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에 일주일에 한 번 다녔던 화실의 선생님께서 (선생님은 나보다 열 살 많으시다.) 한국인으로는 유일하게 선발되어 전 세계 힙한 100명의 아티스트 합동 전시회 행사로 미국 엘에이에 가실 계획이라고 하셨다.
자, 내가 존경하는 헬런 켈러께서는 이렇게 말했다.
인생은 과감한 도전이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다! 고고씽
그렇게 5일 간 전시회에서 작품 설치부터 판매까지 돕고, 나머지 5일 정도는 둘이서 함께 라스베이거스와 그랜드 캐년 일대를 교대로 운전해서 미국 서부를 여행하자고 하고 우선 둘이 귀국 날짜만 맞추었다. 선생님께서 이틀 먼저 미국에 가 계셨고 나는 전시회 설치 전날 저녁에 도착했다. 우리는 간단히 기분 좋게 산타모니카 해변 쪽으로 운전해서 산책을 했다. 캘리포니아는 여유롭고 아름다웠다.
미술 설치 시작되는 날 첫째 날 아침,
선생님께서는 당신의 인생을 더 꺼내서 내 접시 위에 올려주셨다.
선생님: 사실 나, 이 일에 모든 것을 걸고 왔어.
이번 전시회가 성공적이 못하면 남편이 이제 그림 접으래. 500만 원이 넘는 작품 배송비를 부담했고 시댁 대출까지 받았어.
나의 각오가 한층 무게추를 달았다. 그래도 행복했다. 잘 하자!
작품 설치 이후 저녁이 떨어지자 초대받은 VIP 관객들이 저마다 손에 칵테일을 한잔씩 들고 전시회장으로 몰려 들어오기 시작했다. 한국에서 접했던 전시회는 조용하고 어두웠는데, 이곳은 파티장 같았다! 처음 겪어보는
칵테일파티 전시회라니, 황홀하지 아니한가? 살아있음을 느끼는 나의 작은 역사적인 순간!
관객들이 다가와 선생님의 그림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어느새 우리 선생님은 그 짧은 영어로 명랑하게 다가가 내가 바로 그 화가요~하고 소통했고, 정말 귀엽고 멋졌다! 심지어 선생님은 'Dancer'라는 작품 제작의 동기를 설명할 때마다 안무인 코레오 그래피를 자꾸만 캘리그래피라고 설명했고 ( 어.. 두 유 노 캘리그래피? ) 사람들은 그때마다 캘리그래피?? 뭔 상관임??? 하고 갸우뚱했지만, 그만큼 우리 샘은 적극적으로 직접 관객과 소통하고 싶어 했다.
내 방식은 뭐랄까, 사람들에게 좀 더 작품을 먼저 즐길 공간과 시간을 느긋하게 주고, 궁금한 게 있다는 듯이 주변을 둘러보거든 우아하게 곁에 다가가 그림을 세련되게 설명해주는 스타일. 반대로 우리 선생님은 헤이 왓쳡? 정말 통통 튀는 그런 쾌활하고 유쾌한 스타일.
사실은 사실은, 나의 구구절절한 선생님 그림 사랑과는 관계없이, 그림을 설명하거나 파는 일을 해본 적도
옆에서 어깨너머로 본 적도 없었던 나로서는 머릿속으로 작품을 설명하는 시나리오만 무한 반복해서 돌리며
연습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그러면 그럴수록 머릿속이 밤하늘처럼 까매지는 것이었다. 물론 선생님께 절대 이런 복잡한 내 심정을 들키고 싶지 않아 겉은 웃고 있지만 속으로만 절망감에 절규하고 있었다.
내가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야~
우리의 첫 번째 판매작
한 대만 출신의 부유한 젊은 20대 부부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우리 부스로 왔다. 그들은 나에게 푸른빛과 노란빛을 많이 띠는 도시의 모습을 담은 추상화를 가리키며, 두 사람이 동시에 어떤 작품을 좋아한 경우는 아주 드물기 때문에 이 작품이 아주 마음에 든다고 하며, 영어로 이런저런 질문들을 했다. 그러더니 선생님을 만나고 싶다고 했다. 이런저런 대화를 영어로 중개하고 나니, 그들이(한화 650만 원) 이 작품을 지금 당장 자신이 살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손과 마음과 입술이 도도동 동시에 떨렸지만 그런 풋내를 풍기지 않으려고 최대한 도도함과 침착함을 유지했다. 정말 짜릿! 이 순간 전까지 정말 이 전시회가 어떤 사건이 될지, 어떤 분위기일지 단언컨대 상상도 못 했었다. 그런데 이 순간, 나는 아티스트들이 느끼는 짜릿함을 한 조각 훔쳐먹어 본 기분이었다.
그날 밤 우리는 숙소로 돌아와 축배를 들며
선생님: 내일은 더 많이 팔 수 있을 거야. 다 팔고 우리는 돌아가야 해,
니: 어우 선생님 그럼요, 당연히 다 팔고 갈 거예요 우리는~
둘째 셋째 날,
우리는 한 점도 더 팔지 못했다.
선생님은 이제 완전히 식욕을 잃고, 밤에 잠도 주무 시지를 못했다. 그럴수록 나는 나까지 괜히 와서 선생님께서 부담은 아닌지, 혹시 나의 역할 수행이 부족해서 이런 것은 아닌지 점점 초조해졌다. 이 만큼의 비행기 값과 숙소 값을 스스로 감당하면서 내가 좋아하는 그림들과 관련된 값진 경험을 해보고자, 그리고 선생님에게 날개를 달아드리고자 하는 큰 포부를 가지고 이 먼 길을 날아왔는데, 선생님께 도리어 짐만 되는 것은 아닌지 내 입술까지 바짝바짝. 뭐 어찌 되었든 나는 끝까지 선생님에게나 관객들에게 절박감을 드러내지 않고 나이쓰 하게 유지했다. 그런 내가 답답했을까? 선생님께서는 서서히 나에게 싫증과 짜증 섞인 말투를 쓰기 시작하셨고, 내가 하는 행동과 질문에 왜?라고 언짢게 반응하시고, 마지막 날 드디어 내 질문에는 끝내 말대답도 하지 않으셨다.
마지막 날 100만 원이 넘는 작은 그림 하나를 간신히 더 팔고, 행사는 이렇게 조금은 실망스럽게? 끝났다. 1000만 원을 들여 나온 행사에 1000만 원도 못 파셨으니 우리 선생님 어쩌나, 면목이 없었다. 우리는 자축이랄지 위로랄지 나름의 기념을 위한 저녁 식사를 하러 다운타운으로 나갔다.
선생님: 그런데, 너의 미소와 친절이 마치 승무원의 친절 같은 거 있지, 여기 스타일 사람들이랑 좀 안 맞았던 것 같아. 약간 그런 태도가 사람들에게 거부감을 준 것 같아. 내가 바랬던 것은 평소처럼 정말 프렌들리 한 너였는데, 사실 내 그림 한 점 한 점의 장황한 설명을 종이에 두 번 세 번 영어로 적고 달달 외우는 그 모습, 그거 진짜 내가 원하던 게 아니었어.
나의 정신: 이 사람은 한국에 가면 다시는 만나지 않을 거야!!!!!
나는 정말이지 너무 섭섭해서 펑펑 울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표현하지 못했다. 내가 말로 하는 순간 정말 내가 의 모든 것을 쏟아서 이 경험을 하러 온 시간과 노력이 다 실패가 되고 인정하는 모양이 될 것 같아서 그럴 용기가 나지 않았다. 나는 그다음 날 선생님께 더 이상의 일정은 함께 하지 못 하겠다고, 처음에는 하고 싶은 체험이 다른 것 같다는 핑계를 대었지만, 모든 체험을 나에게 맞추겠다고 말씀하시는 바람에 사실은 나는 사실 마음의 상처를 받았고 남은 시간은 좀 떨어져서 각자 보내고 싶다고 했다.
당장 그레이하운드라는 쓰레기 같은 버스회사를 통해 5시간을 달려 라스베이거스로 갔고 모든
5일간의 고통체로부터 해방되었다. 그리고 그다음 날 아침부터 2박 3일에 달하는 캠핑 투어에 떠났다. 캠핑 투어는 아주 멋진 시간이었고, 그런 멋진 시간은 항상 그렇듯이 꿈처럼 스쳐가듯 빨리 막을 내렸다. 한편으로는 해방감과 자기 위안에 편안했지만 마음 한 구석은 불편함이 있었다.
선생님은 일정을 당겨 한국으로 먼저 돌아오셨다고 카톡을 주셨다.
화실에서 잠깐 만날까?
다시는 안 보고 싶다고 다짐했던 우리 선생님은 나에게 선물로 작품 하나를 선물로 주시며
“ 미안해. 이거 내 포트폴리오 웹사이트에 올라가 있는 자식 같은 작품인데 줄 때 빨리 받아, 야 너 참 수완 좋다.”
싸인도 해주시고 작품에 작별 뽀뽀까지 하셨다.
정말 예술을 사랑하신다니까!
그런데 이야~ 이 그림은 정말 정말 내 스타일이다.
나는 이 직설적이고 쿨내 나는 츤데레 선생님을 진심으로 존경한다.
내가 속상하고 돌아서고 다시는 안 보고 싶어 했던 그 선생님의 그 날의 모습은 사실은
여느 일하는 사장님에게도 나타나는 일시적인 태도일 뿐인데, 나는 그렇게 섭섭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일할 때 나는 어떤가?
지난 8년 동안 작은 사업체의 대표로 일하며, 항상 앞에 나와서 박수갈채만 받다가 갑자기 남의 그림자가 되려니 영 어색했던 것이다. 나는 일할 때 예민해서 직원이 무안하게 느끼도록 둔 경험은 전혀 없는가? (허다했을 듯) 어찌 보면 선생님은 정말 진지하고 솔직하게 그저 자기 일을 하고 있었던 것뿐이다. 잘되면 기쁘고, 안되면 예민해지고. 당연한 것 아닌가?
이 사건을 계기로 내가 배운 것 이 하나 있다면 나는 앞으로 사람들을 만나고, 가까워지려다 상처를 받고, 한 가지의 일로 그 사람을 판단하고 떠나가는 일은 앞으로는 없으리라 함이다.
사람은 평면적이지 않고, 누구나 입체적이다. 단 한 번 사건만 가지고 누군가를 판단하고
비난하기 전에, 총체적인 삶의 관점에서 그 사람을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누가 그러더라,
인간은 죄를 지은 사람마저 동정하고 사랑할 수 있는 그런 존재라고,
선생님과 나는 한 달 후쯤 다시 만나 국밥을 먹었다.
선생님은 해당 전시회의 온라인 업체를 통해 전시회 이후에 두 점의 작품을 더 팔았다고 좋은 소식을 전해주셨고 나는 진심으로 기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