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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솔 Aug 15. 2021

내 기억을 줄게

다시 쓰는 안데르센 세계 명작 성냥팔이 소녀

유난히 추위가 매서웠던 크리스마스 저녁. 인적이 드문 외딴 골목 끝에 한 소녀가 죽은 듯 웅크려 있었다.

그 자세로 얼마나 오래 있었던 건지 차갑게 굳은 맨발 위에 눈이 소복이 쌓여 있었다.  

“엄마.. 가지 마세요.”

애절하게 엄마를 부르는 소녀의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

작은 탄식과 함께 소녀가 힘겹게 눈을 떴다.

눈물로 부옇게 번진 시야를 닦아낸 소녀는 곧 실망스러운 얼굴로 속삭였다.

“꿈이었구나.”

그때 누군가 소녀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

어스름한 달빛이 스며든 골목 저편에서 한 소년이 미소 짓고 있었다. 소년이 입은 보라색 벨벳 코트의 자수 무늬가 달빛을 받아 우아하게 반짝거렸다. 코트 밑으로 유난히 하얀 소년의 맨발이 눈에 띄었지만, 그 모습마저 기품 있어 보였다. 소녀는 저도 모르게 더러운 발을 치마 속으로 감췄다.


“아까부터 계속 지켜보고 있었어.”

“나를... 왜?”

소녀는 동화 속 왕자님 같은 소년이 왜 볼품없는 자신에게 관심을 가지는지 의아했다. 이른 아침부터 거리에 나와 사람들에게 성냥을 팔았지만, 소녀에게 시선을 주는 이는 한 명도 없었기 때문이다.

“널 도와주고 싶어. 난 네가 원하는 건 무엇이든 들어줄 수 있거든.”

내가 원하는 것.

소녀는 작게 되뇌었다. 꿈에서 맛봤던 달콤한 케이크와 따뜻한 수프. 크리스마스트리 아래 가득히 쌓인 선물들. 그리고 엄마의 부드러운 품이 떠올랐다.

“그래. 네가 꿈에서 봤던 모든 것들 말이야.”

소녀의 생각을 읽은 소년이 싱긋 미소 지었다. 소녀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문을 열었다.

“하지만.. 나는 네게 줄 게 아무것도 없는데..”

곁에 놓인 바구니 안에는 타고 남은 성냥 몇 개비가 들어있을 뿐이었다.


“아니야. 넌 내가 원하는 걸 가지고 있어.”

“그게 뭔데?”

“네가 가진 기억을 내게 주면 돼.”

소녀는 소년의 말이 이해가 가지 않아 눈만 깜빡거렸다.

“뭐라도 좋으니 일단 원하는 걸 말해봐. 그럼 설명해줄게.”

“지금은.. 너무 춥고 배고파.”

“좋아. 재작년 크리스마스 저녁에 엄마가 만들어준 스튜를 먹은 거 기억나지?”

소녀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빠가 지금처럼 술을 마시지 않았던 그땐 매일 따뜻한 저녁을 먹을 수 있었다. 불과 2년 전 일이지만 꿈처럼 아득하게 느껴졌다.

“그 기억을 내게 줘. 눈을 감고 기억을 떠올리기만 하면 돼.”


소녀가 잠시 눈을 감았다가 뜨자 주변이 호화롭게 장식된 응접실로 변해있었다. 식탁 위엔 난생처음 보는 먹음직스러운 요리들이 가득 차려져 있었다. 노릇하게 구워진 칠면조 구이와 스테이크, 색색의 케이크들을 한입씩 맛볼 때마다 소녀의 얼굴에 행복한 미소가 번졌다.

“어때? 엄마의 스튜보다 훨씬 맛있지?”

곁에 앉아 소녀가 먹는 걸 흐뭇하게 바라보던 소년이 물었다.

“엄마의 스튜? 글쎄. 무슨 맛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걸.”

소녀가 생크림 케이크를 한입 가득 넣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스튜가 어떤 맛이든 지금 눈앞에 차려진 음식들보다 훌륭할 순 없을 것 같았다.


허겁지겁 음식을 먹던 소녀의 눈에 맞은편에 걸린 커다란 거울이 들어왔다. 거울 속엔 입가에 크림을 잔뜩 묻힌 누더기 소녀와 기품 있게 차려입은 소년이 앉아 있었다. 부끄러워 발가락이 오므라들자 소년이 부드럽게 손을 잡았다.

“너도 나처럼 될 수 있어.”

“.. 그럼 어떤 기억을 주면 돼?”

“너희 엄마가 물려준 신발의 기억을 줘.”

“하지만 그건 엄마의 하나뿐인 유품인데..”

“그 유품을 오늘 잃어버린 거 아? 넌 지금 맨발이잖아.”

소녀는 물끄러미 발을 내려다보다가 이내 결심을 굳힌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눈을 감았다 떴을 때 소녀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눈을 뗄 수 없었다. 윤기 나는 실크로 만든 분홍색 드레스 위로 금색의 자수가 촘촘히 수놓아져 있었다. 몸을 살짝 돌릴 때마다 사르륵사르륵 기분 좋은 소리가 났다. 발에 꼭 들어맞는 구두는 마치 새의 솜털을 밟고 있는 듯 부드러웠다.


소녀가 한창 거울 앞에서 감탄하고 있을 때 소년이 다가와 작은 흰색 상자를 내밀었다. 상자 안에는 밑창이 간신히 붙어 덜렁거리는 구멍 난 신발이 들어있었다. 소녀의 미간이 구겨졌다.

“이게 대체 뭐야?”

“네가 잃어버렸던 신발이야. 내가 다시 찾아왔어.”

“이렇게 냄새나고 더러운 신발을 왜 가지고 온 거야? 필요 없어.”

소년은 아무 말없이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상자 뚜껑을 닫았다.

소녀는 다시 고개를 휙 돌려 반짝이는 눈으로 거울을 바라봤다.

“근데 넌 정말 뭐든지 할 수 있구나.”

“물론이지. 또 원하는 게 있니?”

소녀는 생각에 잠겨 한동안 말이 없었다.


“혹시.. 죽었던 사람도 살릴 수 있어?”

“음.. 그건 좀 어렵긴 하지만 불가능한 건 아니야.”

이윽고 소녀의 눈시울이 게 달아올랐다.

“돌아가신 엄마가 보고 싶어. 예전처럼 함께 행복하게 살고 싶어.”

“사람을 되살리는 건 음식이나 드레스를 만드는 것과는 달라. 그 사람에 대한 모든 기억이 필요해.

그 말을 들은 소녀의 낯빛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모든 기억? 그럼 엄마를 기억할 수 없게 된다는 거야?”

“맞아. 하지만 네 엄마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 같이 행복하게 살 수 있게 되는 거지.”

소년이 소녀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며 눈을 맞췄다.


“선택은 네가 하면 돼.”

소녀는 아빠와 함께 살던 오두막을 떠올렸다. 집 안 가득 풍기는 술 냄새와 악취. 성냥을 다 팔지 못한 날이면 어김없이 날아오던 손찌검과 욕설까지. 다시는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좋아. 기억을 줄게.”

“잘 생각했어.”

소녀는 깊게 심호흡을 한 뒤 눈을 감았다. 두려움과 기대가 뒤섞인 눈물이 양 볼을 적셨다. 그때 누군가 부드럽게 얼굴을 닦아 주는 게 느껴졌다.

“엄마..?”

천천히 눈을 뜨자 인자한 표정의 여인이 보였다. 분명히 엄마일 텐데. 그토록 그리웠던 엄마인데. 소녀는 엄마의 얼굴도 목소리도 기억나지 않았다. 안절부절못하며 떨고 있는 소녀를 여자가 꼭 끌어안았다.


“너무 보고 싶었어. 내 딸.”

소녀는 그 품이 너무나 따뜻해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그래 우리 엄마가 분명해. 아니 엄마가 아니라고 해도 이젠 상관없어.’

여인은 소녀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쓸어내린 후 옆에 서 있던 소년과 눈을 맞췄다.

“이제 내가 가져갈 기억은 없는 것 같네.”

소년은 가볍게 묵례를 한 뒤 천천히 돌아 방을 나갔다. 소녀는 엄마를 안은 팔을 더욱 꽉 맞잡았다.

“다시는 헤어지지 말아요. 엄마.”      




성냥팔이 소녀가 사라진 거리를 매일 같이 서성이는 한 남자가 있었다. 수염이 덥수룩하게 자란 남자는 행인들을 한 명씩 붙잡고 성냥 바구니를 들어 보였다.

“이런 바구니를 들고 성냥을 팔던 아이예요. 이제 11살 된 여자아이입니다. 키는 또래보다 작고 말랐어요.”

사람들은 하나 같이 고개를 저으며 귀찮다는 듯 남자를 밀어냈다. 하지만 그는 지치는 기색 없이 진종일 거리를 돌아다녔다.

“아이를 찾습니다. 제발 누구라도 본 사람이 있다면 알려주세요.”

해가 저물어 어둑해진 거리에 행인들이 잦아들고서야 남자는 터덜터덜 집으로 향했다. 딸이 사라진 지 벌써 2개월이 지났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딸이 성냥을 팔던 거리를 헤매는 것뿐이었다. 아이를 방치하고 학대한 자신에 대한 원망이 하루에도 몇 번씩 구토처럼 치밀었다.

골목길에 들어섰을 때 남자의 손에 들려있던 바구니 손잡이가 끊어져 성냥들이 바닥에 쏟아졌다.

남자는 털썩 주저앉아 흐느끼기 시작했다.

“미안하다. 이 아비를 용서해다오..”

느리게 성냥을 주워 담는 그의 손 앞에 누군가의 하얀 발이 멈춰 섰다.

“성냥팔이 소녀를 찾고 계신 분 맞죠?”

남자의 눈에 별안간 이채가 돌았다. 고개를 들자 검은색 벨벳 코트를 멋스럽게 차려입은 소년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남자는 다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물었다.

“맞아. 내 딸을 찾고 있어. 혹시 본 적이 있니?”

“물론이죠. 하지만 다시 만나기는 힘드실 거예요.”

“그게 무슨!”

“종일 성냥을 팔게 하고, 학대하던 딸을 왜 이제 와서 찾으려고 하시죠?”


냉소 어린 소년의 말을 듣자 남자의 표정이 두려움으로 일그러졌다. 소년에게서 흘러나오는 위압감에 저도 모르게 손이 덜덜 떨렸다. 그런 를 건조하게 응시하던 소년이 이내 싱긋 웃음을 지었다.

“괜찮아요. 사람이라면 누구나 실수를 하는 법이죠. 다시 딸과 행복하게 살고 싶으시죠?”

남자는 소매로 눈가를 훔치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딸을 되찾을 수 있다면 무슨 짓이라도 할 것이다. 돌아만 와준다면 죽은 부인의 몫까지 다해 아끼고 사랑해주리라 매일 밤 다짐했었다.

소년이 남자의 곁으로 사뿐 다가섰다.


“좋아요. 그럼 기억을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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