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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틀루이스 Mar 11. 2024

나는 누구인가?

요즘은 사춘기가 더 일찍 온다고들 하는데, 

중학생 정도가 되면, 혹은 사춘기가 오면 많이 하게 되는 질문이 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하는 질문입니다.     

독자들 중에도 이런 질문을 해봤던 분도 계실 것이고 이제껏 이런 질문 없이 살아오거나,

그렇게 있는 그대로 살아가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어쩌면 아직까지도 존재론적 질문을 하고 계신 분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은 과연 이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이 글을 읽는 지금 짧게 30초 동안만 도대체 나는 누구인지 생각해보십시오.     


생각이 잘 안 되신다면 누군가가 여러분에게 ‘당신은 누구십니까?’하고 물어봤다고 가정하고, 그에게 어떻게 대답을 할지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나를 어떻게 소개해야 할까?’

‘나는 누구일까?’     




한 번 생각해보셨나요.     


우리가 상대방에게 자신을 소개하려 하면 상당히 객관화된 정보를 상대방에게 제공합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1. 저는 마케팅 대행 회사를 다니고 있고 거기서 신규 고객사를 끌어오는 영업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2. 쉬는 날에는 운동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 중에서 특히 중장거리 달리기를 자주 합니다.

3. 음식 중에서는 일식이랑 한식을 좋아하고, 특히 초밥을 아주 좋아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생각을 하셨나요? 위의 내용이랑 얼추 비슷하게 생각하셨나요?     


우리가 자기소개를 할 때 객관화된 정보를 전달하는 이유는 듣는 사람이 이해하기가 수월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별다른 추가적인 설명이나 경험이 없더라도 내가 말하는 바를 상대가 가장 빨리 캐치할 수 있기에 우리는 객관화된 이야기를 합니다.     


혹은 앞서 말한 달리기, 초밥과 같이 객관적인 정보가 아니더라도 사람들이 많이 알고 또 공유하는 내용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예로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일에서 가치를 찾아내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릇을 닦더라도 그 활동을 하찮게 여기는 게 아니라 그 그릇을 깨끗이 닦는 것이 내 몸에도 이롭고, 내 마음에도 이롭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하더라도 사람들이 이해하고 공감하는 이유는,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지키는 것이 유익하다는 암묵적인 동의가 상호 간에 맺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타인이 옳게 여기는 것(옳게 여기지 않더라도 타인이 이해할 수 있는 것) 한에서 자기 자신을 표현해내려고 합니다.     


미디어가 점차 발달하고, 여러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또 다른 여러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나 자신 또한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고 싶은 면만을 보여주는,

그런 세상을 우리는 지금 살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우리는 스스로에 대해서 생각할 때도 앞서 말한 것들을 기준으로만 생각하게 되어버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여타 다른 사람들이 이해하고, 공감하고, 좋게 여기는 것들로만 자기 자신에 대해 규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한 가지 빠진 것이 있습니다.     


바로 ‘고유함’입니다. 


하나 밖에 없는 ‘유일성’ 말입니다.     


객관성을 가지고 나 자신을 설명한다는 것, 다른 사람들이 동의할 만한 것을 가지고 나 자신을 설명하는 일에는 ‘정말 오직 나만이 가지고 있고 나한테 밖에 없는 유일한 것’이 빠져 있게 됩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 내가 가치 있게 여기는 것들, 심지어 사람들이 악하게 여기는 것이지만 내가 몰래 하는 것들 또한 누군가가 ‘이미 했거나, 하고 있거나, 하게 될 것들’인 것입니다.      


나 자신은 세상에 하나 밖에 없는데, 그 하나 밖에 없는 나 자신을 아무리 설명하려고 하더라도 결국은 다른 사람들도 다 하고 있는 것들을 가지고 밖에 설명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 자신은 결국 ‘타인이 하는 일을 하고, 타인이 좋아하는 것을 똑같이 좋아하고, 타인이 옳게 여기거나 그르게 여기는 것을 행하는 사람’으로 한정 되어버리고 마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다른 사람에게 있지 않은, 

다른 사람이 가지지 못한 우리 각자만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독자 여러분 각자가 이웃들과 맺고 있는 ‘관계’입니다.

‘우리 가족, 나의 친구, 나의 지인’은 제 아무리 유능한 사람이라도 절대로 똑같이 따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관계에 대하여     

관계는 크게, 선택에 의한 관계와 선택하지 않은 관계가 있습니다.

선택하지 않은 관계는 부모님과 자식 간의 관계가 대표적입니다.

선택의 관계는 친구, 동호회 등을 들 수 있겠네요


그렇다고 모든 관계가 선택하는 것과 선택하지 않은 것으로 나뉘지는 않습니다.

선택하고 싶지 않지만, 맺어가야만 하는 관계도 있습니다.


때에 따라 이 (선택하고 싶지 않지만, 맺어가야만 하는) 관계가 많은 분도 계실 것입니다.     


이 관계들이 본인에게 좋든 그렇지 못하든 그 형태나 상황이 어떠하든지, 

이것은 이 세상 다른 사람들이 지니고 있지 못한 각자 만의 ‘고유한’ 것들입니다.     


고유한 것이 꼭 내 기분과 느낌에 좋아야 한다고는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왜냐하면 아무나 쉽게 끼어들 수 없는 가까운 사이일수록 서로를 더 쉽게 상처 입힐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몸이 아픈 것, 경제적으로 어려운 것, 권력이나 명예를 잃는 것보다 사람을 더 힘들게 하는 것은, 

내가 나를 다 주고도 아깝지 않은 사람에게서 받는 상처입니다.     


그것이 너무나도, 너무나도 고통스럽기 때문에 우리 안에는 ‘자기 중심적 사고’가 수시로 발전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또 그에 대한 이야기들이 ‘나를 더 생각하라는 메시지가’되어 현재 미디어에 자주 노출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내가 나를 다 주고도 아깝지 않는 사람에게서 받는 배신과 상처는 말도 못하게 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에게 다시금 다가서려 하는 것은 ‘나 자신이 죽는 것 같은’ 고통을 느끼게 됩니다.     

그 누구도 쉽게 범접할 수 없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유대는 여타 다른 사람은 가질 수 없는 고유한 것이겠으나 그것을 가지기란 가시밭길을 걷는 것과 같은 고통과 역경의 시간을 필요로 하게 되는 것입니다.     


깊고 고유한 관계라는 것(깊은 애정과 신뢰를 지닌)은 한 순간에 생기는 것도 아니며, 또 매일 하하호호 웃으면서 지낸다고 생겨나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서로 맞물려 돌아가지 않는 부분이 깎여나가고, 짓이겨지는 과정을 지나야만 하는 것이지요.

(다퉈본 적 없는 사이는 아무리 서로 분위기 좋아 보이더라도 한 번의 다툼으로 끝나버릴 수 있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굳이 그 노력을 기울이면서 ‘관계’라는 것을 유지하고, 깊고 고유한 관계를 만들어야 할 이유가 도대체 어디에 있을까요?     


우리는 그 답을 우리 모습 가운데서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과연 누가 다른 사람 없이, 타인 없이 살아갈 수 있을까요?     


정서적으로 우리는 다른 사람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으며,

모든 것을 뒤로 하고 은둔해버린 사람이라 할지라도 타인이 만들어낸 언어, 기술, 문화가 없으면 삶을 영위할 수 없습니다.


언어가 없는, 옷이 없는, 인류가 구축한 삶의 패턴 없이 살아가는 인간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니라 자연 속의 짐승이겠지요.     


우리는 타인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또한 우리가 찾고 추구하고 쟁취하려 하는 모든 것들은 타인이 없이는 그 ‘가치’가 실현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이 없다면 도대체 우리가 살면서 이 온갖 고생을 해야 할 필요가 어디에 있을까요.     


그 어느 것보다 삶을 가치 있게 하는 것은 이웃과의 깊은 관계입니다.     


그러나 그 깊은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동력은 나 자신 스스로에게서는 나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내 안에 있는 자아는 오직 나 자신이 중요하다고 늘 외쳐대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만을 중시하는 것도 아닌, 그렇다고 타인에게 전부 맞춰주는 것만도 아닌

관계를 중요시하기에 자존심을 내려놓고, 인내하고, 또 잘못된 부분에 대해서는 용기를 내서 애써 전달하기도 하는 이러한 마음은 ‘인본주의적 사고 바깥에서’ 얻을 수 있습니다.     

(인본주의적 사고 바깥이라고 표현했지만, 어쩌면 깊은 안쪽이라고도 이야기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쨌든 인간이, 사람이, 이웃이 중요하다는 사고는 ‘인본주의’가 있기 전부터 있어 왔습니다. 사람의 안전이 중요하다는 의식이 ‘이미’ 우리 내면에 있었기에 안전과 관련한 법령이 만들어지듯이, 가족과 이웃이 중요하다는 의식이 ‘이미’ 우리 내면에 자리하고 있기에, 인본주의적 사고를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야기를 정리하려 합니다.     

나는 누구인가 하는 질문으로 시작했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나 자신을 규명하는 내용들은 다른 사람들 또한 비슷하게 하는 것들이라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만약 우리가 노력을 기울여 지금보다 더 많은 것을 이루더라도     


여전히 세상에는 돈 많은 사람은 많이 있으며, 

재물을 가진 사람도 많고, 성취를 이룬 사람도 정말 셀 수 없이 많을 것입니다. 


세계 여러 곳을 여행한 사람도 많이 있으며, 

재판관, 대통령, 항해사, 예술가 등등 세상 수많은 직종에 수많은 사람들이 종사 했고, 종사하고 있고, 종사하게 될 것입니다.

(재물이 여러분 자신이 아니며, 직업이 여러분 자신이 아닙니다. 그와 반면 경험은 나 자신을 표현하는 것에 재물과 직업보다 더 또렷한 도구일 수 있습니다만, 관계만큼 명료하지는 못합니다. 만약 경험과 관계가 결합된다면 그만큼 생동감 있고 또렷한 여러분 자신을 찾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없는 것이 있으니, 바로 여러분이 지금 맺고 있는 관계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근래 많은 사람들이 가고 있는 ‘단절’의 길로 갈 수도 있으며     

오직 여러분만, 본인만이 맺을 수 있는 깊고, 은은하고, 신뢰 있고, 사랑하는, 다른 사람들이 끊으려야 끊을 수 없는 그 이상으로 넘어설 수 있습니다.


단절로 넘어가려 하는 관계를 회복하는 법은 나 중심의 생각을 뒤로 물러서게 하는 것이며, 그렇게 먼저 손 내밀고, 억울해도 인내하고, 상대를 용서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무나 할 수 없는, 

부자나 권위자도 하지 못하는 여러분만의 특권이고 능력입니다.     


나 자신이 죽기까지 사랑하라는, 

그렇게 참된 삶을 얻고 그 삶을 살라는 메시지는


오직 한 곳에서만 얻을 수 있습니다.

사랑할 수 있는 힘도 그곳(여러분의 진짜 집)에서만 얻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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