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배기 행복을 빌어주는 말
"별일 없지?"
휴대폰이 없던 시절, 거실에 전화벨이 울리면 우리 집 어른들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수화기에 대고 이렇게 묻곤 했다. 어린 내 눈에는 그런 어른들의 삶이 마냥 심심해 보였다. 매일 똑같은 하루를 보내는 것에 안심하고, 혹시나 서로에게 별다른 일이 있었던 건 아닌가 걱정하는 모습을 보며. 그저 하루하루 무탈하기만 바라는 재미없는 어른이 될까 봐 걱정을 했던 것도 같다.
그도 그럴 것이 어릴 적의 나는 매일 별일이 생기기를 바랐다. 판타지 소설에 빠져 주인공과 나를 동일시하곤 했으니,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오늘은 뭔가 특별한 일이 벌어질거라 기대했다. 물론 예상치 못한 일들에 유난히 즐거운 날도, 또 슬픈 날도 있었지만 대부분 별 소란할 것 없는 평범한 날들을 보냈고 번번이 시시하다고 실망하곤 했다. 그러면서도 또 내일은 뭔가 다를 거라 생각했나 보다. 마법 같은 하루가 찾아오기를 바라며 잠을 청했으니 꿈속에서는 늘 판타지소설의 주인공이었다.
언젠가부터 특별한 하루를 상상하며 마음 설레하지 않게 되었다. 꿈속에서조차 일상을 반복할 때가 많아졌다는 사실에 씁쓸하기도 하지만, 그저 별일 없이 하루를 보내는 게 고마운 요즘이다. 별일이 없어야 편안한 마음으로 내가 해야 하는 일들, 또 좋아하는 일들을 할 수 있음을. 별일 없이 산다는 게 얼마나 큰 축복이고 감사한 일인지 별일들을 겪으면서 절절히 깨닫는다.
단순히 단조로운 일상에 찬가를 보내려는 것은 아니다. 쳇바퀴를 굴리는 것 같아도 가만 들여다보면 하루하루가 다르다. 회사에서 종종 팀원을 뽑기 위한 면접을 보게 되는데, 며칠 전에는 꼭 함께 일하고 싶은 지원자를 만났다. 그제는 며칠 전부터 먹고 싶었던 찜닭을 만들어 남편과 함께 제법 맛있게 먹었다. 어제는 친구가 보내준 꽃을 화병에 담아 화장대에 올려두었는데 오늘 아침에 일어나 보니 한껏 오므리고 있던 꽃봉오리가 활짝 핀 얼굴로 반긴다. 읽었던 책을 다시 펼쳤을 때 그전에는 놓쳤던 새로운 느낌을 받곤 하는 것처럼, 반복되는 일상이 오늘의 나에게 전달하는 메시지는 매번 새로울 수 있는 것이다. 권태에 빠져 오늘의 특별함을 깨닫지 못할 뿐, 어쩌면 내 어릴 적 바람처럼 별일 없이도 매일이 마법 같은 하루를 살고 있는지도.
별일 없냐는 인사말.
상투적이지만, 서로를 걱정하는 마음이 고스란히 담긴 따뜻한 말.
보통의 일상에서 누리는 행복이 진짜배기라는 걸 진즉에 깨달은 어른들이 서로의 행복을 빌어주는 말.
이 말에 자꾸 애착이 가는 걸 보니 나도 조금씩 어른이 되어가나 보다. 그리고 역시, 피는 못 속이는 모양이다.
무탈하기만 한 삶이 어디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잘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이 일상을 유지하는 힘이 아닐까. 탈 많은 세상을 외면하지 않고, 각자의 속도와 방향을 견지하며 묵묵히 보통날을 살아가는 우리. 이토록 애틋하고 저마다가 특별한 우리의 일상을 응원하며 묻고 싶다.
"별일 없으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