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르큐펠, 시간 위로 솟아오른 신전

by 성세윤


새벽 4시. 텅 빈 주차장에 도착했다. 하늘은 아직 검고, 세상은 여전히 숨을 죽이고 있었다. 차에서 내리니 설핏 황망함이 밀려왔다. 처음 와본 섬나라. 아직 어둠에 적응하지 못한 시야. 인기척 하나 없는 주차장. 물리적 상황도 심리적 상태도 완벽한 적막이었다. 치트키라도 써서 시야를 단번에 밝힐 수만 있다면.


묘했다. 공황과 흥분의 중간쯤 서있는 기분이랄까. 당장 앞으로 갈지 뒤로 갈지도 몰랐지만, 어디로 향하든 새로운 모험은 펼쳐질 것임을 느꼈다. 시동이 걸린 듯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피가 돌며 비행과 운전으로 쌓인 피로를 밀어냈다. 시나브로, 모험에 몰입하기 위한 준비가 끝나고 있었다.


어느덧 시야는 적응됐고 희뿌윰한 녹색빛으로 물든 하늘 아래 검은 윤곽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마치 고대의 신처럼 묵묵히 거대한 삼각형을 그리고 서 있었다. 키르큐펠산이었다.




하늘은 나쁘지 않았다. 구름 사이로 녹색빛이 새 나왔고 별도 간간이 보였다. 그리곤 등 뒤에서 쏴아-하는 물소리가 들렸다.

헤드라이트를 켜니 주차장 뒤편으로 트레킹 길이 이어져 있었다. 길을 따라 100m 정도 걸어가자 익숙한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오로라가 흐르는 녹색빛 하늘, 삼각형으로 솟은 봉우리, 그리고 시원하게 떨어지는 폭포. 완벽히 상상했던 모습 그대로였다.


오로라 사이로 비친 별빛도 인상적이었고, 폭포수 위로 펼쳐지는 오로라의 흐름도 좋았다. 폭포를 따라 조성된 트레일을 걸으며 다양한 모습을 담아봤다.


키르큐펠 폭포는 맨 윗 쪽 다리, 1단 폭포, 2단 폭포, 맨 아래 하천가, 이렇게 네 곳에서 각기 다른 풍경을 보여줬다. 같은 듯 다른 얼굴을 품고 있었다.



오로라와 별빛 아래 마주한 키르큐펠은 신화 그 자체였다. 하늘에선 녹색빛 무도회가 펼쳐졌고, 그 아래 검푸른 어둠 속 스스로 빛나는 키르큐펠은 북유럽 신들이 조각해 놓은 신전이었다. 신화와 마주한 순간, 현실이라는 말이 낯설게 느껴졌다. 나조차 신화 속 인물이 된 것 같았다.




다음 날 아침, 해가 떴을 때 키르큐펠을 다시 찾았다. 일출 시간은 훌쩍 지났지만 마침 맞은편 산등성이 너머로 해가 고개를 내밀었다. 황금색 줄기가 키르큐펠 능선을 따라 퍼지며 푸른 하늘과 선명한 경계를 그었다.


주차장 맞은편으로 넘어가니 또 다른 각도에서 키르큐펠을 마주할 수 있었다. 바다를 향해 뻗은 제방을 걸으며 풍경을 다시 담았다. 바람이 강해 거울처럼 또렷한 반영은 볼 수 없었지만, 키르큐펠이 여전히 완벽한 화살촉 형태로 우뚝 서 있었다.



해발 500m가 안 되는 야트막한 산. 그러나 그 앞에 서있는 나라는 존재는 한없이 작고 덧없게 느껴졌다.




밤의 키르큐펠이 신비와 경외의 산이라면 낮의 키르큐펠은 부드럽고 잔잔한 수채화 풍경이었다.

같은 장소에서 두 개의 세계를 보았다. 신화와 현실, 심연과 빛, 고요와 온기. 그 모두가 이곳에 공존했따.

나 역시 키르큐펠처럼 평소와는 다른 얼굴을 품은 채 이 땅에 서 있었다. 낯선 시간 속을 걸으며, 익숙했던 나로부터 천천히 멀어지고 있었다.

삶이란, 어쩌면 수없이 다른 나를 만나는 여정인지도 모르겠다. 매일 달라지는 나를 받아들이고, 조금씩 더 깊고 단단한 나로 거듭나는 그런 여정. 오래되고 관습적인 허물을 벗으며, 매일 새롭게 태어난 여정.


키르큐펠 산을 한 바퀴 도는 동안 수많은 생각이 오갔다.

'저 반영이 좀 더 선명하면 어땠을까.'

'일출이나 일몰에 하늘이 마법을 부리면 이 풍경이 어떻게 변할까.'

'가파른 능선을 나선으로 돌아 키르큐펠 꼭대기에 오른다면 어떤 풍경이 펼쳐질까.'

두 눈 가득 상상을 품으며, 나는 다시 길을 나섰다.




이동경로

키르큐펠: Kirkjufellsfoss Parking Lot


키르큐펠산 뷰포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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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rkjufellsfoss Parking Lot에 주차하면 주차장 끝에 트레일이 있다. 트레일을 따라 조금 걷다 보면 다리가 나오고 다리에서 왼쪽으로 꺾으면 폭포와 함께 키르큐펠산을 감상할 수 있다.


키르큐펠 반영은 주차장에 가기 전 제방이 있는 쪽에서 담을 수 있다.

그림612.png

길가에 주차를 하고 도로 밑으로 내려가면 되는데 제방은 상당히 미끄러우니 조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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