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키야비크에 도착한 건 자정 무렵이었따. 비행기는 두터운 구름을 뚫고 천천히 고도를 낮췄다. 대기시간까지 합치면 거의 24시간 가까이 비행기와 공항에 갇혀 있던 터라, 터진 풍선마냥 온몸에 기운이 빠져 있었다. 착륙한 뒤에도 몸은 여전히 공중 어딘가에 떠 있는 기분이었다.
수하물을 찾는 손길도, 작고 무심한 공항 터미널에 내딛는 첫걸음도 모두 이상할 만큼 둔하고 무감각했다. 렌트카 직원과 나누는 형식적인 대화는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첫 날갯짓을 하는 어린 새처럼, 나는 낯선 환경에 익숙해지려 애썼다.
렌트카 직원이 건네는 키를 받아들고, 그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터벅터벅 발걸음을 옮겼다. 여전히 몽상과 현실 사이에 떠 있었지만,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발밑 어딘가가 아주 미세하게 울렸다.
그리고 공항 문이 스르륵 열리는 순간, 싸늘하면서도 한없이 맑고 낯선 공기가 폐 깊숙이 밀려들었다. 동시에 축축한 새벽 냄새가 비강을 타고 스며들었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몸도 정신도, 이제 어떤 경계를 넘었다는 걸.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어디든 가야 했다. 차 뒷좌석을 평탄화하고 캐리어를 펼쳐 놓았다. 어차피 매일 떠돌 테니 차는 곧 내 숙소나 다름없었다. 주섬주섬 짐을 정리하고 운전석에 앉았다. 시동버튼을 누르며 깨달았다. 며칠 전부터 뇌리를 맴돌던 질문에 이제 답할 순간이 왔다는 걸.
아이슬란드 여행의 핵심은 링로드를 따라 섬을 한 바퀴 도는 것이다. 여정은 남부만 둘러보는 링로드 남부 투어와, 남북을 모두 도는 링로드 일주로 나뉜다.
나는 남부와 북부 모두를 돌고 스나이펠스네스 반도와 골든서클까지 아우리는 일주를 계획만 했을 뿐, 구체적인 일정은 세우지 않았다. 레이키야비크에서 차 시동을 걸던 그 순간까지도 스나이펠스네스 반도로 먼저 갈지 골든서클로 먼저 갈지 정하지 않은 상태였다.
스나이펠스네스 반도 vs 골든서클
스나이펠스네스는 공항에서 3시간가량 북쪽으로 올라간 곳에, 골든서클은 서쪽으로 2시간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보통 스나이펠스네스로 가면 북쪽으로, 골든서클을 가게 되면 남쪽으로 링로드 일주가 시작된다.
하지만 방향은 중요치 않았다. 관건은 날씨였다.
도착한 직후 이틀간은 남부 날씨가 더 좋았다. 따라서 첫 행선지는 골든서클이어야 했다. 문제는 오늘 골든서클 날씨가 안 좋다는 점이었다. 예보가 들쑥날쑥하긴 했지만 하루종일 흐리거나 비가 예보되어 있었다.
스나이펠스네스 상황이 골든서클보단 나았다. 비가 오진 않았고, 마지막으로 확인한 예보는 맑음이었다.
결국 스나이펠스네스로 올라갔다가 다시 남쪽으로 내려오는 것이 최선처럼 보였다. 하지만 쉽사리 결정할 순 없었다. 시시각각 변덕을 부리는 예보만 믿고 200km가 넘는 거리를 운전할 것인가. 그게 문제였다.
정해진 루트가 없어 자유로울 줄 알았지만, 선택지가 생기자 오히려 결정장애가 왔다.
항상 그렇다. 날씨 같은 건 내 의지로 어찌할 수 없는데도, 그로 인해 조바심 내고 불안해한다.
하늘이 파랗건 흐리건, 붉은 햇살이 비추건 말건, 결국 내 삶에 큰 영향을 주지 않는 사소한 차이일 뿐인데도 그런 것들이 오히려 머리를 아프게 한다.
사실 초등학생 학부모들이 학원 그룹을 짤 때만 해도 트럼프가 관세 전략을 짤 때 못지 않은 엄청난 눈치싸움이 있다. 아이들 실력 뿐 아니라 부모간 친분도 따지고 다른 과목 그룹을 짤 때 어떤 영향을 미칠지도 고민한다. 그 하나의 결정이 아이 인생을 좌우할 것처럼 말이다.
물론, 마냥 신경을 놓을 순 없다. 바람의 방향, 구름의 움직임을 보고 예보를 참고하면 상황이 조금 나아지기는 하니까 말이다.
중요한 건 균형이다. 내가 노력해서 바꿀 수 있는 것과, 하늘의 뜻에 맡겨야 하는 것 사이의 균형.
진인사대천명. 최선을 다하고 하늘의 뜻을 기다리라 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어느새 저울이 너무 기울어져버렸다. 나는 모든 걸 통제하려 들었고 최적의 결과만을 쫓느라 스스로를 채찍질해왔따. 가끔은 가학성애자처럼, 때로는 피학대성애자처럼 말이다. 그게 옳은 길이라 스스로를 설득했다.
어쩌다 보니 계획 하나 없이 시작한 여행. 이번 여행은 그 무너진 균형을 되찾는 치유의 여정이 될 것 같았다.
'어디로 가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디든 괜찮다'는 감각. 이번 여행 전체를 그런 결정들로 가득 채우는 거다. 비이성적이고 충동적인 선택이 오히려 더 정확한 나침반이 되어줄지도 모른다.
'스나이펠스네스 반도,' '골든서클.'
두 이름을 입안에 굴려봤다. 순간 화산과 바다, 신화와 고요가 뒤엉킨 외딴 반도가 떠올랐다. 쥘 베른이 <지구 속 여행>에서 얘기했던 지구의 중심으로 들어가는 입구.
첫 목적지는 그렇게 정해졌다. 구글맵에 스나이펠스네스 반도의 명승지, 키르큐펠산을 입력하고 시동을 걸었다.
반도에 들어설 무렵, 어둠과 적막이 나를 완전히 감쌌다.
멀리 녹색 오로라가 깃든 새벽하늘과 아스라한 도시의 불빛이 경계를 그으며 부유했다. 어디선가 바람이 울었다. 그건 숨소리처럼 그리고 신화 속 목소리처럼 낮고 근엄했다. 나는 바람에게 말했고 바람은 단테의 음성으로 답했다.
"인생길 한가운데에서 나는 올바른 길을 잃어버렸어. 그래서 이렇게 어두운 숲 속에서 헤매고 있어."
"여기 네 앞에 있는 건 영원한 것들 뿐이야. 희망이나 기대 같은 건 갖지마. 너의 모든 걸 버리고 들어가도록 해."
난 조용히 그리고 조심스레 새벽의 경계에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