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어루만지는 말
몸이 불편한 남편은 아무렇지 않게 잘 지내다가도 한 번씩 깊은 우울에 빠진다. 처방약도 약이지만 그저 누군가에게 속마음을 털어놓는 것만으로도 큰 위안이 될 수 있기에, 한 달에 한번 남편과 정신건강의학과를 찾고 있다.
얼마 전부터 남편의 말수가 부쩍 줄었다. 언제 그랬냐는 듯 또 훌훌 털어낼 것을 알면서도, 한 번씩 그를 찾아오는 고독한 손님을 함께 맞아줄 수 없어 안타깝기만 하다. 유독 기다려지던 진료일. 언제나처럼 남편의 휠체어를 밀고 진료실에 들어섰다. 처음 몇 번은 남편을 두고 자리를 피했지만, 몇 번의 방문이 계속되자 정신과전문의 선생님은 나도 함께 있을 것을 권하셨다. 여느 때처럼 구석자리에 조용히 앉아 남편의 상담을 지켜보았다. 남편이 속 시끄러운 얘기들을 털어놓으면 선생님은 차분히 그 얘기를 들어주신다. 깊이 공감하고 때론 의문을 제기하며 대화가 이어진다. 내게도 종종 의견을 묻곤 하시는데, 그럴 때면 되도록 짧게 대답하게 된다. 남편이 조금이라도 더 속내를 털어놓고 홀가분해졌으면 하는 마음에.
여느 때와 다름없었던 상담이 끝날 때 즈음이었다. 선생님이 나를 지긋이 바라보시더니 한마디를 건네셨다.
"남편분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법을 깨우치신 것 같아요."
순간 전율이 느껴지더니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덜컥 위로를 받고는 한참을 훌쩍였나 보다. 북받쳐 터져 나오는 생각을 속으로 삼키며…
'하지만 그 말은 사실이 아닌걸요. 나 자신의 온전한 모습을 사랑하는 것도 쉽지 않은데, 제가 정말 남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그저 남편이었을 때는 크게 보이지 않았던 그와 나 사이의 간극은 그의 보호자가 되고 나니 여실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 차이를 메우는 것은 오롯이 내 몫인 것만 같았다. 그 짐이 버거워 한껏 움츠려들다가도, 가늠조차 할 수 없는 고통에 시달리는 남편을 보면 내가 짊어진 무게는 한낱 스쳐가는 바람처럼 가볍게만 느껴졌다. 나는 어지러운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고 한참을 방황했다.
몸에 좋은 음식을 거부하는 남편을 보며, 형제들과의 교류마저 끊어버리는 남편을 보며, 한 번씩 세상을 등지고 입을 닫아버리는 남편을 보며... 나였다면, 나라면 다르게 행동했을 텐데라는 생각이 들 때마다 가슴에 돌덩이가 내려앉은 듯 괴로웠다. 그 가정 자체가 오만이었음을 느낀 것은 한참이 지난 후였고, 그제야 그의 모든 선택을 존중하기로 마음먹을 수 있었다. 그리고 묵묵히 그의 곁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했을 뿐이다. 이런 내가 무엇을 깨우쳤다고 할 수 있을까.
그 과정에서 여기저기 멍이 들고 응어리가 졌다. 꼭꼭 숨겨놓았는데 선생님에게는 보였나 보다. 어디까지나 남편의 상담시간이지만 멍울진 내 마음 또한 모른척할 수 없으셨던 걸까. 사실 여부를 떠나, 나를 들여다봐준 선생님의 한마디가 나를 품고 어루만진다. 사람 마음이란 게 참 이상해서, 나도 모르는 감정의 찌꺼기들이 단단히 응어리를 맺어놓고는 그저 누군가 정성껏 들여다봐주니 쉬이 풀어져버린다. 해묵은 응어리들이 녹아내리니 그저 감탄과 감사를 보낼 밖에. 따듯한 말 한마디로 마음을 어루만진다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내가 남편의 마음을 이토록 정성껏 들여다보았다면... 남편의 가슴 저 밑바닥에 숨어서 다져지고 또 다져졌을 돌덩이 같은 응어리들. 그 속까지 들여다봐주었어야 하는 것을 나는 충분히 깊지도 뜨겁지도 못했다. 조금은 뜨거워진 가슴으로 남편을 꼭 끌어안아보았다. 더 깊이 들여다 보고 더 따듯한 말로 어루만져주리라 다짐하면서. 그 마음이 통한 것일까? 오랜만에 남편과 길고 긴 대화를 나누며 밤을 보냈다. 더없이 감사한 하루가 저무는 것을 아쉬워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