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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날 Feb 21. 2023

옷걸이를 버렸다

이상적인 숫자

한동안 살이 많이 빠졌었다. 마침 살을 좀 빼야겠다 생각하던 차였지만 빠져도 너무 빠지니 문제였다. 막연히 마른 몸을 이상적이라고 생각했던 때도 있었는데 웬걸… 생각보다 보기 좋지 않았다. 무엇보다 힘이 없고 무기력하니 가족을 돌보고 생계를 꾸릴 여력이 없었다.


난생처음 살을 찌워야겠다고 생각했다. 넘치는 식탐을 감당하지 못하던 내가. 나이와 함께 야금야금 붙는 살이 고민이던 내가. 다른 사람도 아닌 내가, 살을 찌우겠다고 결심을 하다니. 정말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게 인생이구나 싶었다. 물론 단순히 살을 찌우는 게 아니라 건강한 몸을 만들고 체력을 키우겠다는 결심이었다. 수시로 영양보충을 하면서 짬을 내서 운동을 하니 천천히 몸무게가 늘었고 그 과정에서 내 몸의 컨디션을 최상으로 유지할 수 있는 이상적인 몸무게를 찾을 수 있었다.


적정 몸무게를 유지한  벌써 1년이 훌쩍 넘었다. 이제는  이상적인 숫자를 유지하는  어렵지 않다. 그렇다면 맞지 않는 옷들을 고이 개어 의류수거함에 넣어야  차례다. 많이도 오락가락했던 몸무게 덕에 내 옷방에는 다양한 사이즈의 옷들이 자리 잡고 있다. 꽤나 취향이 확고한 편이라 같은 옷이 사이즈별로 있기도 하다.


이참에 싹 치워버리겠다고 기세 등등 하게 옷방에 들어섰지만, 한참을 망설인 끝에 단 몇 벌의 옷만을 갤 수 있었다. 정든 옷들을 버리자니 영 마음이 내키지 않았던 것이다. 딱히 유행에 민감한 편도 아니고, 한번 옷을 사면 오래 두고 입는 편이다. 외투들은 십 년 넘게 자리 잡고 있는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좋게 말하면 옷을 귀하게 다루는 것이고 옳게 말하면 정리할 줄 모르는 것이겠지.


조금 크게, 조금 타이트하게 입어도 그 나름의 멋이 있지 뭐.

이걸 사겠다고 매장을 몇 군데를 돌았었는지...

와, 이건 정말 그냥 버리기엔 너무 아깝잖아!

이 코트는 남편이 큰 맘먹고 선물한 건데...

이 원피스 입고 친구들이랑 여행 갔을 때 진짜 재밌었는데!

나는 이미 버릴 수 없는 101가지 이유를 찾고 있었다.


머리로는 알고 있다. 언젠가 필요할지 모르는 것들은 대부분 불필요한 것으로 봐도 무방하다는 것을. 불필요한 옷들을 정리하면 옷방이 쾌적해지고 뭘 입을지 고민하느라 낭비하는 시간이 줄어들 것도. 꽤나 확고한 취향덕에 어차피 비슷한 옷을 또 사들이는 어리석음이 발현될 것이라는 것까지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있는데... 나에게는 버릴 수 없는 101가지 이유가 있었다.


마음이 무거워졌다. 정리하지 못하는 옷들을 보면서 내려놓아야 할 마음의 짐 또한 많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늘 그렇듯 고민이 길어지면 골치만 더 아플 것 같아 차선을 택해본다. 한 번에 정리하지 못하더라도 하나씩은 내려놓기로.


우선 옷을 버리는 대신 여분의 옷걸이를 몽땅 치워버렸다. 새 옷을 들이려면 무조건 헌 옷을 버려서 그 자리를 만들겠다는 생각이다. 옷이 걸려있는 옷걸이 개수를 세면서 이 숫자가 내가 최대로 짊어질 수 있는 옷의 수라고 다짐했다. 좋은 일이 생길 때마다 옷과 함께 옷걸이도 버리겠다는 야심 찬 계획과 함께. 그렇게 하나씩 비우다 보면 나에게 이상적인 옷걸이 수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면서... 내친김에 옷걸이 2개를 더 빼고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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