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을 구체화하기
매사 신중하고 차분한 볍씨와 달리 나는 치밀한 듯 보이지만 확신이 생기면 바로 방향이 선명해지는 타입이다.
(물론 이 점은 둘이 만나기 전에 쌓아왔던 각자와의 삶의 역사와, 성정과도 관계가 깊다)
그래서 처음 서로에게 빠져들면서 동시에 외국으로 떠날 채비를 하던 시기 볍씨는 나를 밀어냈고, 나는 다가서기에 바빴다.
그때는 볍씨보다 내가 좀 더 살아봤다는 이유가 크다고 생각했다. 확신은 직관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근거에서 출발한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내게는...
(알고 보니 볍씨는 나와 달리 거리감과 시차에 대한 경험과 감수성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아는 맛'이 더 무서운 법?)
그랬던 나라도 볍씨가 좋아질수록 불안이 엄습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나를 불안하게 하는 건 예측 불가능성 때문이었다.
직업적 희망과 앞날을 꿈꾸며 떠나는 볍씨의 계획에 내가 당연히 함께할 것이라 여겼는데, 앞으로의 그림이 잘 그려지지 않았다.
당시 내 삶은 예외의 가능성이나 상상의 여지가 크지는 않았다.
나는 한국. 심지어 서울이라는 지리적 공간을 벗어난 적이 없는 사람이고, 상상 속에서라도 이민이라거나 이주 같은 것은 없었다.
우리 둘 사이 경험의 차이도 한몫했다.
나에겐 집안에 한둘 있는 해외로 이주한 친척 외에 유학을 떠난 경우조차 전무했다. 기껏해야 어학연수 정도?
한국에서 직장생활을 한 지도 십 년이 훌쩍 넘었으니 '도전' 외에도 '능력'과 같은 고려가 많이 필요한 나이가 되었다.
아무튼 서로 다른 우리가 사랑에 빠졌다.... 그랬다!
우리 사이에 '장거리 연애'라는 점은 단순히 먼 거리를 사이에 두고 있다는 것만은 아니었을 텐데 처음에는 '거리'와 '시차'만이 크게 다가왔다.
그러다가 중기간, 장기간의 고민이 닥쳐왔다.
소중한 인연을 놓치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과 각자의 공간에서 혼자 잘 살아낼 수 있을까...?...로 그리고 볍씨 없이는 못 살 것 같은 마음으로 순환했다.
그러나 모든 것을 감당하고도 사랑하지 않는 것은, 사랑하는 것보다 힘든 일이 되었다.
이 불안감을 떨쳐낼 방법은 없을까?
나는 이전에 내가 도움을 받았던 상담사 선생님께 연락했다.
볍씨를 만나기까지 소수자로 나이 먹으며 그간 잘 숨겨뒀던 불안 앞에 흔들렸던 때에 만난 분이었다.
오랜만에 찾아뵀던 상담사 선생님께 볍씨 이야기, 볍씨와 내가 겪게 될 앞으로의 이야기했을 때, 그분은 내게 축하를 건넸다.
볍씨와의 사랑을 온전히 축하만을 전한 거의 유일한 사람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 가족 중 커밍아웃했던 형제들은 이미 각자의 삶을 사느라 바쁘거나 소수자의 삶에 부자연스러움과 거리감을 두었고, 가까운 친구들 역시 축하와 동시에 걱정을 많이 했다.
일주일쯤 뒤, 나와 볍씨는 상담사 선생님 앞에서 하나의 공통된 고민 해결책을 찾는 것이 아니라, 그저 둘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나누는 자리를 갖게 되었다.
우리는 그날 무엇이든 구체적으로 말하고, 표현하는 것이 우리에게 무엇보다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 명제는 사실 5월 어느 날, 볍씨가 작은 메모에 적어 준 문구였고 지금까지도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법칙 같은 것이었다.
"구체적인 당신"
장거리 연애가 아니었다면 실체를 그리지 않고도 만져지는 감각으로 일상을 함께하겠지만, 많은 경우 짐작하고 추측해야 할 때가 많았기에
우리는 기쁨, 슬픔, 아픔, 불안, 분노... 일상 속에서 느끼는 많은 것을 구체적으로 말해야 했다.
그래서일까? 장거리 연애를 하면서 소통이 어렵지 않냐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대화가 부족해서 어렵다는 생각은 한 적이 없었다고 답할 수 있었다.
다만 그 반대의 상황. 구체적으로 말할 수 없는 물리적 상황만이 어려움이었다.
그렇게 경험해 보지 못했던 첫 작별의 시간,
볍씨의 첫 출국일 "2016년 8월 19일 금요일"이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