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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버드네 Feb 03. 2023

바지를 벗는 마음

100일 글쓰기 카페: 나를 이해하고 사랑하는 시간

어제는 지인이 함께 점심을 먹자며 전화를 하였다. 아침밥을 늦게 먹고 오늘 점심밥은 걸러야 겠다고 생각하던 차였다. 배가 고프니까 일찍 만나면 좋겠다는 지인의 말에 집 근처 단골 팥죽집에서 만나자고 하였다. 하루의 바쁜 시간 중에 나와 함께 밥을 먹겠다는 말이 참 고마웠다. 세상에서 함께 밥을 먹자는 말처럼 다정한 말이 없기 때문이다. 

편한 차림으로 만나기 위해 집근처로 오라고 하였다. 밥 먹자고 전화를 한 사람이 밥을 사는 것이 국룰이지만 다음으로 식당을 정한 사람이 밥을 사는 것이 암묵적인 나의 룰이다. 내가 사겠으니 우리집 근처로 오라는 거였다. 결국 먼저 밥먹자고 요청한 사람이 밥은 사는 거라며 지인은 맛난 팥죽을 사주었다.  

약속한 시간보다 5분 먼저 식당에 도착하였다. 단골 식당이라 오늘도 손님이 많아야 할 텐데 어찐가 싶어 두리번 거리며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이른 점심 시간이지만 두 테이블 정도 사람이 앉아있었다. 식당 주인이 서빙하기 좋고 출입구에서 먼 쪽을 택해 자리를 잡으려고 하는 찰라에 옆 테이블 손님이 감탄사를 쏟아냈다.  

"바지가 영 내 마음에 들고 예쁘네요." 

일단은 나에 대한 호의이고 바지에 대한 관심사였다. 어색하게 웃으며 자리에 앉기 전에 긴잠바 단추를 풀고 바지의 전체 모습을 보여드렸다. 정말로 본인 마음에 쏙 들만큼 예쁜지 보라는 신호였다. 예상치 못한 나의 행동에 나이드신 여자 손님은 웃으시면서 연신 바지가 예쁘다고 하셨다.  

연한 감색의 누비 바지가 끝자락에 레이스가 달려있고 호주머니에는 털실로짠 꽃모양 코사지가 달려 있는 바지였다. 언뜻보면 영산홍꽃이나 능소화를 떠올리게하는 색감의 바지이다. 안쪽에 면으로 천이 덧대여 있어서 따숩기도 하고 수공이 많이 갔다고 하면서 단골 옷가게에서 가격을 깎지 못하고 제법 돈을 주고 산 바지였다.  

"이 바지 벗어 드릴까요?" 

누비 바지의 임자를 만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체가 튼실한 내가 누비 바지를 입다보니 몸매가 더 부각되었다. 또 고무줄 바지라서 거울 앞에 서면 적랄하게 드러난 통자몸매를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내가 누비 바지를 벗어 주겠다고 하지 여자 손님은 웃으셨다. 예상치 못한 나의 맞장구에 놀라신 눈치셨다.  

아직 오지 않는 지인에게 도착시간을 확인하고 먹고 싶은 메뉴를 확인한 다음 식당 주인에게 음식을 주문하였다. 집에 가서 바지를 갈아입고 오겠다고 하니까. 여자 손님은 다시 당황하신 듯하였다. 그때 식당 주인 아주머니가 나섰다.  

"진짜 바지를 벗어 줄 거예요. 그런 사람이예요. " 

식당 아주머니는  나라면 충분히 가능한 나눔이라고 생각하신 듯하였다. 식당 아주머니께 몇 차례 이것저것 집에 있는 것을 가져다 드린 적이 있다. 정갈하고 맛있는 팥죽집을 우리 집 근처에 오픈하신 것이 너무 고맙다고 말씀드리고 집에 들어온 선물을 가져다 드렸기 때문이다. 한동안 암으로 투병하느라 오래된 가게를 접고 회복이 되어 식당문을 자신의 집근처에 열었다는 말을 들었다. 그 뒤로는 식당 아주머니 안색을 보게 되고 염려가 되어 집에 있던 홍삼제품을 가져다 드렸다. 

한번은 우리집에 2L 참기름이 선물로 들어왔기에 팥죽집에 가져다 드렸다. 친정어머니가 명절 때마다 주시는 2홉짜리 참기름 한 병이면 우리집 반찬의 고소함은 충분한데, 나혼자 쓰려다 간직한 참기름은 시간이 지나면 고소함이 사라지니 여러 사람이 맛나게 먹는 방법을 선택하였다. 식당 아주머니께서 절에 자주 가신다는 말을 듣고 집에 모아 두었던 보자기와 종이팩을 가져다 드렸다. 절에서 천도제나 49제를 지내다보면 올렸던 과일이나 떡과 같은 음식을 신도들에게 나눠주실 때 요긴할 거라고 건넸더니 기뻐하셨다.  아직도 내가 작년 가을에 준 참기름을 잘 쓰고 있다면서 너무 좋은 참기름을 자신에게 주어서 고맙다는 말도 덧붙였다.  

서둘러 음식 주문을 하고 집으로 와서 누비 바지를 갈아입고 새양말 한 켤레와 누비 바지를 함께 종이팩에 넣고 부랴부랴 팥죽집으로 향하였다. 벌써 만나기로 한 지인이 식당에 와 있었다. 나이드신 여자 손님께 바지를 건넸다. 그렇지 않아도 바지색이 너무 고와서 다른 지인을 줄까 고민했던 바지니 부담스러워 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하였다. 속에 있는 말을 꺼내서 이렇게 바지를 얻게 될 줄은 몰랐다면서 속에 말을 앞으로도 해 봐야겠다고 하셨다. 앞으로 종종 팥죽집에 오시라고 했더니 본인을 만나면 이것저것 뺏길 지 모르겠다고 웃으셨다.  

평상시에 즐겨 입던 바지가 7부 정도되는 통바지라서 발목이 훤히 보이자 바지를 받아든 여자 손님과 함께 온 일행 중에 한 분이 나를 놀렸다.  

"아이고야, 긴바지 벗어주고 춥게 짧은 바지를 입었네!" 

그 분에 말 속에는 나를 향한 염려와 충고가 뭍어났다. 혹시나 내가 못 알아들었을까봐 다음에는 아무나 자기 바지를 벗어주지 말라고 하였다. 금방 추워지지 않냐고 타이르기까지 하였다. 내가 준 바지를 여자 손님이 잘 입을 지 욕심만 낸 것인 알 수 없다. 하지만, 내가 바지를 벗어준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입고 있던 망설임을 벗었다고 설명하기는 길어질 듯하여 그냥 웃음으로 대신하였다. 누군가에게 선물이나 물건을 주기 어려운 것은 받는 사람의 마음을 헤아려야 하기 때문이다. 많아서 주는 것이 아니라 내게는 적합하지 않거나 필요치 않으니 나누는 것인데 때로는 사람들이 나눔에 대해서 순수하게 받아들이지 않을 때가 있다.  

바지를 벗어 준 마음은 함께 밥을 먹자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으니 어제는 공짜 팥죽을 먹은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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