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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콩 Dec 15. 2022

운수 좋은 날

한적한 도로를 지나는데 저만치 길가에 서있던 교통경찰이 손짓으로 까딱까딱 차를 세웠다.


 경찰 : 신호 위반하셨습니다!


 "안 했는데요?"


 경찰 : 했습니다!


경찰이 저리 단호하게 말하면 맞겠지 뭐.

솔직히 난 신호등을 못 봤다. 앞 차 뒷꽁무니만 봤다. 급히 움직이던 것도 아니고 다소 한적한 길이라 여유를 부리며 바로 앞서 가는 트럭 뒤를 졸졸 따라가던 참이었다.

앞 차가 멈추면 멈추고 앞차가 달리면 달리고 앞차의 덩치에 밀려 신호등은 보지 못했다.


어쨌든 잡혔으니 조금 비굴해지자.


"한 번만 봐주세요~"


경찰 : 다들 줄줄이 잡혔는데  어떻게 봐드립니까?


다들?

경찰이 손을 들어 차 뒤쪽을 가리켰다. 지시하는 대로 고개를 빼고 돌려보니 내 뒤쪽에 각양각색의 차들이 줄줄이 늘어서 있었다.


아이고야 내가 아무 생각 없이 앞차를 졸졸 따라왔듯이 내 뒤차는 나를, 그 뒤차는 그 앞차를 졸졸 따라왔구나.


맞아 생각 없이 졸졸 따라가는 거 이건 좀 문제가 있지. 차로에서뿐만 아니라 삶 어디에서고.....

앞 차가 잘 갔다고 나도 어김없이 잘 가란 법은 없는데 살면서는 그걸 자주 잊는다.

앞 차가 잘 갔다고 나도 잘 가란 법이 없고,

잘 가는 앞 차를 따라간 것이 내 실수의  합리화가 돼줄 수도 없다.


내가 신호등을 살피지 않고 앞차만 졸졸 따라간 것이 내 뒤차 역시도 신호위반을 하게 만든 원인이 되었을 거야. 내가 뒤차한테 나를 따라오라고 한 적은 없지만 말이다.


짧은 순간 많은 생각으로 복잡해진 내 표정이 좀 불쌍해 보였나?


교통경찰이 두리번거리다가 차 안으로 머리를 쑥 집어넣더니 말했다.


경찰 : 앞으로 신호위반 안 하실 거죠?


"원래 할 생각 없었어요~"


경찰 : 어쨌든 위반은 하셨잖아요. (은밀하게) 앞으론 잘 보고 다니세요. 이번엔  안전벨트 미착용으로       해서 벌금을 조금만 나오게 해 드릴까요?


"아~ 감사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도 되나요?"


경찰: 안되는데 앞으로 교통 신호 잘 지키시라고 특별히 해드리는 거예요.


"그러면 저뿐만 아니라 저 뒤차들도 그렇게 해주세요."


경찰: 왜요?


"저 차들은 제가 생각 없이 앞차를 졸졸 따라가는 바람에 저를 따라오다 신호위반을 하게 된 거거든요.  그러니 제 책임도 있어요."


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경찰이 말했다.


경찰: 그렇더라도 뒤차까지 걱정하실 일은 아니죠. 뒤차를 어떻게 할 건지는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뒤차가 걱정되시면 앞으로는 앞차로서의 모범을 보이시기 바랍니다.


앞차로서의 모범...


"그렇죠 오지랖이죠. 알겠습니다. 모범적인 앞차가 되도록 하겠습니다."


경찰관이 푸시시 웃더니 흐뭇한 표정으로 손에 든 기계를 까딱까딱 작동시키며 한참을 왔다 갔다 했다.


흠.. 신호위반을 안전벨트 미착용으로 변경하는데 절차가 복잡한가 보네...


잠시 후 경찰관이 다시 다가와서 말했다.


 경찰 : 오늘 진짜 운수 좋은 날이십니다.


"운수 안 좋은 날이죠. 운수 좋은 날이면 우리가 이렇게 만나지 않았겠죠."


경찰: 아닙니다. 운수 좋으십니다. 전산장애로 그냥 가셔도 되겠습니다.


전산장애...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참내 벌금 몇만 원 안 내게 됐다고 고개가 이렇게 꾸벅꾸벅 해지다니 인생 참 부질없다.


오예~~

신이 나서 경찰관에게 과하게 손을 흔들며 룰루랄라 출발을 했다. 백미러로 보니 뒤차들도 프리패스로 쫓아오고 있었다.


경찰관의 말이 자꾸 생각났다.



오늘 진짜 운수 좋은 날이십니다.



살면서 누군가에게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었던가. 딱히 기억에 없는데 누군가에게 운수 좋다는 말을 들으니 갑자기 내가 억수로 운이 좋은 사람처럼 느껴져서 신이 났다.

 

한적한 거리이긴 하지만 신호 위반하고도 특별한 사고가 없었으니 운수 좋고

교통경찰한테 잡혔지만 전산장애로 벌금딱지 안 끊었으니 운수 좋고

마음 착한 경찰관한테 운 좋은 사람 대접을 받았으니  운수 좋고

 

살면서 운수 좋다는 게 이런 거였구나.


내 인생의 하고 많은 날 중 드물게 운수 좋은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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