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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날 Mar 19. 2023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사정이 있겠지

며칠 전이었다. 일이 끝나고 잠시 친정에 들렀더니 엄마는 잔칫상을 차려놓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무슨 음식을 이렇게 많이 했느냐 물으니 호주에 살던 육촌 동생이 한국에 들어왔다며 다녀갔다 한다. 어릴 때 한 두어 번이나 봤을까, 엄마는 이 육촌이 호주에 사는지 조차 몰랐다고 한다. 어쨌거나 연락이 왔으니 밖에서 식사나 한번 해야겠다 싶었는데, 얼굴도 모르는 이 육촌이 굳이 집에 오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통에 잔치상을 차렸다는 것이다. 멀리서 온 손님을 대충 대접할 수도 없는 노릇이지 않느냐며.


그런데 이 육촌이란 사람, 얘기를 들을수록 가관이다. 안 그래도 엄마를 괴롭히는 이를 보면 이유를 불문하고 악다구니를 놀리게 되는데, 이 사람은 그 정도가 지나쳤다. 그는 빈손으로 찾아와 엄마의 극진한 대접을 받고는 방문판매상품을 꺼내 놓았다고 한다. 엄마가 치약, 칫솔 한 뭉터기를 내민다. 도무지 필요한 물건이 없었는데 그나마 치약 칫솔은 두고 쓰면 되지 않겠느냐는 생각에 사주었다면서. 몇 년은 족히 쓸 것 같은 양을 사놓고는 너무 많으니 나더러 반을 가져가라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용케 참았다.


그는 엄마를 졸라 내 휴대전화 번호를 받아 갔다고 한다. 그의 딸이 내가 일하는 회사에 원서를 넣었는데, 꼭 도움을 받고 싶다나 어쨌다나... 내 인내력은 거기까지였다. 이게 말이야 방구야 싶었다. 일개 직원일 뿐인 내게 무엇을 바라고 뭘 도와달라는 얘기인가? 설령 도움을 줄 수 있다 하더라도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내가 왜, 무슨 수로, 어떻게 돕는단 말인가?


"아니, 그 사람은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또또또... 애꿎은 엄마에게 언성을 높인다. 정말 그 사람이 왜 그러는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기에. 아니 무슨 그런 염치없는 사람이 다 있냐고 씩씩대다가 왜 그 터무니없는 요구를 다 받아주었냐고 엄마를 나무라기까지 하고야 말았다. 엄마에게는 꼭 예쁜 말만 하고 싶은데 번번이 실패하는 못난 꼴이라니.


묵묵히 내 모난 말을 주워 삼키던 엄마가 넌지시 한 마디를 건넸다.


"사정이 있겠지"


따끔했다. 아니, 뜨끔했다고 해야 할까. 어쨌거나 한 번도 매를 든 적이 없는 엄마에게 회초리를 맞은 기분이 들었다.


그렇다. 누구에게나 사정이 있다.

도대체 왜 그러냐는 말은 답을 듣고 싶다는 질문이 아니라 그저 잘못되었으니 이해할 수도 없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다는 비난이지 않은가. 일일이 이해할 수도 없고 이해할 필요도 없겠지만, 누군가의 사정을 모른 채 비난하는 것 또한 옳지 않게 느껴지는 것은 나 역시 남들은 모르는 내 사정이 있기 때문에. 나 역시 그 사정으로 인해 누군가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일삼지 않는다 장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영화 벌새의 김보라 감독이 몇 년 전엔가 기고했던 글이 불쑥 떠오른다.

"당신도 내가 그러하듯 나다운 사람이 되고자 노력하는 사람일 뿐임을. 나는, 우리는 모두 조금씩 이상하고 아름답고 천박하고 고귀한 그 모든 것임을."


여전히 하루가 멀다 하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누군가의 행동을 마주하지만, 남모를 사정이 있겠거니 생각하니 도대체 왜 저러냐며 씩씩거리지 않게 된다. 구구절절 말할 수 없는 사정을 가진 사람들이 어디에나 존재한다는 생각에 가끔 먹먹해지기도 한다. 그들도 나처럼 어떠한 사정에 의해, 또 그 사정에도 불구하고 나답게 살고자 노력하고 있을 뿐이겠지. 그들도 나처럼 조금씩 이상하고 천박하지만, 또 아름답고 고귀한 사람들일 텐데... 하필 그 이상하고 천박한 모습만 내게 비쳤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저 사정이 있겠거니 생각하는 편이 내 정신건강에 이로우니 나에게도 좋은 일이다.

나 또한 사정이 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고, 화낼 일이 하나 줄었으니 그저 고마운 일이다.


... 그래도 그 육촌의 전화는 받지 않으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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