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그날 Apr 16. 2023

이웃이 말을 걸기 시작했다

동네 마실

이웃의 정

내가 아직 꼬맹이였을 때, 나는 옆집을 내 집처럼 드나들었다. 꿀단지라도 숨겨놓은 양 문지방이 닳도록 수시로 들락날락거렸다. 다 큰 아들만 둘이었던 옆집 아주머니는 딸 하나만 있으면 소원이 없겠다며 내게 옆집엄마라고 부르라고 하셨는데, 꼬맹이 주제에 넉살도 좋게 엄마, 엄마 거리며 온갖 맛난 것들을 얻어먹었다. 어디 옆집엄마뿐이었을까. 엄마가 바쁠 때면 동네 반장 아줌마를 비롯해 두연이 엄마, 진환이 엄마, 시연이 엄마가 돌아가며 나와 오빠를 챙겨주시곤 했다. 두연이, 진환이, 시연이도 종종 우리 집에 와서 재능수학, 재능한자 같은 학습지를 풀었다. 나도 학습지를 풀어야 했지만 싫지 않았다. 평소에는 잘 먹지 못하던 간식들이 그 옆에 올려져 있었으니까. 후레시맨 새 시리즈가 나올 때면 호준이 오빠네 집에 가면 되었다. 새로 나온 비디오를 볼 요량으로 모여든 아이들로 호준이네 집은 주말마다 복작댔다.


차가 있는 집은 드물었으니, 주차장은 지금과는 사뭇 다른 용도로 사용되었다. 엄마들은 모여서 고추를 말렸고 우리는 땅따먹기나 말뚝박기를 하며 놀았다. 나는 고무줄놀이에는 영 소질이 없었다. 땅따먹기를 하느라 주차장엔 늘 분필로 그어둔 선이 있었고, 때가 되면 동네 꼬마들이 삼삼오오 그 앞에 모였다. 그 아이들이 자라며 하나 둘 동네를 떠나기 시작했고, 꽤 오래 동네를 지켰던 우리 가족도 이민을 갔다.


다시 한국에 돌아왔을 때는 많은 것이 변해있었다. 정답게 모여 살던 동네는 재개발이 되면서 고층 아파트가 들어섰다. 주차장에 이중주차되어 있는 차들을 보며, 요새 애들은 땅따먹기를 어디서 하나 잠깐 걱정을 했던 것도 같다. 이웃을 마주쳐도 그저 눈인사만 주고받을 뿐, 이야기가 오고 가지 않았다. 옆집에서 맛있는 걸 얻어먹는 건 언감생심, 주위에 누가 사는지조차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


어느새 결혼을 하고 새 둥지를 틀었다. 윗집에는 혹시나 층간소음으로 우리에게 피해를 주진 않을까 염려하시는 점잖은 노부부가 살고 계시고, 아래층엔 갓난아이를 키우는 젊은 부부가 살고 있다. 옆집은 몇 달 전 새로 이사를 왔는데,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다. 그저 꾸러기가 짖으면 따라 짖는 반려견 한 마리가 살고 있다는 것만 알고 있다. 이웃 간의 정이라는 건 사라진 지 오래고, 그저 서로 피해 주지 않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하고 몇 년을 살았다.




날씨가 풀리고 나서부터 남편과 시간 날 때마다 아파트 단지를 돈다. 우리에겐 산책이자 데이트이지만, 멀리서 보면 사실 재활운동에 가깝다. 남편이 워커를 끌고 조심조심 걸으면 나와 꾸러기가 그를 살피며 주위를 왔다 갔다 하는 식이다. 이렇게 아파트 단지 산책 겸 재활운동을 시작한 것이 한 달이 넘어가니 이웃들이 하나 둘 눈에 익는다. 두 시간 간격으로 담배를 태우러 내려오시는 11층 슬리퍼 아저씨, 늠름한 프렌치 불독을 하루에도 몇 번씩 산책시키시는 7층의 장발 아저씨, 점심을 드시고 나면 하나 둘 벤치에 모여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시는 102동, 103동의 호호백발 어르신들... 언젠가부터 몇몇 분들이 남편을 응원해 주신다. 그저 따듯한 눈인사를 보내시는가 하면, 다가와 응원의 말을 건네시기도 한다.


처음 이웃이 말을 걸었을 때 남편은 거부감을 드러냈다. 사람들의 시선이 싫다며 나가기를 한사코 거부하던 남편에게 이 좋은 날 집에만 있는 건 죄악(?)이라고 조르고 졸라 동네마실을 시작한 터였다. 처음에 무슨 사고를 당했냐고 묻는 이웃 어르신께 남편은 "암에 걸려서요"라고 단답형으로 대답을 했었다. 나중에 물어보니 그래야 더 안물을 것 같아 부러 그랬단다. 오늘은 102동에 사시는 어르신께서 아직 '어려서' 그런지 그새 많이 좋아진 것 같다고 말을 붙이셨는데, 남편도 웃으며 인사를 하는 것이 아닌가! 잠시 걸음을 맞추며 웃음꽃을 피우시다가 열심히 하라는 말을 남기고 가시는 어르신. 사라진 줄만 알았던 이웃의 정에 굳게 닫혔던 남편의 마음이 조금씩 열리기 시작했다.


이웃 간의 정을 기억하고 그리워하는 사람들. 세태는 달라져도, 그들의 마음은 한결같이 따숩고 살가움을  여태 몰랐을까. 예전같이 복작거리는 이웃은 아니라도,  훈훈한 온기에 금세 마음이 푸근해진다. 남편이 워커를 내동댕이 치는 , 감사한 이웃분들께 떡을 한번 돌려야겠다고 생각하면서 한결 정겹게 느껴지는 단지를 다시 천천히 돌았다. 아직 어리다는 어르신의 말씀이 계속 귓가에 맴돈다. 언제 흐렸냐는   하늘이 조급해할 것도 불안해할 것도 없다고 말해주는 것만 같다. 순간 모든 것이 좋아서 눈물이 났다.


매거진의 이전글 그냥 걸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