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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캐나다아재 Oct 01. 2024

명품가방

가방 하나 때문에 노래방에 나가게 된 여자


세희는 아이들을 다 키워놓았다. 이제 아이들은 대학생이 되어서 아르바이트도 하고 자기 앞가림을 한다. 고등학교 동창모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너도 올 거지?”


둘도 없는 친구 희정의 전화였다. 


“당연하지.”


“저번에 남편이 사 준다고 자랑하던 20주년 결혼기념일 선물 받았어?”


“당연하지. 들고 갈게”라고 호기있게 말한 것은 거짓말이었다. 그 한 마디의 허세는 세희를 나락으로 끌고 갔다. 


그날 밤. 

남편이 퇴근하고 식탁에 앉았다. 


“여보, 나도 이제 많이 아이들 잘 키우고 했는데....가방하나 사주면 안되요?” 세희가 미소를 띄며 말했다. 


“그걸 사서 어디에 쓰려고?”

남편은 시선을 신문에서 떼지도 않고 숟가락으로 국을 떠서 입에 넣었다. 


오전에 일찍 나가면서 읽지 못한 신문은 저녁 식사때 주로 보는 남편이었다. 당연히 세희는 친구들을 만나니 긴급 다이어트에 들어갔다. 


“뭘 어디에 써. 동창 모임도 있고 하니까 들고 가서 자랑도 하고 뭐 그런거지.” 세희가 신문을 읽느라 머리 꼭지만 보여주는 남편의 머리통에 대고 말했다. 


이렇게 자신의 마음도 몰라주고 대화도 안 통하는 남편을 데리고 씨름하느니, 차라리 어디 동대문이라도 나가서 짝퉁 가방이라도 하나 사서 들고 갈까 하다가 곧 생각을 접었다. 여자 고교동창들은 이미 명품가방 하나씩 들고 있을 뿐더러 가장 친한 친구가 국산 브랜드의 가방 디자이너였다. 국내 가방쪽 브랜드지만 명품에 대해서 얘기를 하면 입에 늘 거품을 물곤 했다. 남편도 돈을 쓸어담는데 아직 회사에 다니는 희정이 가끔 부럽기도 했다. 


욕심어린 마음이 올라오자 그녀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8명의 친구들은 제각각 위치에서 다들 살만해졌다. 비슷하게 아이들도 하나 아니면 둘을 낳고 각자의 자리에서 열심히 뛰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제일 친한 희정의 남편은 치과의사였다. 세희의 남편도 대기업 부장이니 뭐 꿀릴 것은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4년전 회사를 그만두고 퇴사할 때 명품가방이라도 하나 사 놓을 걸 하는 아쉬움이 올라왔다. 그때만 해도 퇴근할때면 남편이 같이 퇴근하자며 회사에 데리고 오고 그랬었는데. 이제 사십대 중반이 되어서 아이들도 대강 독립할 준비를 하고 있고, 그간 바빴던 친구들도 하나 둘 모임에 얼굴을 비췄다. 


세희의 생각에 명품가방은 단순한 가방이상의 것이었다. 이제 나도 아이들 다 키워서 삶의 시간과 여유가 있어서 살만하다는 것과 남편에게 인정받고 있다는 것을 동창들 사이에 공지하는 그런 의미였다. 세희는 가방 생각이 눈에 아른거려서 집안 청소나 빨래들 앞에 두고 힘이 하나도 나질 않았다. 벌써부터 친구들의 수근거리는 모습이 눈에 선했다. 가족들이 다 나가고 난 오전 9시였지만 그녀는 일이 손에 잡히질 않았다. 그저 눈앞에는 명품가방이 어른거렸다. 에르메스나 루이비통, 샤넬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그저 크리스찬디올이나 구찌라도 하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목에 차 올랐다. MCM도 좋은데. 


동기들은 만나면 약속이나 한 듯이 테이블 위에 가방을 착착착 내려놓았다. 옆자리에 놓아도 될 것을 꼭 테이블에 올렸다가 시선을 받은 가방을 다시 의자나 선반쪽으로 옮겼다. 희정이는 에르메스를, 윤정이는 루이비통을 화영이는 샤넬을 그렇게 하나씩 명품가방을 뽐낸다. 세희는 홈쇼핑에서 구입한 국산 검정가죽가방이었다. 


“어머, 지지배, 너는 역세권에 좋은 아파트도 있는데 무슨 명품 가방하나가 없어. 너 남편한테 너무 잡혀서 사는 것 아니니?”희정이가 힐끔 세희의 가방을 보고 한마디 했다. 


세희는 귓볼이 빨개졌다. 

“아냐, 얘 20주년 결혼기념으로 하나 사 준다고 했어. 신랑이 이번 두바이 출장 다녀오는 길에.”


두바이 출장이란 말에 화제는 다른 곳으로 넘어갔다. 

남편의 두바이 출장은 사실이었다. 남편은 대기업의 건설부문의 팀장으로 이번에도 무슨 다리인가 공항인가 수주를 한다면서 출장을 자주 다녔다. 다만 이번에도 남편이 출장 다녀온 기념으로 사온 선물은 가방이 아니라 화장품이었다. 사실 그것만으로도 그녀는 좋았다. 하지만 동창 모임이 또 있으니 이번엔 무슨 일이 있어도 명품가방을 들고 가야 했다. 


돈 관리는 남편이 한다. 그녀가 돈 관리를 맡고 몇 번 빵구를 낸 적이 있었다. 세희는 복잡한 것이나 매달 정확하게 뭔가 해야 하는 것에는 영 젬병이었다. 


“아무튼 난 못하겠어, 당신이 좀 관리해.” 그렇게 편하게 되었지만 꺼꾸로 이런 편안함이 가방하나 자신이 못 사는 형편이 된 것은 조금 억울했다. 


그녀는 아르바이트를 해서라도 채 한달도 남지 않은 모임에 꼭 명품 가방을 들고 가고 싶었다. 

‘하늘이 무너져도 살 방법이 있다고 했거든. 어디 한번 두고 봐. 아줌마 정신을 보여줄테니.’


얼른 집안 정리를 마치고 남편 서재에 들어가서 컴퓨터를 켜고 눈이 승냥이 마냥 밝히고 찾았다. 


하지만, 아무리 인터넷을 뒤져봐도 그녀 같은 사십대 중반의 아줌마에게 한달에 오백만원에 육박하는 월급을 주는 아르바이트는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고액 아르바이트까지 눈길이 갔다. 


“일단 면접보러 오세요.”


미씨 노래방이란 곳에 전화를 걸었더니 걸걸한 남자목소리가 들렸다. 

마음이 쿵쾅거리고 찜찜했다. 세희는 어떻게 옷을 입고 나갈지 한참을 고민하다가 발목까지 오는 청바지 느낌의 청치마를 골랐다. 상의는 긴팔 셔츠를 골라서 입었다. 


지하1층에 위치한 노래방은 규모가 생각보다 컸다. 

밀실처럼 칸칸이 나뉜 곳이었다. 


“국적이 어디세요?” 덩치가 큰 노래방 주인은 어설프게 한글 프로그램으로 작성한 이력서를 보고 있었다. 


“여기 한국인데요.” 세희의 눈이 커졌다.


“어, 그래요? 한국분이 면접보러 오는 건 정말 오랫만이네요. 더구나 젊으신 분이.”이력서에서 눈을 떼고 세희와 눈동자가 마주치는 순간, 놀란듯이 사장의 눈동자가 살짝 커지는 것 같았다. 


흥, 이쁜 건 알아가지고. 

“시간당 3만원 맞나요?” 액수가 틀리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생각이었다. 


“네 맞아요. 일은 당장부터도 가능하구요. 여긴 주변이 공단이라 빠를땐 6시부터도 사람들이 와요. 하는 일은 노래방에 들어가서 그냥 분위기 맞춰주고 노래방안에 ....가만있자..여기 책 있잖아요. 번호 찾아서 찍어주는 일이 다에요.”


“뭐 다른 힘들거나 위험한 것 없나요?” 세희는 눈에 힘을 주었다. 


“가끔 짓꿎은 남자들만 조심하세요. 술 많이 마신 사람들이 오면 그것만 조심하면 되요. 특히 혼자오는 사람들만요. 처음하시는 것 같은데 저희 노래방에는 비상벨을 붙여놨어요. 저번에 한번 일이 있어서...”라고 말하면서 사장은 문 안쪽에 붙여놓은 비상벨을 가리켰다.


“왜 비상벨이 안쪽에 있나요? 입구쪽에 있으면 편하지 않나...요?” 


“입구 쪽에 서 계시면 고민할 것 없이 그냥 문 열고 나오면 되니까요.”


“오늘부터 바로 할게요.” 세희는 가방을 생각하면서 매일 10만원을 일단 목표로 삼았다. 


매사에 세희는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잠깐 고민했지만 어차피 일하러 왔고, 조건도 맞고, 사장도 나쁜 사람 같지도 않아서 바로 일하겠다고 한 것이다. 


가게 앞에 나가서 커피를 한잔 마시고 시간에 맞춰 다시 가게로 향했다. 6시부터 일을 시작했다. 처음에 온 팀은 남자만 4명이었다. 맥주에 노래부르고 부르스 한곡 쳐주고 팁을 3만원이나 받았다. 두번째 온 팀은 남자 2명에 여자 1명이었다. 그쪽도 매너가 좋았다. 


문제는 세번째 들어온 남자였다. 어디선가 술이 많이 취해서 비틀거렸지만 단골이라면서 사장이 안쪽방을 내주었다. 


노래를 선곡하는데 신촌블루스의 ‘누구없소’였다. 세희가 빠르게 노래책에서 번호를 찾아서 리모콘에 대고 눌렀다. 곧 노래가 흘러나왔다. 반주가 시작되자 남자는 마이크를 들면서 비틀거렸다. 가는 눈을 하더니 작고 갸날프게 앉아 있는 세희 쪽을 바라보았다. 세희쪽으로 다가왔다.


“저 아가씨 부르스 한곡 춥시다.” 남자의 혀가 조금 꼬여 있었다. 


세희는 얼굴이 찡그려지는 것을 들키지 않으려고 고개를 돌리면서 일어섰다. 

순간 남자의 손이 세희의 허리를 팍 잡아당겼다. 

세희는 몸의 간격을 유지하려고 남자를 살짝 밀쳤다. 남자는 단단히 각오라도 한 듯이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 댔다.


“자...잠시만요.” 감긴 팔을 풀려고 했지만 남자는 입술을 쭉 내밀고 세희의 입술로 향했다. 세희가 순간 고개를 돌리는 바람의 남자의 입술이 빰쪽으로 흘렀다.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몸을 풀려고 하는데 남자의 다른 손이 세희의 가슴을 파고 들었다. 

“악, 뭐하는거에요.” 세희가 소리를 빡 질렀다. 


“아니, 여기 도우미 왔으면 가만히 있을 것이지 왠 난리야.” 남자의 손바닥이 세희의 빰을 쳤다. 


“쨕”하는 소리와 함께 눈앞에 번개가 쳤다. 


정신을 못차리는 사이에 남자는 손을 엉덩이쪽에 넣어서 속옷을 벗기려고 했다. 


저도 모르게 세희가 바닥에 주저앉았다. 갑자기 닥친 상황에 판단이 서질 않았다. 이게 사장이 말한 그 위험한 일인가. 짧은 순간이지만 별의별 생각이 몰려왔다. 어떻게 해야 하지. 비상벨을 눌러야 하나. 뛰쳐 나가면 사장이 놀라지 않을까. 


노래방 문이 텅하고 열리는 소리가 났다. 사장이 발로 문을 차고 들어온 것이다. 


“손님, 나가주세요.” 사장의 목소리였다. 


“네에?” 손님의 목소리에서 황당하다는 듯한 끝이 올라가는 소리가 들렸다. 


세희는 그 틈에 엉거주춤하게 일어났다. 둘을 피해서 안쪽으로 서서 옷 매무새를 챙겼다.  

사장의 양 손이 남자의 멱살을 쥐었다. 그리곤 남자를 문 입구쪽으로 당겼다. 

취한 손님이 버텼다. 옷이 얼굴 쪽으로 바싹 올라 붙었다. 턱까지 가렸다. 더 당기면 얼굴도 덮힐 것 같았다. 


“어쭈구리, 여기 문 닫고 싶어? 너 내가 누군지 알고.” 남자가 그 와중에도 굴린 발음을 했다. 


사장의 손바닥이 남자의 얼굴을 쳤다. 

“퍽”하는 소리가 났다. 


“어이쿠, 사람을 패네.” 남자가 고함을 쳤다.


“거기 여기 구청 공무원인 것 다 압니다. 우리 형수를 감히 덮치려고 했으니 어디 재판 함 갑시다. 요즘 사회 분위기 아시죠? 일단 경찰에 전화할께요.”


사장이 핸드폰을 들었다. 신호음이 갔다. 

손님이 사장에게 조용히 말했다. 


“아, 알았어요. 내가 잘못했네.” 취객의 목소리는 바로 똑바로 아주 똑바로 나왔다. 취기는 온데간데 없었다. 신기한 일이었다. 


사장이 폰의 신호음이 멈추자 전화기에 대고 한마디했다.


“죄송합니다. 잘못 눌렀네요.”


손님이 그렇게 가고 사장과 둘이 노래방에 마주 앉았다. 

따 놓기만 하고 마시지도 않은 맥주가 병에 가득 담겨 있었다.


“한잔 하실래요?” 사장이 물었다. 


“네” 작은 목소리로 세희가 말했다.


“아까 이혼을 하신 것도 아니라고 했었고, 처음 면접 볼 때부터 이런 일 하실 분이 아니라는 것은 알았는 데, 뭐 때문에 노래방 알바를 나오신 건가요?” 사장이 잔을 들면서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은....명품가방 하나 사려고...요.” 세희는 사장의 눈치를 살피면서 천천히 답했다. 


“네? 가방요? 하하하.” 사장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었다. 


한참을 웃었다. 

세희도 미소를 지었다. 사장이 웃으니 자신도 안 웃을 이유가 없었다. 

갑자기 사장이 소파에 기대고 있던 몸을 바로 해서 척추각을 세웠다. 테이블에 양 손을 올리고 깍지를 꼈다. 근엄한 표정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잘 들으세요. 김세희씨. 여긴 생활비를 벌려고 나오는 사람들의 마지막 삶의 터전이에요. 70,80년대 남자들이 돈을 벌기 위해서 저 강원도 오지 산구석의 막장이라고 불리는 탄광을 다녔거든요. 지하 300미터 500미터 산소공급도 잘 안되는 곳에 여우같은 아내와 토끼같은 자식들 입에 풀칠하려고요. 석탄을 캐고 나면 입과 코 주위에 시커멓게 석탄가루가 묻고는 했어요. 그런 막장이 바로 여기에요. 저도 산전수전 겪으면서 여기까지 운 좋게 왔지만 여기는 아주머니처럼 곱게 자라신 분이 감당할 수 있는 곳이 절대 아니란 말입니다. 아시겠어요. 여긴 아까 비상벨 말씀도 드렸지만 잘못하다가 몸 버리고 가정도 버리게 되는 곳이에요.”


세희는 목이 타서 맥주를 한 컵 마셨다.


“좋은 경험했다고 생각하세요. 여기 비상벨 저번에 취객에게 몹쓸 짓을 당한 일 때문에 제가 달아놓은 겁니다. 노래방가도 저 같은 사람은 많지 않아요. 여긴 인생의 탄광이자 막장이에요. 삶의 막장 같은 곳이죠. 더 내려가면 뭐 안마시술소도 있고 하지만 어쨌든 그렇습니다.” 사장이 맥주를 마셨다. 


사장의 말이 이어졌다. 

“명품가방 그런 것 다 부질 없어요. 마음이 헛헛한 사람들이 뭔가를 채우려고 하는 것이죠. 중국에서 무슨 디올인가 알고보니 원가가 7만원이었더라구요. 웃기지 않아요. 일당 이만원짜리 사람들 데려다가 7만원짜리 가방 만들어서 300만원 500만원에 파는 것 말이죠.”


“그래도 명품가방은 갖고 싶었어요.” 세희의 눈에 눈물이 찼다. 


“네, 알아요. 그 마음 백번 천번 이해합니다. 하지만 세상에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것들이 있어요. 사랑, 추억, 우정, 그리움 같은 것들이죠. 그런 것들로 채워지지 않으니 물질로 채우는 거에요.”


“그런데, 왜 사장님은 제게 이렇게 잘 해 주시는 거에요?” 세희가 사장을 마주보았다. 


“저 기억 못하시겠죠?” 사장이 큰 눈을 끔뻑였다. 사십대 중반인데도 아직 삼십대 같은 건장한 체격이다. 


“전 처음 보는데요.”


“하하하, 그렇죠. 제가 코로나터지고 배달을 겸업했거든요. 거기 강남 00빌딩에 계셨죠?”


“네 맞아요. 어떻게....”


“한번은 제가 비가 심하게 와서 그대로 넘어졌거든요. 그 바람에 다 쏟아지고 탕수육에 짬뽕이 터지고 난리도 아니었죠. 기억나세요?”


“네....엄청 비오는 날 넘어졌다고 다시 만들어 오시겠다고 했잖아요. 우리 직원들 그때 6명 음식 가지고 오시다가....”


“그냥 달라고 하셨잖아요. 사실 별로 배가 안 고픈데 팀장 때문에 먹는 것이라고 하면서.”


“그랬었죠. 어제 처럼 기억이 나네요. “


“그날 이후로 야식 배달 갈때마다 뵈었어요. 어떤 분이신지 늘 보고 있었죠.”


“아....”


“제가 인근에서 배달 대기나 그릇 회수한다고 대기할 때 남편 분이 저녁에 회사 앞에 데리러 오기도 했고요. 차가 SUV 잖아요. 그 뭐더라. 아 맞다. 흰색 기아 카니발요. 뒷문 자동으로 슬라이딩 방식으로 열리는 것 맞죠?”


“네, 맞아요. 소름이네요.”


“아뇨, 오해마세요. 그냥 좋으신 분이라 지켜 봤어요. 은혜를 갚아야 할텐데...하면서 말이죠.”


“와 그랬군요. 제가 부끄러워지네요.” 세희가 목을 조아렸다. 


“남편분은 회사 계속 잘 다니시나요?” 사장이 입가에 살짝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네, 대기업에 그대로 다니죠.”


“부족한 것도 없는 분이세요. 제가 보기엔.” 사장이 빈 맥주잔에 맥주병을 들어서 채웠다. 


“제가 얼굴이 화끈거리네요.” 세희가 고개를 숙였다.


“어, 그런 뜻이 아니에요. 세희 씨 덕분에 제 인생관이 바뀌었어요. 엉망이 된 요리를 드시면서 제 까진 무릎까지 걱정해주시고 회사 비상약품통 찾아서 동료들이 보든지 말든지 아까진끼 발라주시고, 소염진통제까지 주셨잖아요.”


“그랬죠. 저도 잊었던 기억을 말씀해 주셔고.” 세희도 미소를 지었다. 


“지금 저는 그 마음을 가지고 살아요. 언제부터인가 저녁 햇살이 보이더라고요. 가을 바람이 이렇게 시원하구나. 아침에는 해가 동쪽에 뜨는구나. 그 전에는 몰랐거든요. 다 그쪽 덕분입니다.”


“오늘 이후로 이쪽으로 보이시면 남편분께 말씀드릴 겁니다. 뭘 하시든지 남편분 앞에서 당당할 일만 하세요.”


사장은 띵똥하는 소리를 듣고 전화를 받았다. 

카카오 택시를 불러두었어요. 수원역 부근이라고 하셨잖아요. 대충 근처가서 내리시면 됩니다. 요금 결제도 다 해 놓았으니까요. 사장은 봉투를 내밀었다. 


“아뇨, 이건 ...” 세희는 손사래를 쳤다. 


“제 작은 마음입니다. 받아주세요. 큰 돈도 아니에요.”


택시안에서 열어보니 봉투에는 20만원이 들어있었다. 


세희가 집에 오니 남편이 와 있었다. 씻고 나와서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그녀는 남편에게 오늘 있었던 일을 다 말했다. 


남편이 말했다. 

“20만원 내 놔.”


그럼 그렇지. 짠돌이 남편 같으니라고.


그해 연말에 세희 남편은 대기업의 임원이 되었다. 

그리고 수원지사로 발령을 받았다. 


“네? 200명이요? 죄송합니다. 장소가 협소해서 안됩니다.” 사장은 난색을 표했다. 


“아뇨, 저희 본부장님께서 반드시 2차는 여기서 해야 한다고 합니다. 저흰 상명하복이라서요. 잠시만요 본부장님이 직접 통화를 원하십니다.”


“전화바꿨습니다. 정찬주 본부장입니다.”


“네 본부장님.” 사장의 목소리 끝이 살짝 갈라졌다. 대기업의 본부장이면 임원이다. 어디에나 높이 올라간 사람들에겐 무게감이 다른 내공이 전화를 거쳐서도 넘어왔다. 오랜 장사를 통해서 저절로 알게 된 부분이었다. 


“매달 25일날 회식입니다. 제가 3년은 여기 있어야 하니까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본부장의 목소리는 더 없이 나긋하고 공손했다. 


“아 네 그런데 200명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이번에는 사장이 솔직히 말했다. 200명이면 못해도 하루 매출 1천만원은 나오는 꿈의 숫자다. 하지만 그 인원을 다 품을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아 그 중에 한 50명만 와도 좋은데. 하여튼 200명을 감당할 수 없다. 괜히 안되는 것을 된다고 말했다가 신용없는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럼 죄송한데 제가 책임질테니까 방을 아예 트면 어떨까요?” 본부장이 제안했다.


“방을 튼다는 것이 어떤.....”


“노래방 벽을 타 터서 이 참에 아예 오픈 가라오케 식으로 가면 어떨까요? 그럼 200명도 가능하지 않을까요.”


“그렇게 다 트면 가능은 하지요. 그런데 요즘 장사가 안되서 제가 인테리어 비용이 없어서...”라고 사장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본부장의 말이 이어졌다. 


“그건 우리 그룹사에서 필요에 의해서 요청 드리는 부분이니까, 저희가 저희 부담으로 해서 리모델링을 해 드릴게요. 만약 그렇게 하면 200명 가능할까요?”


“혹시 공간이 모자라면 간이의자에 앉아야 하는데 괜찮을까요?” 사장의 걱정은 이어졌다. 


“흠, 사실 이미 실측을 다 해 보았습니다. 도면도 확보를 했고요. 저희가 200명은 충분히 앉을 수 있도록 할게요. 테이블 50개 정도고 관련해서 가구도 다 저희가 제공해 드릴 겁니다. 다 접이식 목재로 만들고 다 치우면 댄스도 출 수 있는 복합공간으로 만들어 볼 생각입니다. 아무튼 저는 무조건 앞으로 1차는 삼겹살에 쇠주 그리고 2차는 여기서 노래 한곡 하고 마치는 것으로 할 것이라고 취임사에 못을 박았습니다. 아무쪼록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공사는 제가 해 드릴게요. 저희가 건설쪽이라 노는 장비가 많습니다. 제가 요번에 두바이쪽 설계 팀장으로 직접 회사에 2조짜리도 따 줘서 그것 몇 천 쓴다고 아무도 뭐라고 안할 겁니다. 제 본사 상무한테 말하니까 건물이라도 사주라고 하던데요 하하하. 그리고 걱정마세요 회사 짤리면 건축사무소 개설해도 되구요. 하하하.”


“그런데 왜 이렇게까지...무리하게...” 사장은 살짝 목이 메여서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김세희 씨요. 기억하시죠. 어설픈 하루짜리 도우미했던.” 본부장이 말했다. 


“네,기억하죠.” 사장의 머리속에 언뜻 여자가 떠올랐다. 


“제 집사람입니다.”


“아.....”


사장의 귓가에 누군가가 부르는 김광석의 ‘서른즈음에’가 들려왔다. 

살짝 볼이 뜨거워졌다. 




끝.  




[ 에필로그 : 본부장은 많은 사람을 만나야 하는데 꼭 2차는 거래처를 데리고 와서 일주일에 한번씩은 출근도장을 찍었다. 이 사연은 대기업 내에서도 소문이 나서 사람들이 매일 꽉꽉 찬다. 사장은 자신감으로 매주 수요일과 목요일엔 무명 통기타 가수를 불러서 라이브 공연도 진행한다. 요즘은 지역명소로 자리잡고 있다. 참고로 세희는 이런 사연을 들은 대기업 회장이 샤넬백 (모델명 : 샤넬 클래식 미디엄)을 보내주어서 소원을 풀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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