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정이 있겠지
며칠 전이었다. 일이 끝나고 잠시 친정에 들렀더니 엄마는 잔칫상을 차려놓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무슨 음식을 이렇게 많이 했느냐 물으니 호주에 살던 육촌 동생이 한국에 들어왔다며 다녀갔다 한다. 어릴 때 한 두어 번이나 봤을까, 엄마는 이 육촌이 호주에 사는지 조차 몰랐다고 한다. 어쨌거나 연락이 왔으니 밖에서 식사나 한번 해야겠다 싶었는데, 얼굴도 모르는 이 육촌이 굳이 집에 오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통에 잔치상을 차렸다는 것이다. 멀리서 온 손님을 대충 대접할 수도 없는 노릇이지 않느냐며.
그런데 이 육촌이란 사람, 얘기를 들을수록 가관이다. 안 그래도 엄마를 괴롭히는 이를 보면 이유를 불문하고 악다구니를 놀리게 되는데, 이 사람은 그 정도가 지나쳤다. 그는 빈손으로 찾아와 엄마의 극진한 대접을 받고는 방문판매상품을 꺼내 놓았다고 한다. 엄마가 치약, 칫솔 한 뭉터기를 내민다. 도무지 필요한 물건이 없었는데 그나마 치약 칫솔은 두고 쓰면 되지 않겠느냐는 생각에 사주었다면서. 몇 년은 족히 쓸 것 같은 양을 사놓고는 너무 많으니 나더러 반을 가져가라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용케 참았다.
그는 엄마를 졸라 내 휴대전화 번호를 받아 갔다고 한다. 그의 딸이 내가 일하는 회사에 원서를 넣었는데, 꼭 도움을 받고 싶다나 어쨌다나... 내 인내력은 거기까지였다. 이게 말이야 방구야 싶었다. 일개 직원일 뿐인 내게 무엇을 바라고 뭘 도와달라는 얘기인가? 설령 도움을 줄 수 있다 하더라도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내가 왜, 무슨 수로, 어떻게 돕는단 말인가?
"아니, 그 사람은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또또또... 애꿎은 엄마에게 언성을 높인다. 정말 그 사람이 왜 그러는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기에. 아니 무슨 그런 염치없는 사람이 다 있냐고 씩씩대다가 왜 그 터무니없는 요구를 다 받아주었냐고 엄마를 나무라기까지 하고야 말았다. 엄마에게는 꼭 예쁜 말만 하고 싶은데 번번이 실패하는 못난 꼴이라니.
묵묵히 내 모난 말을 주워 삼키던 엄마가 넌지시 한 마디를 건넸다.
"사정이 있겠지"
따끔했다. 아니, 뜨끔했다고 해야 할까. 어쨌거나 한 번도 매를 든 적이 없는 엄마에게 회초리를 맞은 기분이 들었다.
그렇다. 누구에게나 사정이 있다.
도대체 왜 그러냐는 말은 답을 듣고 싶다는 질문이 아니라 그저 잘못되었으니 이해할 수도 없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다는 비난이지 않은가. 일일이 이해할 수도 없고 이해할 필요도 없겠지만, 누군가의 사정을 모른 채 비난하는 것 또한 옳지 않게 느껴지는 것은 나 역시 남들은 모르는 내 사정이 있기 때문에. 나 역시 그 사정으로 인해 누군가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일삼지 않는다 장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영화 벌새의 김보라 감독이 몇 년 전엔가 기고했던 글이 불쑥 떠오른다.
"당신도 내가 그러하듯 나다운 사람이 되고자 노력하는 사람일 뿐임을. 나는, 우리는 모두 조금씩 이상하고 아름답고 천박하고 고귀한 그 모든 것임을."
여전히 하루가 멀다 하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누군가의 행동을 마주하지만, 남모를 사정이 있겠거니 생각하니 도대체 왜 저러냐며 씩씩거리지 않게 된다. 구구절절 말할 수 없는 사정을 가진 사람들이 어디에나 존재한다는 생각에 가끔 먹먹해지기도 한다. 그들도 나처럼 어떠한 사정에 의해, 또 그 사정에도 불구하고 나답게 살고자 노력하고 있을 뿐이겠지. 그들도 나처럼 조금씩 이상하고 천박하지만, 또 아름답고 고귀한 사람들일 텐데... 하필 그 이상하고 천박한 모습만 내게 비쳤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저 사정이 있겠거니 생각하는 편이 내 정신건강에 이로우니 나에게도 좋은 일이다.
나 또한 사정이 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고, 화낼 일이 하나 줄었으니 그저 고마운 일이다.
... 그래도 그 육촌의 전화는 받지 않으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