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바람에 덜덜 떨리는 손가락을 움직여 택시를 호출한 게 새벽 3시였다. 분주했던 거리는 어느새 스산해졌고 세상이 사라진 것처럼 고요했다.
계획은 엉망이 됐다. 아니, 애초에 계획 따위는 없었다.‘오늘은 짐을 싸야지’, ‘내일은 일정을 짜야지’—그러면서 눈을 감았다 떴을 뿐인데 어느새 출국 전날이 되어버렸다. 짐가방도, 일정표도 여전히 텅 비어 있었다.
원래 그날은 ‘일퇴’ 두 글자를 회사 단톡방에 남기고 소리 없이 사라질 작정이었다. 하지만 임원 메시지를 알리는 붉은 아이콘이 알림창에 먼저 떴다. 팀장 호출이었다. 석식을 하며 부서 운영에 대해 논의 좀 하잔다.비서가 예약한 식당은 팀장 집 근처 조개구이집. 대식가이자 애주가로 소문난 팀장이 뭔가 심각한 얘기를 할 때 애용하는 장소였다.상황 전개는 뻔했다. 소주와 시끌벅적한 분위기에 취한 뒤, 무한 반복되며 조개껍데기처럼 귀에 들러붙는 팀장 넋두리의 청취자가 되는 게 수순이었다.팀장과 친분을 쌓기엔 좋은 기회였지만, 하필 여행 전날이라니.
택시를 타고 집에 오는 동안에도 팀장의 말들이 해변의 파도처럼 밀려왔다. 아침해가 뜨면 공항버스가 아니라 통근버스를 타야 할 것 같았다. 정말 몇 시간 후면 여행을 가는건 지 혼란스럽기만 했다.
집에 도착하니 캐리어가 석쇠에 달궈진 가리비처럼 입을 쫙 벌린 채 거실에 널브러져 있었다. 시간은 새벽 4시. 비행기는 아침 10시.불안이 엄습할 법도 한데, 알코올에 쩔어 있는 두 눈두덩은 천근만근 쇳덩이처럼 내려앉았다.'에라 모르겠다. 일단 자자.'
알람 소리에 눈이 번쩍 뜨였다. 찬물을 끼얹듯 세수를 하고, 이빨을 닦으며 공항버스 시간을 체크했다.쿠팡에 주문해 놓은 먹거리와 옷가지를 캐리어에 쑤셔 넣었다. 그나마 카메라는 꼼꼼히 챙겼다. 그리고는 바로 정류장으로 뛰었다.
어떻게 비행기를 탔는지는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터보 엔진을 돌린 듯한 소음과 함께 창밖 세상이 기울어졌고 묵직한 압력을 느끼던 순간 스르르 눈이 감겼다.
고장난 전구처럼 의식이 켜졌다 꺼지길 반복했다. 웅성거림에 정신이 들다가도 자장가처럼 울리는 엔진의 백색 저음에 정신을 잃었다. 그 와중에 숙취가 밀려와 병든 닭처럼 뒤척였다. 난기류를 만날 때면 엘리스가 토끼굴로 떨어지고 도로시가 허리케인에 솟아 오르듯 위액이 요동쳤다.
그때는 몰랐다. 반복되는 루틴에 익숙해진 정신이 탈탈 털리고 정적인 회사생활에 찌든 육체가 꼬이며 나도 모르게 이세계로 진입할 준비가 되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경유지인 영국 히드로 공항까지는 14시간 걸렸다. 환승을 위해 입국심사대를 통과하는데 묘한 이질감을 느꼈다. 파란 눈의 출입국 직원 얼굴은 흐릿하게만 보였고 낯선 언어들은 웅얼거리는 물소리처럼 생경하게만 들렸다. 그때 굵고 붉은 글씨가 눈에 띄었다.
'NO RETURN BEYOND THIS POINT' (재출입 금지)
현실이 격하게 뇌를 강타했다. 이젠 아이슬란드를 향해 앞으로 나아갈 뿐 돌아갈 방법은 없었다. 아이슬란드가 어디던가? 불과 얼음의 나라 아니던가? 이제 지옥문을 열고 들어가야 하는데 난 전혀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집에서 만 킬로미터 떨어진 섬나라에 오면서 준비한 거라곤 비행기표와 렌트카 뿐이었다. 당장 첫날 숙소조차 예약되어 있지 않았고 환전도 못했다. 하데스에 가는 망자도 뱃삯 쯤은 챙기는데 나에겐 동전 하나 없었다. 스틱스강 뱃나루에서 사신낫을 든 카론을 조우한 듯 공포가 엄습했다. 이건 여행이 아니라 무모한 모험일 뿐이었다.
하지만 어찌 알았겠는가.무계획으로 시작한 아이슬란드 모험이 이토록 경이로운 체험으로 남게 되리라는 걸.변덕스러운 날씨를 견뎌내면 어김없이 대자연의 놀라운 풍광이 펼쳐졌고,어둠을 뚫고 목적지에 도착할 때마다 산과 바다와 폭포, 그리고 형형색색 발광하는 밤하늘이 신비로운 얼굴을 드러냈다.
8박 9일간, 아무런 계획없이 혼자 떠난 아이슬란드 여행.
지금부터 그 이야기를 풀어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