예약했습니다.”

사실이었다. 귀빈이 잘 아실만한 비싸고 유명한 호텔 이름을 먼저 말씀드리며 마음을 누그러뜨리시길 바랐으나, 별로 통하지는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음… 그런 곳은 5성급이라고 볼 수 없어. 지금 가는 호텔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것 같은데… 우리 귀국하는 거 수요일 말고 내일로 앞당겨줘. 그냥 돌아가는 게 낫겠네.”

“우선 오쿠라 호텔 가보시고 결정하시지요.”


머릿속에서 사이렌이 울려댔다. 비상상황이었다. 등 뒤엔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호텔 하나로 도쿄 여행을 말아먹는구나. 나도 이렇게 팽 당하는 건가. 등등 별별 생각이 머릿속을 헤집었다. 오쿠라 호텔은 나의 플랜B였다. 비싸다고 보스에게 반려당했지만, 귀빈의 취향엔 역시 Kimpton보단 Okura가 더 맞을 거라 생각해서 어젯밤까지 잔여객실을 체크하고 있던 터였다. 이 상황에서 오쿠라 호텔에도 실망하시면 또 다른 플랜C는 없었다. 나는 팽 당하고, 귀빈께선 당장 내일 돌아가시는 재난적인 엔딩뿐.


하지만 한편으론 이상하게도 한 번도 묵어본 적 없는 오쿠라 호텔에 대한 강한 신뢰감이 들었다. 귀빈께서 이 호텔도 마음에 안 들어하시면, 그건 내 잘못이 아니라 오쿠라 호텔 잘못이라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나도 S처럼 귀빈께 팽 당하느냐, 아니면 살아남느냐.

오쿠라 호텔 도착까지 약 10분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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