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에게
K는 대학 선배였다.
당시 과 선배들에게 딱히 큰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제대 후 복학한 뒤로도 K와는 접점이 없었다.
그는 젠틀한 옷차림으로 늘 대학교 흡연 벤치에 앉아서 담배를 피웠다. 나와 K는 그저 흡연벤치에서 마주칠 때마다 까딱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는 학과 사람, 그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오토바이가 내 관심을 끌었다. 흔히들 말하는 '자유로운 영혼'인 탓에,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을 지도 모른다. 오토바이 유튜브 채널을 구독하고 정보를 긁어 모았다.
대학생 신분에 무슨 돈이 있으랴. 어찌저찌 100만 원 남짓한 클래식 바이크를 장만했다. (아뿔싸, 이륜차 보험료가 오토바이값만큼 나갈 줄이야.)
수동 바이크는 처음인 탓에 기어와 브레이크 조작을 하루종일 연습하고 나서야 내 몸처럼 몰 수 있었다. 함께 바이크를 시작했던 대학 동기가 어느 날 말했다.
"우리 과 K형이 오토바이 전문가야."
아차! K가 125cc 클래식 바이크로 유라시아를 횡단했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왜 진즉 떠올리지 못했을까. 바이크 형제가 가까이 있음을.
'선배님, 안녕하세요! 00입니다. 다름이 아니라...'라는 문자로 K와의 인연이 시작됐다.
K는 아직 학생일 적에 다큐멘터리를 제작해보자는 일념 하나로 사업을 시작했다. 대학 동기들과 팀을 꾸렸고, 다들 실력이 출중한 덕에 훌륭한 매출을 기록했더랬다. 그들만의 젊은 감성과 노련한 촬영편집술로 협업 요청이 쇄도했다.
허나 대부분 광고제작 의뢰였던 탓에 '다큐멘터리 제작'이라는 설립 목적과는 멀어지고 있었다.
그래서 K는 유라시아로 갔다. 자동차도, 대형바이크도 아니었다. 그가 들고 간 것은 800만 원, 125cc 저배기량 바이크, 캠핑 및 촬영장비 그리고 자신만의 다큐멘터리를 만들겠다는 목표. 떠나기 전, K는 그가 타는 바이크 회사에 사업제안서를 보내 바이크 수리 용품 등 각종 지원을 따냈다.
K가 당도한 유라시아는 전쟁터였다고, 그가 말했다.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에 입성하고 며칠만에 조지아 산맥에서 러시아 군인들에게 가진 돈을 빼앗겼다. 일교차가 심한 탓에 감기에 걸렸고, 살이 15kg나 빠졌다. 그는 배가 고팠고, 무서웠다.
하루는 철길을 건너다 바이크가 넘어져 손이 부러졌다. 옷은 여기저기 헤지고 찢어졌다. K가 바이크를 끌면서 이 여행에 의문을 품었을 무렵, 러시아 남자가 다가왔다.
"무슨 일 있냐."
머나먼 이국에서 들려온 그 목소리가 얼마나 반가웠을까. 러시아 남자는 자초지종을 듣고 K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갔다. K는 그곳에서 러시아 남자와 술을 마셨고, 치료를 받았다. 그 곳에서 하루를 묵고 다음날 여정은 계속됐다. 그의 망가진 바이크는 또 다른 러시아 라이더들이 무상으로 수리해주었다.
러시아에서는 라이더를 '모토 브라뜨 (мотобрат)'라고 부른다고 한다. 뜻풀이는 '오토바이 형제', K에게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형제에게는 돈을 받지 않아!'
벨기에에 도착한 K는 엔진오일을 갈기 위해 벨기에 샤를루아에 들렀다. 그곳에서 만난 바이크 팀은 '벨기에가 주는 선물'이라며 경정비부터 엔진오일 교체까지 모두 무료로 해주었다. 대가는 '한국에 무사히 도착했다는 연락'이라면서.
마침내 종착지인 프랑스 파리에 도착한 K는 이번엔 카메라를 훔치려는 난민들과 사투를 벌여야 했다. 이 과정에서 난민들에게 최루가스까지 맞았다. 다행히 카메라를 뺏기지 않았고, 멋진 에펠탑 사진을 찍었다.
80일에 걸쳐 13개국 14,000km를 달린 여정. 작은 125cc 바이크로 누가 해낼 수 있었을까. K는 한국에 무사히 돌아왔다. 여기저기서 취재 요청이 들어왔다. 제작한 다큐멘터리는 지상파 방송에 송출됐다.
그의 이야기는 누군가에겐 청년의 모험기요, 누군가에겐 영웅담이었다. K의 여행기록을 빠짐 없이 보고, 들은 나는 금세 그에게 빠져들었다.
K에게서 유라시아 횡단기를 직접 들을 당시, 서로를 잘 몰랐으므로 퍽 서먹했지만 그의 눈에선 빛이 났다. 그즈음 나는 오토바이 마케터를 꿈꾸며 바이크 유튜버를 하고 있었기에 (잘 되진 않았다.)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는 K를 진심으로 존경했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이토록 빠져들 수 있는 영혼이라니.
K와 가끔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오토바이를 탔다. K는 오토바이를 더 큰 것으로 바꿨고, 모 대기업에 합격했다. 워낙 대단한 사람이니 당연한 결과였다. 축하인사를 전하며 나와 K, 대학 동기 셋이서 경주까지 바이크 여행을 해보자고 기약 없는 약속을 했다.
그러던 K는 자신이 생각했던 직무와 기업에서 맡은 직무 간 괴리 때문에 깊은 고민에 빠졌다. 창의적이고, 도전적이고, 과감한 업무를 원했지만 회사에서 배정한 직무는 그 반대였다. K는 돌연 퇴사를 선언했다. 이름만 들어도 놀랄 대기업인데, 퇴사라고!
그 누구도 K를 말리진 않았을 듯 했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그가 자유롭고 도전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알기에 또 다른 분야에서 두각을 드러낼 테니까.
K는 퇴사 선언 이후 또 다시 여행을 떠났다. 이번엔 전국일주였다.
"이 여행 다녀오면, 같이 경주로 떠나보자."
그는 그렇게 말했었다.
그가 전국일주를 하고 있던 나날 중, 학과 단톡방에 조교의 메세지가 올라왔다.
K와 연락 되는 사람이 있냐는 메세지였다.
다음날, K의 부고소식이 들려왔다. 당연히 믿진 않았다. '에이 설마'
소식을 들은 대학 동기의 반응도 '에이 설마'였다. 일단 검은 옷을 입고,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가는 내내 믿기지가 않았다. 심장이 요동쳤고, 얼굴에 열이 올랐다.
장례식장으로 들어서자 특유의 향냄새가 코를 맴돌았다. 갑자기 현기증이 났다. 현실에 있지 않은 기분이었다. K의 영정사진을 보자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어떻게 절을 했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K의 부모님을 보고 무어라 위로 드리고 싶었지만 말이 목구멍에 걸려서 넘어오질 않았다.
장례식장에 익숙한 얼굴이 많이 보였다. 다들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무거운 마음으로 앉아 있다가 집에 가려고 일어섰을 무렵, K의 부모님에게 이 얘기를 지금 하지 않으면 너무나 후회할 것 같아 발걸음을 돌렸다.
K의 부모님은 간신히 울음을 참고 계셨다. 나는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더듬더듬 말을 꺼냈다.
저희는 K 선배님 대학 후배입니다.
"아, 네.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K 어머니의 목소리가 떨렸다.
K 선배는 제가 유일하게 존경하던 선배였습니다. 제 멘토였어요. 정말 멋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거기까지 말하고, 단전에서 단내가 훅 올라왔다. 더 이상 말이 나오지 않았다. K의 부모님은 눈물을 흘리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와 동기는 목례를 하고 건물을 빠져 나왔다.
나오자마자 왈칵 눈물이 터졌다. 남들 앞에서 아이처럼 엉엉 울어본 것은 오랜만이었다. 동기는 나를 건물 뒤로 데려가 다 울 때까지 기다려줬다. 그렇게 한참을 더 울었다.
누구나 살면서 멘토를 만난다. 내가 가고 싶은 길을 먼저 훌륭하게 걸어낸 사람, 모범이자 본보기, 존경할 수밖에 없는 사람.
내 멘토는 K였다. 그의 세련되고 진중한 열정에 매료됐고, 자유롭고 창의적인 모습을 동경했다. 몇 년이 지난 뒤에야 이 이야기를 글로 옮긴다. 쓰기가 겁났을 뿐더러, 쉽지가 않았다. 머릿속에서 그를 떠올리다 울컥해 단어로 엮을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얼마 전, 이 글을 쓰기로 마음 먹고 인터넷에서 K의 흔적을 찾고 있었다. 워낙 독특하고 출중한 그의 이력 덕분에 발자취를 찾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가 남긴 이야기들을 보는 와중에 어떤 블로그를 찾았다. K에 관한 글이 몇 개 있었다. 그러다 카테고리 이름을 보고 숨이 헉 멎었다.
'우리 아들 이야기'
그래서 이 이야기를 쓰기가 더 힘들었다. 누군가의 상처와 아픔을 또 건드리는 일일까봐. 그렇게 몇날 며칠을 고민만 하다가 쓴다. 잊히지 않으면 마음 속에 영원히 살아있는 것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혹여 K를 알고 있는 누군가가 이 글을 본다면 그를 떠올려주길. 나 또한 그를 잊지 않았다고 얘기하고 싶어서 썼다.
이제 더 이상 오토바이를 타지 않지만, K의 삶은 여전히 나의 동경이다. 꺼지지 않는 열정을 지닌 사람이자 도전을 겁내지 않았던 남자, 남에게 한없이 엄격했던 내가 유일하게 존경했던 선배.
'안녕'은 '편안할 안'과 '편안할 영'을 쓴다.
그곳에서 안녕하길, K.
안녕, 나의 멘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