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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캐나다아재 Nov 21. 2024

[중편] 어떤 의사의 일생

의사도 빈익빈 부익부의 원리가 돌고 있다. 


김점백은 초등학교 때부터 의사가 되고 싶었다. '하얀 거탑'이라는 대학병원에서 일어나는 각종 해프닝을 담은 TV드라마를 본 직 후였다. 새하얀 가운을 입고 목에 청진기를 두르고 병원 복도를 누비는 의사가 그렇게 멋있어 보일 수 없었다. 목표가 생기니 그는 초등학교 때부터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았다. 친구들이 놀자고 해도 언제나 그는 책상 앞에서 공부에만 매진했다. 그렇게 열심히 공부해서 중학교 고등학교에 가서도 그는 이과에서도 전교 5등 안에 들었다.


의대의 벽은 높았다. 전국에서 소위 공부로 난다 긴다 하는 학생들이 지원하니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했다. 재수와 삼수를 해서 겨우 지방 의대에 합격했다. 합격자 명단을 도저히 볼 자신이 없어서 명단을 친구에게 대신 봐 달라고 하고 자신은 리스트에서 자신의 이름을 찾았다.


“점백아, 여기 있다. 있어. 20302901번 있다 있어.”


“와, 대박 고맙다.”


바로 어머니께 전화를 드렸다.


“엄마, 나 합격했어. 그동안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그래, 고생 많았다. 우리아들. 이제 대학입학 할 때까지 재밌게 놀으렴. 네 통장으로 용돈 보내 놓을게.”


지금도 그때만 생각하면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다. 점백이는 모처럼 친구들과 모여서 회포를 풀었다. 그때가 그의 인생의 가장 행복한 시기였다. 12월 중순 대학 합격자 발표가 나고 3월 초 대학에 입학하기 딱 직전의 약 3개월의 그 인생의 꿀 같은 시간 말이다.


각오는 했지만, 의대에 입학하자 공부해야 할 것이 너무나 많았다. 의과대학은 6년의 교육과정이다. 2년의 의예과와 4년의 의학과 생활이다. 의예과에서는 예비교육을 배우고, 의학과에서는 심도 깊게 공부한다. 그래서 6년을 졸업하면 의학사 학위를 받게 된다. 의예과 시절에는 조금 더 여유롭게 강의를 들을 수가 있고 이때가 의대 공부의 그나마 여유를 즐길 수 있는 최고의 시간이다. 특히 점백이가 공부하던 시절에는 의학과정은 공부하지 않고 교양과 기초 위주의 공부를 했다. 그래서 이때 보통 미팅도 하고 대학생활을 만끽한다.


그리고 의학과 4년을 하기 위해서 보통 2학년 2학기에는 기초의학을 공부하기 시작한다. 이때 선배들은 그에게 미리 '골학'을 배워두면 좋다고 추천했다. 골학이란 뼈라는 한자어'골'자를 써서 골학이다. 즉 사람의 온몸의 뼈를 공부하는 학문이다. 몸 안의 모든 뼈의 이름을 외워야 한다. 이 골학은 의학공부의 바로 입문과정으로 불린다. 골학 다음에는 해부학을 배운다. 해부학이야 말로 의대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학문이며, 교과서를 보고 공부도 하지만 실제 카데바를 보면서 실습하는 시간도 있다. 해부학은 이해가 통하지 않는다. 각 부위의 명칭들을 다 외워야 한다. 대근육, 소근육, 뼈, 신경, 관절 등 모두 완벽하게 암기해야 한다.


1천 페이지가 넘는 원서로 된 책을 다 외우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결국 그는 본과 2학년에 필수과목에서 유급을 해서 입학한 지 7년 만에 대학 졸업을 했다.


그리고 졸업과 동시에 의사 국가고시 준비를 했다. 벌써 그의 나이는 낼 스물여덟이 넘어가고 있었다. 그래도 그를 버티게 해 준 힘은 의사면허를 따고 나면, 찬란하고 빛나는 금빛 고속도로가 그의 눈앞에 펼쳐질 것이라는 기대감이었다.


드디어 나이 스물아홉 살에 그는 의사국가고시에 합격했다. 날아갈 것 같았다. 이제 인생의 고속도로가 열릴 것이다. 그는 너무나 기뻤다. 제일 친한 친구 윤석이를 만나서 술도 마시고 그간 못했던 얘기들도 나눴다.


나이트를 갔다. 윤석이 방을 잡아주고 양주를 사니 여자들이 방을 떠나지 않는다. 의사고시 합격이라는 말에 다들 그냥 날 잡아 잡소 하고 있었다. 결국 다들 뜨거운 밤을 보냈다. 그렇게 좋았던 순간도 잠시였다. 다시 인생의 힘든 랠리가 시작되었다.


의사시험을 패스한 것은 고생의 시작이었다. 점백이는 세상을 너무 몰랐다. 마치 산을 넘어서 정상에 올랐다고 외치고 나니 더 높은 산이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물론 이 단계에서 의사고시를 패스했으니 그냥 사회로 나가도 된다. 그렇게 의대 6년 과정을 마치고 사회에 나가서 개원하는 의사들을 보통 '일반의'라고 부른다. 하지만, 점백이가 졸업할 때는 거의 90%의 의사들이 당연히 '전문의'를 따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더구나 '일반의'로 바로 빠지는 것을 약간 불명예스럽게 생각하는 문화도 있었다.


점백이도 눈치를 보다가 등 떠밀리듯이 '전문의'를 선택했다.


전문의가 되는 과정은 또 하나의 의대를 다시 졸업하는 것만큼의 혹독한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점백이는 그걸 그때 알았더라면 전문의 과정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하곤 한다. 전문의가 되기 위해서는 대학병원에 들어가서 인턴의사 1년과 전공의로 약 4년간 추가로 근무하고 전문의 시험을 통과해야 한다.


이미 정식 의사가 되었지만 전문의가 되기 위해서 다시 대학병원에 들어가면 고작 '인턴 1년 차'라고 불린다. 대학병동에 들어가니 군대 이등병과 다름없는 생활이 시작되었다. 인턴생활 1년과 레지던트 생활 4년을 하면서 하루에 50명도 넘는 환자를 진료할 때도 있었다.


특히 점백은 지금도 전공의 2년 차 때까지의 고생을 잊을 수가 없다. 새벽 5시에 병원에서 일어나곤 했다. 도저히 늦게 자서 새벽에 일어날 자신이 없어서였다. 6시에 도착하자마자 밤사이 자신의 환자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파악을 위해서 차트를 확인해야 한다. 이때 당직이었던 전공의가 특이사항을 요약해서 알려준다. 매주 수요일 오전 7시에는 콘퍼런스가 있다. 전공의들이 환자들의 사례와 그에 따른 대처를 발표하고 검토받는 것이다. 오전 8시는 혼자서 환자의 상태를 체크하기 위해서 회진을 돌아야 한다. 오후에 교수에게 보고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수술이 있으면 수술 준비를 위해서 수술실에 들어가기도 한다. 12시에는 직원식당에 가서 식사를 해야 하지만 그는 밥을 먹으러 갈 시간이 없다. 오후 2시가 되면 교수와 함께 회진을 돈다. 점백 자신이 주치의가 되어서 각 환자들의 상태와 차트를 가지고 요약해서 보고 한다. 회진을 다 돌고 나면 1시간 이상은 기본으로 걸린다. 그런 환자의 상태를 말하면 교수가 마지막 코멘트를 한다. “퇴원해도 되시겠습니다.”라고 하거나 “긴급 수혈이 필요합니다.”라고 말하면 다 적어서 메모를 하고 간호원에게 말해서 빨리 의료 조치를 해야 하는 것이다.


오후 3시가 되면 회진 때 교수가 언급한 내용을 정리해서 처방을 하고 의무기록을 작성해야 했다. 그리고 4시에는 오전에 들어갔던 수술실에서 다시 오라고 연락이 온다. 개복했던 복부를 꿰매는 일을 해야 했다. 다시 오후 5시가 되었다. 병동으로 돌아온 점백은 컴퓨터 앞에 앉았다. 그는 아직 한 끼도 제대로 먹지 못했다. 현기증이 났다. 5시부터 의무기록을 작성해서 오후 8시가 되어서야 끝이 났다. 당직이 있으면 이어서 아침까지 또 근무를 해야 하지만 다행히 오늘은 아니었다.


“김 선생님, 응급실 ER CALL입니다. “ (Emergency Call로 응급한 상황을 말한다. )


“별관 1층 코드블루.” (코드블루는 심정지 환자의 발생을 의미한다. )


그는 응급환자에게 심폐소생술을 했는데도 눈앞에서 죽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심적인 고통을 느꼈다.


그렇게 영원히 끝이 오지 않을 것 같던 레지던트(전문의) 생활도 4년 차가 된다. 이제 조금 여유도 있어서, 주변을 돌아볼 수 있게 되었다. 이제 막 의사시험을 통과하고 레지던트 1년 차 아니 정확히는 인턴 1년 차가 되어, 대학병원 문턱이 닳도록 뛰어다니는 후배들을 보면서, 자신의 과거 모습이 떠올라서 소름이 올라온다. 다시 하라고 하면 절대 못할 것 같기 때문이다.


전문의와 전공의는 단지 '문'과 '공' 딱 가운데 한 글자 차이인데 이렇게 대우가 다른가. '전문의(專門醫)'란 국어사전적인 의미로 어떤 분야의 상당한 지식과 경험을 가지고 오직 그 분야만 연구하거나 맡은 의사를 말한다. 그 전문의가 되기 위해서 이렇게 긴 공부를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이따금씩 들곤 했다. 물론 자신의 동기들 중에는 정말 천재 같은 친구들이 있다. 그들은 재수도 삼수도 하지 않고 갓 20살의 나이에 의대에 가서 의대 6년에 인턴 1년을 거치고 레지던트도 3년 만에 마쳐서 갓 30살에 전문의가 되는 소위 천재 같은 아이들.


물론 점백이도 천재급은 아니어도 수재급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하곤 한다.


회진을 돌 때 부족한 수면시간 때문에 몽롱해지거나 이런저런 생각을 교수 옆에서 할 때가 있는데, 그럴 때는 회진이 돌고 난 후에 정강이 쪽으로 교수의 구둣발이 날아오거나, 귓방망이를 얻어 맞고는 했다고 한다. 그런 일이 지금은 없지만, 여전히 군기는 센 편이다. 동기들은 자신들은 당했는데 이제 선임이 되어보니, 왜 선배들이 그렇게 했는지 이해가 된다면서 식당에서 담소를 나누기도 했다. 자신이 보기에 요즘 들어오는 후배들은 정신을 못 차리는 것 같이 보였다.


생명을 다루는 숭고한 일인데 바싹 '정신을 차려야 한다'라고 기존 선배들이 말했던 것들이, 나무 기둥에 박힌녹슨 쇠 못 같이 되어서 어느 듯 자신의 몸 안에도 뿌리깊게 박혀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 순간 마치 자신도 후배들의 입장에서는 '고인물' 같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와중에 전문의 자격시험을 또 봐야 했다. 전문의 시험을 준비한다고 그렇게 공부할 시간을 배려 해 주는 곳이 많지는 않다고 들었다. 그렇게 고생고생해서 마침내 무사히 4년간의 전공의 과정도 마쳤다. 시험을 합격하고 나니 그간의 고생들이 영화의 하일라이트 장면처럼 지나갔다. 

드디어 그의 나이 35살에 전문의 자격증을 취득했다. 이제 그의 인생은 '고생 끝 행복 시작'일 것이란 확신이 들었다. 정말 이제는 더 오를 산이 남아 있지 않았다. 의사시험을 패스하고 4년간의 각고의 노력의 시간을 지나서 전문의 시험도 통과하고 이젠 정말 의사, 진짜 의사가 된 기분이었다. 


하도 힘들게 오른 산행길이었기에 뒤를 내려다보니 까마득히 내려다 보였다. 에베레스트나 안나푸르나 같은 고봉을 오르는 느낌이 비슷하지 않을까. 참 열심히 힘들지만 꾸준히 여기까지 달려 온 자신이 대견했다. 막상 산 정상에 올라서 밑을 내려다보니 과거 처음 이 길에 진입했던 의대 신입생 시절이 떠오른다. 이 길을 처음부터 다시 하라면 절대 못할 것 같다. 생각만 해도 고개가 절레절레 저어진다.


친구에게서 전문의 합격 축하의 전화가 걸려 왔다.


"오늘은 한잔 해야지? 정말 축하한다. 점백아."


친구 윤석이의 말을 들으면서 스스로 뿌듯함이 몰려왔다.

정말 이제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다.


인생의 묘미는 바로 이런 것이라고 비 오는 명동 밤거리에 1차에서 삼겹살에 소주를 마시고 술에 취해서 거리에서 소리를 고래고래 질렀다. 노래방 전단지를 돌리는 삐끼의 손에 이끌려 노래방에서 노래를 부르다가 잠이 들었다. 얼마나 술을 마셨는지 마시다가 그대로 둘 다 그 자리에서 뻗어 버렸다. 정신 차리고 보니 친구 윤석이는 옆에서 자고 있다. 밤새 나온 술값이 장난이 아니었다. 그래도 의사라고 하니 조금 깎아주어서 기분 좋게 친구와 해장국을 먹고 헤어진다.


하지만,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다. 대한민국 남자로서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었다. 국가는 점백이가 의사라서 기다려준 것뿐이다. 그는 이제 군의관으로 3년 2개월을 근무해야 한다. 35살의 나이의 젊은 군인들과 함께 완전군장 40킬로로 메고 같이 움직여야 했다. 혹한기 훈련 때는 1주일간 강원도 철원의 참호속에서 텐트속에 들어가서 침낭 속 수통에 뜨거운 물을 넣고 버텼지만 얼어 죽는 줄 알았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분명히 끓는 물을 넣어둔 수통이 시원한 냉장고 물이 되어 있었다. 


그렇게 군대를 제대하고보니 어느듯 그의 나이는 38살이다. 그동안 배웠던 의료기술도 퇴색이 된 것 같다. 늘 병원에서 최신의 기술과 학술자료, 의학자료를 놓고 토론을 나누다가 혼자 군대에 다녀왔으니 뭔가 더 배워야 현업에 복귀가 가능할 것 같았다. 


그래서 점백이는 이제 펠로우가 되기로 결심했다. 왠지 그냥 개원을 하자니 그의 양심이 그의 발목을 잡는 것 같았다. 그는 순환기 내과의 펠로우(임상교수)가 되었다. 군대를 다녀오면서 그간의 의학기술의 발달을 따라잡기 위한 일종의 도제수업의 수제자 같은 과정이다. 보통 특정 병원의 임상교수였다고 하면 펠로우를 거친 것이다. 보통 2년 정도를 하고, 대학병원 사정상 결석이 생기거나 운이 좋으면 대학의 의대교수로 발탁되는 경우도 있다.


참고로 내과 전문의를 습득했다고 해도 펠로우 과정을 하지 않은 의사는 그 흔한 위내시경도 넣을 줄 모른다.

아예 못 넣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전문적으로 하던 것이 아니니 익숙하지가 않다. 옆에서 눈으로 보는 것과 실제 환자를 대상으로 실연을 해 보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이기 때문이다. 직접 해 보지 않은 의사가 자신감만 가지고 덤비다가 환자를 사망에 이르게 할 수도 있다. 가끔 의료사고가 나는 것들중에는 이런 문제도 있을 것이라고 점백은 생각한다. 


 하지만 펠로우는 다르다. 펠로우 과정이야 말로 전문의로서의 실습과정과 같다. 이제야 비로소 책의 굴레에서 조금은 벗어나서 진료다운 진료를 제대로 익힐 수 있다. 그래서 병원에 따라 다르지만 대부분 펠로우를 2년 이상 하면 임상교수 타이틀을 준다.


하지만 그래도 펠로우 생활은 그냥 대학의 조교에 비해서 결국 쉽지 않았다. 보통 아침에는 6시에 일어나서 7시에 병원에 도착해서 아침 회진에 참석해야 한다.


7시 30분에는 바로 콘퍼런스에 참석해야 한다. 그리고 오전 9시부터 저녁 6시까지는 그냥 루틴한 일이다. 이건 나름 어렵지 않은 경우가 많다. 옛날 전공의 시절을 생각하면, 하늘과 땅이다. 그리고 저녁 6시부터 밤 12시까지는 저녁에 입원한 환자들의 심장 초음파나 교수님들이 시킨 잔무를 처리한다. 그리고 잠자리에 들면 보통 1시다. 그리고 그 사이클이 그냥 무한반복된다.


4일에 한 번씩은 병원에 당직을 서야 한다. 그러면서도 논문준비를 틈틈이 해야 한다. 그렇게 펠로우를 하면서 매달 받는 돈은 500만 원 정도에서 왔다, 갔다 하는 수준이다.


펠로우 2년 차에서 많은 사람들이 그만둔다. 펠로우 3년 차가 되면 임상경험이 매우 풍부하다. 의료환경에서 숙련된 의사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펠로우 3년 차가 넘으면 대학병원 입장에서는 부담을 느낀다. 교수임용 압박이 커진다. 그건 대학병원입장에서는 부담이다. 교수로 채용을 하지 않자니 눈치가 보이고 교수로 채용하는 순간 펠로우에게 당장 고액의 연봉을 줘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학병원 입장에서는 경영난을 겪는 상황에서 펠로우들의 숫자가 늘어나는 것이 꼭 즐겁지만은 않다. 병원도 경영자의 입장에서는 일반 회사와 다를 바가 없다. 마치 임원승진 시키지 못한 선임 경력사원이 늘어난 것과 마찬가지다. 굵은 사과들이 가득 달린 사과나무 같은 병원이 된다.


결국 그는 나이 마흔 살에 현실과 타협했다. 내과의원을 개원한 것이다. 하지만 병원을 개원하는 것은 또 하나의 도전이라는 것을 그때 그는 알지 못했다. 이미 할만한 곳은 기존 병원이 차지하고 있다. 그들 병원들은 마라톤에서 이미 반환점을 돌아오는 선수들처럼 병원의 인테리어나 장비면에서 월등히 우월하다. 이미 지하철이나 버스정류장 같이 고객들의 눈에 잘 보이는 곳은 임대료에서부터 자신감이 뚝 떨어진다. 도저히 저 금액의 임대료를 내고 수익을 낼 자신이 없다.


돌다리도 두드리는 심정으로 겨우 수소문 끝에 아파트 상가 3층에 내과를 개원했지만 경영과 의료는 완전히 다른 분야라는 것을 깨달는다. 일일이 오는 손님을 응대하는 것도 힘들지만 간호원들을 구하기도 정말 힘들다는 사실을. 개원하기 전에는 직원관리가 이렇게 힘든 일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었지만 이제 자신이 겨우 작은 병원의 병원장이란 현실과 목도하게 된다. 더구나 다들 대학병원이나 큰 규모의 병원에서 시원하고 쾌적하게 목에 병원 직원 카드를 들고 우아하게 근무하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나름 지하철 역에서 멀지 않은 제법 큰 규모의 상가건물에서 근무하게 되면 상가 화장실을 사용하는데 이곳에는 지하 1층의 가라오케의 술 취한 취객을 3층에 올라와서 화장실에 오바이트를 하고 가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다음날 오전은 되어야 상가를 관리하는 청소아줌마 와서 치워주는데, 그전까지는 화장실을 다녀오는 환자들마다 얘기를 하기에 간호원을 통해서 치워야 한다. 그럼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 간호사는 사표를 쓰고 나가버린다. 결국 관리실에 얘기를 해서 편의를 봐 달라고 박카스라도 사 들고 가서 관리소장의 침 튀기는 '한'을 한참이나 들어주어야 했다.


직원관리가 아직 미숙하니 간호원들은 큰 병원과 달리 조금만 서운한 일이 있으면 바로 사표를 쓴다. 걸핏하면 직원들 간에 사소한 문제로 언쟁을 벌린다. 그리고 중재에 나서서 어느 한쪽의 편을 들면 서운하다고 생각한 쪽이 그만둔다. 그래서 양쪽 편을 다 안 들면 두쪽 다 그만둔다. 결국 그만 둘 사람들은 그만둔다. 점백은 마치 자신의 사자와 호랑이를 한 우리에 넣고 조율하는 동물원 조련사가 된 느낌이 들기도 했다.


이렇게 병원 경영이 절실한 이유는 나이 40세에 모아둔 돈도 없이 은행대출을 받아서 시작한 개원병원이기 때문이다. 결국 시설비와 장비대여료 등에 들어간 돈은 모두 은행 대출이다. 요즘같이 은행이자가 5%가 넘게 나오면 매달 벌어서 간호사들 월급 주고 임대료 내고 은행대출 내고 나면 정말 집에 가지고 가는 돈은 쥐꼬리만큼이다.


결국 2년 만에 내과의원을 접었다. 그리고 준종합병원에 월급의사로 취직했다. 소위 봉직의로 불린다. 매월 급여는 약 800만 원 수준이다. 병원장이 입사를 축하한다고 룸살롱에 데리고 갔지만 그곳에서 파트너를 가로채는 바람에 병원장의 눈에 나게 되었다.


중소병원이라서 자꾸 급여 인상을 동결하지만 가끔 병원장이 데리고 가는 룸살롱 덕분에 참을 수 있었다. 처음에는 병원장이 자신을 관리하기 위해서 데리고 간 룸살롱이 어느덧 자신의 취미가 되었다. 다녀보니 스트레스도 풀리고 자신을 왕처럼 대우해 주는 분위기가 너무 좋았다. 병원에 오는 환자들 중에는 나이 든 노인들이 많은데 꼭 보면 고집불통인 환자들이 일주일에 한 명 정도는 나타난다. 게 중에는 이미 병원에 오기 전부터 짜증이 난 상태로 온 것 같은 환자들도 있다. 감히 자신에게까지 짜증을 내진 않지만, 로비에서 예약을 하고 왔는데 왜 바로 진료를 못 보느냐고 자신에게 다 들리게 큰소리치는 고객들도 있다.


존경은 못 받더라도, 내가 저런 노인들한테 꼭 하대를 당하는 것 같은 모욕감이 밀려온다. 지나온 자신의 세월을 꼭 부정당하는 것 같다. 그나마 자신이 가진 의술로 사회에 봉사까지 거창하지는 않더라도, 꼭 필요한 인재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달려온 세월 자체가 그 순간에 송두리째 흔드리는 듯해서, 사이사이에 스스로 마음을 다 잡곤 했다.


어딘가에는 자신의 그런 스트레스를 풀 곳이 필요했다. 스트레스를 집에 가지고 가지 않으려고 그는 어금니를 깨물었다. 선배들도 그에게 종종 충고를 했다.


"스트레스받아서 집에 가지고 가 봐야, 부부싸움 밖에 안 해. 웬만하면 밖에서 풀고 들어가."


이런저런 이유로 점백은 이제 자신의 돈으로 룸살롱을 가게 되었다. 하지만 한번 술 마실 때마다 최소 백만 원 이상이 드는 술값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룸살롱에 가서 예쁜 아가씨가 따라주는 양주를 마시고 싶은데 돈이 없으니 결국 자주 찾아오는 제약회사의 영업사원을 무시할 수가 없었다. 제약회사 영업사원이 추천하는 약을 써보기로 하고 리베이트를 받았다. 그렇게 받은 리베이트는 가뜩이나 말아있던 그의 지갑에 생수를 부어주는 역할을 했다. 그렇게 생긴 공돈을 다시 룸살롱에 기부했다.


처음에는 쉬쉬하던 일이 점차 소문이 나고, 주변사람들도 알게 된다. 간호원과 원무과에서도 그를 예를 주시하게 된다. 그전에는 문전 박대 당하던 제약회사 영업사원이 올 때마다 제 집 드나들듯이 원장의 사무실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하루는 병원장이 불러서 갔더니 리베이트 얘기를 하면서 사표를 쓰라고 말했다. 그는 자신으로 인해서 병원이 벌어드리는 돈이 얼마인데 하면서 화가 나지만 정작 병원장 앞에서는 아무 말 못 했다. 결국 자신도 그만큼 큰 병원을 만들겠노라고 결심했다. 큰 종합병원도 아니면서 중소병원 주제에 의사인 자신을 무시했다고 생각한다. 결국 세상이 자신을 알아주지 못하니 자신이 길을 개척해야겠다고 마음먹는다.


그래서 그는 경기도 변두리에 가서 다시 내과를 개원했다. 어차피 소문이 나서 다른 병원에 봉직의로 갈 곳도 없는 상황에서 다른 대안은 없는 상황이었다. 이제 물러날 곳이 없으니 그는 다시 허리띠를 졸라매고 열심히 영업도 뛰고 경영에도 신경을 쓴다. 원장이 병원에 신경을 쓰니 그냥저냥 개원해서 현상 유지는 가능했다. 그래도 인근 나름 항아리 상권이라 지역에서 오는 환자들이 제법 있다 보니 월 천만 원 정도의 수입이 되었다.


이곳에도 제약회사의 영업사원이 왔다. 전에 큰 병원에서 리베이트를 받은 기억이 나서 원장실에서 상담을 했다. 하지만 큰 병원에서 받던 금액에 비하면 턱없이 낮은 리베이트에 일단 한번 실망한다. 사실 제약회사 입장에서 동네병원에 영업을 하는 것은 매출에도 큰 도움이 안 되는데 신입 영업사원이 실력 점검차 동네 인근 병원에 영업을 들린 것이다.


그는 그 여자 영업사원의 미모에 감탄했다. 신약이 나왔다고 해서 설명차 들렸는데 여자가 신고 온 망사스타킹 같은 꽃무늬 스타킹이 너무 신기하고 예뻐서 자신도 모르게 손가락으로 눌러보다가 눈에 불이 번쩍했다. 여자 영업사원이 손바닥으로 점백의 귓싸대기를 때린 것이다.

짝하는 소리가 하도 커서 간호원이 놀라서 원장실에 들어오고 영업사원은 화가 나서 나가버렸다.


그는 당장 처방전에서 그 제약 회사약을 바로 끊고 의기양양했지만 퇴근하니 와이프가 도끼눈을 하고 있었다. 알고 보니 간호사가 아내에게 제보를 했었다고 했다. 동네 창피해서 못살겠다고 아내가 펄펄 날뛰는 모습을 세 시간 동안 보고 나니 정신이 아득해졌다. 아내에게 다시는 그런 일이 없을 것이라고 각서를 쓰고 나서야 겨우 풀려났다.


그렇게 철이 없던 시절이 휙 하니 지나갔다.


정신 차리고 보니 그도 어느덧 쉰 살의 나이가 되었다. 하도 고생을 해서 생각보다 노환이 빨리 오는 것 같았다. 이제 환자 이름도 제대로 못 외우고, 멍할 때가 많다. 총명함이 떨어지니, 그걸 환자들이 금방 눈치챘다. 하지만 노련함으로 극복했다.


오십 대 중반이 넘어가니 그의 건강도 예전 같지 않다. 항상 피곤함이 몸을 덮친다. 진료를 오래 보지 못할 정도가 되어서 부원장을 고용하고 어슬렁거리고 다니면서 청소나 하고 오후에는 내시경실에 들어가서 낮잠을 잤다.


결국 마의 만 3년을 못 버티고 수익성이 악화되어서 문을 닫았다. 인근 한방병원의 제의로 지하 1층 양방과에서 봉직의 월급 1,200만 원 받으면서 혼자서 만족해했다. 한방병원에서 봉직의로 일한다고 내과협회에서는 창피하다고 왕따를 당했다. 오죽 의사가 못나면 한의사 밑에서 일하는 것이냐고 놀린다. 결국 왕따를 견디다 못해서 한방병원을 사직하였다.


59세가 되어서 다니 개원을 하려고 하니 이제 후배 친구들이 다 말리고 나섰다. 심지어 어디 취직을 하려고 해도 60세 가까이 되는 의사를 월급의사로 들이는 것 자체를 부담스러워 했다. 결국 그런 소문을 듣고 찾아온 사무장이 면허 대여를 해 주면 월 200만 원을 주겠다는 제의를 한다. 그걸 받아들이자니 마치 자신의 자부심을 엿과 바꿔 먹는 것 같아서 정중히 거절한다.


결국 집에서 가까운 제기동 경동시장 입구에 오랫동안 비워있던 낡은 건물 2층에 내과의원을 개원했다. 집에서 노는 것은 심심하고 부담스러워서 그냥 소일거리 삼아 나와서 일하기로 했다. 시장 입구에서 좀 거리가 있는 곳이라 임대료가 저렴해서 큰 부담이 되지 않아서 다행이다. 노인들을 상대로 하니 최신 장비를 사용하지 않아도 큰 티가 나지 않았다.


그래도, 여긴 워낙 아픈 노인들이 많아서 그럭저럭 월세는 내고 운영이 된다. 그는 나이 60세에 개원의로 결국 복귀했다는 사실 자체로 뿌듯했다. 이곳에 오는 노인들은 기본적으로 관절염이나 당뇨, 혈압 같은 관리를 위해서 한약을 지으러 오는 사람들이 많다. 그렇다 보니 시장입구에서 좀 떨어진 곳인데도 생각보다 의원이 제법 잘 된다. 더구나 그는 이제 인생의 단물 쓴물을 다 먹어서 환자들의 날이 선 농담에도 유연하게 대처할 줄 안다. 제법 잘 된다는 말은 의원을 확장할 만큼 잘 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저 나이 60살에 놀지 않고 간호사 두고 소일거리에 하기에 딱 좋을 정도란 의미다.


비록 시장에서는 좀 떨어져 있지만 자신을 알아보고 와 주는 드문드문 들어오는 손님들만 있어도 감사하다. 월세와 간호사 1명 인건비만 낼 수 있으면 만족이다. 그래도 매월 이것저것 경비를 빼고 한 300만 원은 벌어가는 것 같다. 가끔은 월 500만 원을 넘게 벌 때도 있는데 그럼 아내가 아주 기뻐해 준다. 점백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한다.


가끔 오후 서너 시가 되면 그나마 오던 손님들도 뚝 끊긴다. 전통시장이 오후 5시 정도면 문을 닫기 때문이다. 이미 손님들이 알고 왕래도 뚝 끊기는 거다. 그럴 때 점백은 자신의 건물 1층 약초상 가게 앞으로 내려간다. 보통 폐점 전에 남는 시간에 인근 가게 사람들이 거리에서 쪼그려 앉아서 바둑을 두곤 하기 때문이다.


약재상 주인은 2층 내과 의사라는 것을 알고 와서 아는 체를 하면서 간이 의자를 내준다. 붉은색 등받이도 없는 둥근 플라스틱 의자다.

거기 앉아서 바둑을 구경하고 있는데, 이런 한가로움이 새삼 그의 마음에 자부심을 불렀다. 그래, 나이 60세에 새롭게 일을 할 수 있는 것이 어디야. 난 아직 죽지 않았어. 그렇게 의기양양해하고 있는데, 마친 지나가던 아주머니 두 분이 다가와서 묻는다. 아마도 점백이가 돋수 높은 안경을 쓰고 앉아 있어서 약초상으로 오해를 하는 것 같았다.


“아저씨, 여기 인삼도 팔아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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