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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스 else Aug 23. 2023

몽글몽글 단편 시 : 거미줄

거미줄


당신이 벌레만도 못한 이라고 생각했다.

우습게 그 생각은 전혀 변함이 없었더라.


분명히 그랬는데,

그래야 할터인데,


길거리 띄지않게 걸쳐 다리에 쓸어감긴

거미줄 한가닥이 신경 거슬케 하더니만

우습게 그 찰나에 당신 생각이 났다더라.


사르르 팔다리에 계속 감겨서 간질대니

기억도 간질간질 해져 옛적이 떠올랐다.


생각도 싫었는데,

그래야 할터인데,


기어이 거미라도 되어 나에게 찾아왔나

한독이* 되새김질 하다 불현듯 돌아보니

토도독 실타래에 맺힌 이슬비 방울들은

후두둑 흘러내린 두눈 가득찬 눈물이라.


당신이 벌레처럼 질긴 연이라 생각했다.

우습게 그 생각은 전혀 변함이 없었더라.


당신이 거미이면,

자신은 먹이벌레.


스물쩍 거미줄에 감긴 자신도 같으려나

아스라 짚어보니 나도 그러한 벌레이다.



*한독하다 - 성질이 아주 사납고 표독스럽다.


언제부터인가 자주 다니는 산책길에 거미가 집을 짓고 있었는지 지나갈 때마다 자꾸 실타래처럼 몸에 감겨왔다. 점성이 있는 줄은 아니라서 머리카락이 훑고 지나가는 느낌이었는데 희한하게도 그 순간 옛 연인이 생각났다.


생각지 못한 기억 반응이라 '여기서 그 사람이 왜 생각나지?' 하면서 반은 어이없어했다.

그 사람과 나는 끝이 별로 좋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금에 와서 다시 보고 싶다던가 미련이 있다던가 그런 것도 아닌데 왜 그 사람이 생각났는지 길을 다시 걷다 기분마저 상해버렸다. 잊어버리고 줄 알았는데 야속하게도 내 몸과 마음이 아직 그 사람을 기억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그 순간 나를 괴롭혔다. 


망할 거미줄!

그런 벌레만도 못한 사람을 왜 떠올리게 만들어!


하고 혼자 분풀이를 했지만 계속 가던 길을 걷다 지난 세월을 돌이켜보니 '나도 잘한 거 하나 없네'라는 문장이 무심결에 떠올랐다. 예전에는 무작정 그 사람이 밉기만 했는데 그때 나도 이렇게 대처하거나 풀어나갔으면 더 좋았을 걸 하는 생각도 동시에 들었다. (물론 그 사람의 잘못을 이제 와서 이해한다거나 그런 건 아니다.)


타인과 '연인'이 된다는 건 서로를 향해 출발한 각자의 마음이 만났기 때문에 이루어진 거라면, '헤어짐' 역시 이제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려는 각자의 마음에서 출발된 거라고 가정해 보자. 그렇다면 그 사람이 나를 두고 떠난 게 아니라 자신 역시도 이미 이전부터 그 사람에게서 서서히 마음이 멀어지고 있었고 그게 알게 모르게 외면에 보였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나도 누군가에게는 '벌레 같은 인연'처럼 느껴질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작성해 본 시.



'누군가와 사랑을 지속한다는 것'은 오늘의 나에게는 여전히 어렵다.



*표지 이미지 출처 - Freepik Free Licen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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