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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콩 Apr 25. 2023

그 계약서 절대 못 써준다니까요!

말로만 듣던 사기계약...내게도 마수를 뻗치는구나..

전세사기, 깡통전세 문제로 온 나라가 시끄럽다. 특히나 빌라 건축주와 전세사기 일당이 공모한 전세계약에 중개사 등이 대서계약(중개사가 직접 거래하지 않은 계약서를 대신 써주는 행위)을 해줌으로 인해서 피해가 확산된 사례가 많아 현장의 개업공인중개사들도 많이 놀라고 위축되었다.


사실 대서계약을 해준 중개사의 다수는 그것이 범법행위에 연루되는 것인 줄 미처 모르고 당한 경우가 많다. 전세사기 일당이 젊은 가장 임차인을 앞세워 "임대인과 직거래로 집을 보아서 전세계약을 하고 싶은데 돈이 없어 전세자금 대출을 받아야 한다. 그런데 전세대출을 받으려면 공인중개사 인장이 들어간 계약서가 필요하니 계약서 좀 써달라" 사정하니 한두 차례 거절했다가,


간곡히 부탁하는 젊은 임차인들의 안타까운 상황을 도와준답시고 계약서를 작성해 주었다가 수천만 원의 피해보상을 하게 된 사례도 꽤 많다. 물론 전세사기 일당과 공모하여 사기에 적극적으로 동참한 일부 중개사도 있다는 것은 매스컴을 통해 보았다. 같은 중개사로서 너무 부끄럽고 죄송하다.


갑자기 전세사기 피해자가 대거 속출하고, 동시에 주변의 중개사들 중 멋모르고 계약서를 대필해 줬다가 사기에 연루되어 피해를 입는 것을 보니, 우리 중개사들 사이에서도 대서ㆍ대필 계약은 절대 하지 말아야겠다! 큰일 나겠다! 는 분위기가 확산되었다.  한국공인중개사협회에서도 팝업창으로 대서ㆍ대필계약의 위험성을 알리는 계도성 공지를 내보냈다.




나는 원래도 직접 중개하지 않은 거래계약서는 작성해주지 않는다. 언젠가 지역의 유지(?)분께서 본인 집에 조카가 전세 들어오는 걸로 전세계약서 좀 써달라 하는 걸 거절했다가 한동안  불편함을 겪은 경험도 있다.


아무튼 "아 세상이 너무 무섭다. 절대 모르는 사람이나 중개하지 않은 물건에 대해서 계약서는 안 써줘야지."  다짐에 다짐을 거듭하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점심을 먹고 다소 나른해하던 시간, 웬 건장한 30대 남자가 들어왔다. 쭈뼛쭈뼛 눈치를 살피는가 싶더니 등기부등본을 한통 내밀었다


얼굴이 낯선데 언제 계약한 분일까? 머리를 빠르게 돌리는 사이, 그가 꺼낸 첫마디.

"제가 OO 지역에 있는 빌라 매매를 직거래로 봤어요. 집이 마음에 들어서 계약하고 싶은데 중개보수를 드릴 테니 중개사님이 계약서를 써주시면 안 될까요?"

헐... 드디어 나에게도 마수를 뻗치는구나..
......................라고 나는 상상했다.  

젊은 사람이 30분 거리 떨어진 시골 마을의 빌라매매를 직거래로 보았다고?  중개보수를 줄 테니 계약서를 써달라고?

히햐... 전세사기도 아니고 이젠 매매사기도 치는갑네.. 내가 딱 대상으로 선정됐구나.. 이것들이 사람을 뭘로 보고!!!!


나는 경계의 철퇴를 두르고 물었다,

"전세도 아니고 매매라면 그냥 쌍방합의로 쓰셔도 될 텐데요?"


직거래로 본 빌라나 다가구의 전세계약서를 중개사한테 써달라고 하는 이유는, 중개사가 작성하지 않은 (중개사 명판이 없는) 계약서로는 금융권에서 전세대출을 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금융권에서도 전세대출을 해줘야 하는 계약의 안전성을 담보하기 위해, 반드시 중개사가 작성한 계약서를 가져올 것을 요구한다.  말하자면, 사고가 발생할 경우 제일 먼저 중개사한테 책임을 묻겠다는 의도가 강하다.


아마 내눈에 의심의 불꽃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을텐데도 청년은 굽히지 않았다.  

"그래도 확실히 하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중개사님이 써주신 계약이 확실하겠잖아요."

오호~ 말 잘 하시네... 나도 물러서진 않는다. 정신 바짝 차려야지.


"그러면  빌라 인근의  중개사무소에 부탁해 보시죠? 빌라 주변에 중개사무소 많을 텐데요? 저는 모르는 물건에 대해 대서 대필은 안 합니다."

전세사기 유형 중 해당 중개 물건 인근의 중개사무소보다 다소 거리가 떨어진 원거리 중개사무소를 타깃으로 한 경우가 많았다. 왜냐면  중개물건 인근 중개사무소에서는 그 물건의 시세를 너무나 잘 알아서 거래금액이 시세와 많이 차이나는 위험한(?) 계약에 응해줄 확률이 낮기 때문이다


아주 전형적인 수법이네... 의심이 확신으로 굳어지는 순간에도 청년은 개의치 않고 말했다.  


"중개사님이 저랑 같은 성씨라서요.  그리고 조회해 보니 인상도... 신뢰가 가서요."

헐... 이건 뭔 소리?  훅 들어오네???
직거래로 본 외진 마을의 빌라매매를 성씨가 같다는 이유로 굳이 30분 거리나 떨어진 나를  찾아와 대서해달라고?  도대체 사람을 뭘로 보는 거야....

나는 절대 안 속을 것이다... 그래서 다시 거절했다.


그냥 매도인이랑 두 사람이 써도 된다고 설명해 주었는데도 청년은 '중개보수 주겠다는데 도와주시면 안 되겠냐 이런 계약이 처음이라 불안해서 그렇다, 그래도 부동산에서 써줘야 안전한 거 아니냐...' 라고 나를 열심히 설득했다.

'아니 그럼 처음부터 부동산을 통해서 집을 볼 것이지.... 말은 겁나 잘하네...'


청년이 포기하지 않고 애처로운 눈빛으로 부탁을 이어가니, 마음이 조금 약해지려 했다.

"어차피 등기도 하셔야 하니 소유권이전등기랑 거래신고를 해줄 법무사무소를 소개해드릴게요. 그리고 계약서에 넣을 특약사항이나 주의점 정도는 제가 조언을 해드릴게요"

청년은 뭔가 아쉬운 듯 한두 번 더 부탁하다가 포기했다. 좀 미안한 생각이 들어서, 계약 관련 궁금한 게 있으면 얼마든지 전화하라며 명함도 건네주었다. 청년의 전화번호를 물었으나 본인이 직접 연락하겠다며 알려주지 않았다..

'음.. 그럼 그렇지.. 사기꾼이 전화번호를 어떻게 알려주겠어...'

나름 끈질기던 청년이 떠나고 하루가 지난 다음날 오전에 나는 문득 그가 생각났다.

'봐 연락도 없잖아. 역시 사기였어... 거절하길 정말 잘했어..'  


그런데 다시 3시간이 지난 후 그 청년이 박카스 한 박스와 라떼커피를 들고 쑤욱 들어왔다.  어라 또 왔네? 하는 순간 그가 말했다.

"중개사님 말씀해 주신 대로 법무사랑 연락해서 만나기로 했는데요, 그래도 제가 인터넷을 조회해서 계약서를 작성해 보았어요. 한번 검토해 주세요."

헐.. 청년은 계약서 양식에다 꼼꼼히 특약까지 기재한 계약서를 내밀었다. 등기부등본과 건축물대장까지 출력해 왔다. 뭔가 이건 진심인데?

대지지분이나 면적란 등등을 이렇게 기재하는 것이 맞느냐 묻길래 맞다 해주고 인터넷을 조회해 적은 특약사항은 수정 및 첨삭을 해주었다. 그리고 물었다.

"법무사무소에서 만나 쓰기로 하셨으면 거기서 계약서는 대략 써놓을텐데 왜 직접 작성하셨어요?"
라고 묻자

"그래도 공인중개사가 아니라 법무사 직원이라 하니 안심이 안 돼서요, 제가 미리 작성해서 중개사님 검토받은 후에 이런 식으로 써달라고 하려고요"

헐... 이 친구 사기꾼 아닌갑네..

그래서 다시 물었다.

"제가 같은 성씨라서 일부러 찾아온 거라 하셨죠? 제가 같은 성씨인 건 어떻게 아셨죠?"

"네.. 제가 저기 초등학교 뒤쪽에 있는 군부대에 있어요. 관사에서 나와 깨끗한 빌라를 사서 살려고 그동안 이 뒤편에 있는 빌라매물들을 쭈욱 살펴보고 있었죠. 그래서 중개사님 사진이랑 상호를 보았고요. 그런데 이쪽은 원하는 가격대 물건이 없어서 우연히 직거래 사이트를 뒤지다가 저쪽 동네까지 간 거예요. 

군인아저씨? 도보 10분 거리 초등학교 뒤쪽에 위치한? 그러고 보니 위에 걸친 점퍼 포켓 뚜껑(?)이 군대무늬 같기도...

아이고... 뭐 보고 놀란 가슴 뭐 보고 놀란다더니  기획부동산, 컨설팅 전세사기단에 놀래가지고 나라 지키는 군인아저씨를 의심.... 아니 첨부터 군인이라고 말할 것이지...

자세를 고쳐 앉은 후 다시 잘 설명해 주고 계약서 쓸 때 걱정되는 부분 있으면 날인하기 전에 연락하라고 했다.

"일부러 찾아왔는데 계약서를 끝내 안 써주신다 하니 정말 섭섭했어요.  그래도 친절히 설명해주시는 게 감사해서 뭘 좋아하실까 고민하다 라떼 사 온 거니까 식기 전에 따뜻할 때 드세요."

따뜻할 때 마시라고 자꾸 권해서 억지로 라떼를 한 모금 머금는 것을 본 후에 청년은 인사하고 돌아갔다.

세상이 각박해진 것인지 아니면 내가 세상을 각박하게 만든 것인지 잠시 헷갈렸다. 직거래로 보았더라도  반드시 공인중개사를 통해 거래해야 안전하다 생각하고 방문해준 군인아저씨가 고맙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심하고 거절할 수밖에 없게 만든 현 사회 분위기가 씁쓸하기 그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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