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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uswell Dec 25. 2023

경제학에서 보는 성별 소득격차의 원인

『커리어 그리고 가정』을 읽고

연휴가 끝나가던 10월 9일 월요일 저녁. 전 주에 다른 분야의 노벨상 수상자를 보도한 기사를 본 기억 때문인지 불현듯 오늘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발표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바로 검색해 보니 마침 발표까지 한 시간 정도 남았길래 이 기회에 노벨상 수상자 발표 생중계나 한 번 보자고 마음먹고 방송을 기다렸다. 드디어 발표 시간. 발표자가 수상자 이름을 말하기에 앞서 여성의 노동시장 참가, 성별 임금 격차 등을 주요 업적으로 언급하는 순간 바로 클로디아 골딘 교수를 떠올렸고, 약간 흥분 상태가 되었다.


이미 잘 알려졌듯이 2023년 노벨 경제학상은 여성의 노동시장 결과와 관련된 이해를 진전시킨 공로로 하버드 대학의 클로디아 골딘(Claudia Goldin)에게 돌아갔다. 지도교수 거나 특별한 인연이 있는 것도 아닌데 내가 이 분의 노벨상 수상에 유난을 떤 이유는 대학원 시절 내가 연구하고 논문을 썼던 분야가 사실상 이 분의 활약 속에 확립된 것이나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당연히 내 박사학위 논문에서도 이 분의 논문이 다수 인용되어 있다. 비록 지금은 나이롱 연구자에 가깝긴 하지만 내가 시대가 인정한 위대한 석학과 같은 분야에서 동일한 관심사를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는 연구자라는 사실 자체가 크나큰 영광으로 느껴졌다.


솔직히 이러한 자부심을 가진 것치고는 골딘이 쓴 『커리어 그리고 가정』을 상당히 늦게 읽은 편이긴 하다. 굳이 변명을 하자면 박사 논문을 쓰는 과정에서 골딘의 논문은 여러 편 봤지만, 골딘이 책을 썼고 그 책이 번역되어 나와 있었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었다. 이번 노벨상 수상을 계기로 밀리의 서재에도 책이 들어오면서 읽게 되었는데 당연히 책은 논문에 비해 훨씬 수월하게 읽히는 편이었다. 예전에는 경제학자들이 저술한 책을 잘 읽지 않았었는데, 대학원 공부를 하고 나니 유명한 경제학자들이 책도 잘 쓴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더욱 자주 경제학 책을 읽고 있다.


이 책은 1900년대 이후 약 100년 간 미국 성별 임금 격차의 원인을 추적한다. 시기에 따라 대졸 여성들을 크게 다섯 집단으로 나누어 각 집단이 커리어와 가정 간 관계를 어떻게 조화시켜 나갔는지를 살펴본다. 1900년대 초반에 대학을 졸업한 집단 1은 가정과 커리어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지만 1980년에서 2000년 사이에 대학을 졸업한 집단 5는 커리어와 가정 모두를 성취할 수 있었음을 풍부한 미시 자료를 바탕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별 임금 격차의 개선이 최근 들어 정체되고 있는데, 저자는 이를 노동시간이 길고 항상 대기 상태에 있기를 요구하지만 시간당 임금은 훨씬 높은 탐욕스러운 일자리(greedy work)의 존재로 설명한다. 부부가 모두 일을 하더라도 남성은 이러한 일자리에 머물 수 있는 반면, 여성은 가정에 대한 돌봄과 병행할 수 있지만 시간당 임금이 낮은 일자리로 자연스럽게 옮겨가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성별 임금 격차가 줄어들기 힘들다는 것이다.


이 책은 개인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있는 '노동시장에서의 성별 격차'와 '노동시간'이라는 두 가지 연구 주제를 연결해 주는 책이라 좋았다. 내 박사학위 논문 1장은 미국의 성별 노동시간 격차에 대해 다루고 있고 3장은 한국의 노동시간에 대한 내용인데, 탐욕스러운 일자리에 대한 통계를 보강한다면 새로운 관점에서 이러한 주제들을 바라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이 책은 기본적으로 그동안 골딘이 저술한 여러 논문의 내용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분석에 이용된 미시 자료가 상당히 방대한 편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을 밀리의 서재를 통해 읽긴 했지만 연구자의 관점에서 보면 실물을 구입해서 도표, 출처 설명과 주석까지 꼼꼼하게 참조할 만한 책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물론 이 책의 내용은 일반 독자들에게도 충분히 호소력이 있다고 본다. OECD에서 성별 임금 격차가 가장 크다고 알려져 있는 우리나라의 상황이 미국에 비해 더욱 혹독하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는 '가정'을 아이를 갖는 것으로 정의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출산율이 나날이 낮아지면서 가정 자체가 무너지고 있는 우리나라의 상황에 이 책의 단계를 그대로 적용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그렇지만 우리나라가 설사 미국의 단계를 그대로 따라가게 되더라도, 결국 근본적으로 고임금 일자리의 성격이 달라지지 않는 이상 성별 임금 격차를 해소하는 데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이 책의 시사점은 충분히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 제목 사진 출처: https://affairscloud.com/nobel-prize-in-economics-2023-professor-claudia-goldin-3rd-woman-to-won-the-awa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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