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카페에서 누군가 보내는 쪽지가 소통의 창구가 되었습니다. 물론 저는 이성애자에 남편과 자식까지 있으니 남성을 대상으로 소통하진 않았어요. 다행히 상대는 여성에 제 또래였고, 많은 정보를 묻기보다 서로 오늘은 괜찮은지 감정을 위주로 대화했습니다.
공개적이지 않았던 점이 끌려서 소통을 시작했던 거지만 시간이 갈수록 이 소통에서 얻을 수 있는 게 과연 무엇인지 정의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매일 같은 질문과 누군지도 잘 모르는 타인이기 때문에 안부를 묻고 걱정하는 게 질리고 불편해졌습니다. 동시에 카페에서 게시글을 올려도 무반응이 수두룩해 카페를 떠나고 싶어졌어요. 올렸던 게시글을 전부 지우고 카페 탈퇴에 쪽지의 답장도 하지 않게 되었죠.
이어 세 번째 방문한 병원. 이미 병원에 오는 의미가 상실되었다고 느꼈습니다. 비난할 생각은 없지만, 의사 선생님에게는 제가 그저 약 처방만 해주면 되는 환자로만 보시는 게 느껴졌거든요. 그 후에 한 달하고도 보름 뒤, 어쩔 수 없이 약 처방을 받으러 네 번째 방문으로 병원 방문을 완전히 끝냈습니다. 그만큼 도움받기엔 어려웠던 거였죠. 운전 중에 생기는 사고도 없었기 때문에 더더욱 갈 필요도 없었죠.
피폐하고 공허해지는 나날.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 며칠 동안 폭식을 했다가 심하게 구토 후 식음을 전폐하는 날도 생겼습니다. 점점 더 무기력해지고 행동도 느려지는데 머리는 온통 죽음에 관한 생각뿐이었죠.
그러다 문득 생각난 다른 사람들의 자해 사진. 그렇게 자해를 하면 살아있는 느낌이 든다는데 나는 어떨까 궁금해졌어요. 그런데 웃긴 점은 제 몸에 상처를 내는 건 너무 아프고 두려운 일이기 때문에 날카로운 물건으로 생채기 낼 용기는 없더라고요. 자해하는 다른 방법을 검색해보다가 이로 팔을 물었다는 다른 사람의 얘기를 듣고 바로 시행해 봤습니다.
하다 보니 피멍이 살짝 들 때까지 꽉 물었더라고요. 그래도 그렇게 해소가 조금이라도 되는 걸 깨닫고 가끔 그런 식의 자해는 혼자 있을 때만 했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이나 남편이 볼까 봐 항상 긴 소매로 가리고 다녔죠. 날씨가 추웠기 때문에 아주 자연스럽게 생활할 수 있었습니다. 눈에 띄는 상처도 아니었으니까요.
그렇게 매일 먹던 약도 띄엄띄엄 먹게 되면서 약의 효능을 더는 못 느끼게 되고, 나아지지 않고 더욱 심해로 끌려가는 느낌에 놓인 상태와 거의 정상에 가까운 상태로 변환되어 유지되는 시간이 늘어났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저는 나름의 살려달라는 신호를 계속 내보냈지만, 아무도 잡아주지 않았습니다. 그러기 쉽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제 속을 자세히 잘 보고 다독여 줄 사람이 너무도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남편한테 더 심하게 굴었던 것 같아요. 남편도 힘들었던지라 서로 좋은 말이 전혀 없었죠.
남편과의 말다툼이 계속 머리에서 맴돌았고, 결국 남편이 없고 아이들이 있는 시간에 집에서 충동적인 자살 시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화장실에서 목을 매달 생각으로 튼튼한 전선을 가지고 목을 걸고 있었는데, 화장실 문을 제대로 못 잠가서 아들이 들어왔죠.
“엄마 뭐해요? 나 저거 게임 하고 싶어!”
자기 할 말만 하고 가는 5살 같은 7살의 느린 아들. 맥이 탁 풀리면서 그 차가운 바닥에 힘없이 주저앉았습니다.
‘너무 멍청한 시도를 했구나.’
‘지금까지는 가만히 두더니 왜 중요할 때 방해하는 거지?’
위와 같은 생각들이 엉키기도 하고 연쇄적 반응을 일으켰어요.
순간 아들이 미워 보였고 제가 너무도 못나 보였어요. 그리고 더는 힘이 나지 않아 그냥 몇 분 동안 아무것도 안 하고 계속 그 차가운 화장실 타일 위에 앉아 있었어요.
‘힘들어도 상황이 날 놓아주지 않는구나.’
‘죽고 싶어도 더 실행할 힘이 부족하구나.’
그런 사실들을 깨닫고 다시 한동안 이승 떠도는 귀신처럼 지냈어요. 물론 가족들 앞에선 정상처럼 보이려 무지 애썼습니다. 제가 가족들에게 다른 자극을 받아서 더 아프기는 싫었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