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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민 Jun 10. 2020

<벌새>

타자를 도외시하는 자폐적인 자기 연민

영화가 시작되자 엄마를 부르며 문을 두드리는 소녀가 스크린에 비친다. 큰 소리로 엄마를 부르는데도 문이 열리지 않자 소녀의 목소리는 점점 절박해지고, 그녀의 앙칼진 목소리가 비명에 가까워질 때 카메라는 이내 그 문에 쓰인 호수를 보여준다. 902호. 소녀는 계단을 올라가 1002호의 문을 두드린다. 오버 더 숄더 숏으로 문을 응시하는 카메라는 피사체를 한쪽에 놓고 엿보며 소녀의 불안감을 한껏 표출한다. 곧 그녀의 어머니가 문을 열어주고 소녀의 얼굴을 비추는 리액션 숏이 나온다. 엄마에게 실수담을 털어놓을 법도 한데 소녀는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말없이 어머니를 바라본다. 그녀의 침묵의 기저에는 가족과의 단절에 대한 불안이 있다. 문이 닫히자 카메라는 1002호를 중심으로 줌아웃된다. 처음엔 1002호밖에 보이지 않던 프레임에 1002호와 똑같이 생긴 수많은 문들이 들어선다. 이 숏은 <벌새>의 작동 원리를 보여준다. <벌새>는 은희의 경험을 1994년의 보편적 경험으로 확장시키는 영화다. 집을 착각해서 윗층으로 올라가 초인종을 누르는 상황은 특수하지만 그때 은희가 느끼는 것은 모녀 관계에 대한 불안과 어머니를 향한 거리감이라는 보편적 심리다. 확장되는 프레임에 담긴 숱한 문들은 그 안에 있을 각각의 은희를 연상시킨다. 김보라 감독은 그동안 영화에서 수도 없이 다뤄졌던 전형적인 설정에는 관심이 없다. 그 대신 가장 개인적인 경험과 그 경험을 통해 은희가 느끼는 감각에 오롯이 집중한다.

관객은 전형적인 경험에서 느끼는 감흥보다 개인적인 경험에서 느껴지는 감각에 더 민감하다. 개인적인 이야기는 흥미로운 소재로서 사람들의 주목을 끌어낼 수 있는 반면 전형적인 이야기는 예상이 되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민감한 감각을 끌어낼 수 있다고 해도 그것으로 관객의 정서적 이입이 완료되는 것은 아니다. 그 감각이 보편적이지 않다면 관객의 공감을 끌어낼 수 없다. <벌새>는 주로 은희의 개인적인 경험을 다룬다. 영화는 1994년 대한민국이라는 특정한 시공간의 질서 안에서 전개되기 때문에 은희의 경험은 어느 시대나 장소에서도 일어나는 도식적인 서사가 아니다. 은희는 1994년의 높은 교육열과 가부장제, 남아선호사상을 맞닥뜨려 부단히 고생한다. 그런데 김보라 감독은 단순히 은희의 특수한 경험을 전하는 데서 멈추지 않는다. <벌새>에는 대한민국 사람이 1994년을 떠올릴 때 바로 연상할 법한 굵직한 사건이 등장한다. 김일성의 사망과 성수대교 붕괴 사건. 이 사건들은 1994년을 살아낸 사람들 모두의 뇌리에 남아있기에, 그 시대에 얽힌 그들 각자의 경험을 자극하고 끄집어낸다. 그리고 관객 각자의 경험은 그들이 은희의 경험으로부터 보편적인 감각을 길어올리는 데 도움을 준다. 영화는 시종 은희라는 개인을 응시하며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을 다루지만, 성수대교 붕괴 사건을 통해서 은희의 경험은 ‘1994년 중학생의 경험’이 되는 것이다. 요컨대 성수대교 사건은 관객의 공감을 끌어내기 위해 치밀하게 삽입된 보편적 감각의 모티프이다. <벌새>는 관객으로 하여금 은희가 느끼는 1994년을 오롯이 느끼게 하고 싶어 하는 듯 하다.

그렇다면 영화가 우리에게 전하고 싶어 하는 1994년에 대한 은희의 감각은 어떤 감각인가. 영화를 통틀어 그녀가 느끼는 감각을 한 단어로 줄여 말할 수는 없겠지만 제일 자주 느껴지는 감정은 불안감과 불안한 상황이 종식되었을 때 느끼는 안심(安心)이다. <벌새>에는 관계의 단절에 대한 불길한 암시가 거듭 등장한다. 앞서 언급했듯 영화는 어머니가 자신을 거부할까 불안해하는 은희의 모습으로부터 시작한다. 어머니가 문을 열어주며 이내 긴장은 해소되지만, 버려질까 봐 불안한 마음을 품고 있으면서 사랑받기 위해 그 마음을 일부러 말하지 않는 은희의 모습에는 여전히 일말의 불안이 내재되어 있다. 은희는 남자친구와 단짝 친구, 언니와 한문 선생님, 아버지와 어머니로부터 단절이나 유사 단절을 경험한다. 그녀는 남자친구와 2차례 헤어지고, 믿었던 단짝 친구와도 잠시 절교를 한다. 은희는 둘과 절교와 화해를 반복하며 거듭 불안감과 위안을 얻는다. 은희를 좋아한다고 했던 여자아이는 은희가 퇴원하자마자 그녀가 좋았던 것은 지난 학기의 일일뿐이라고 말한다. 은희의 언니는 성수대교가 무너진 날 버스를 제시간에 탔으면 죽었을 것이다. 은희는 언니가 버스를 늦게 타서 살았다는 사실을 알고 가슴을 쓸어내리지만 이내 영지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단절에 대한 은희의 불안감은 가족에게조차 서려있다. 앞서 언급한 오프닝 신과, 아파트 아래에서 넋을 잃은 듯한 어머니를 호명하는 장면, 합의가 없으면 도둑질을 한 은희를 경찰서에 넘기겠다는 문방구 아저씨에게 그냥 넘기라고 대답하는 아버지. 아버지는 종종 은희에게 너무도 야속하고, 은희가 거듭해서 부르는데도 넋이 나간 채 허공을 응시하는 어머니의 모습은 공포영화에 나올 것만 같다. 하루는 어머니와 아버지가 대판 싸우다가 유리병이 깨지고 아버지의 팔에 상처가 난다. 불길한 사건이지만 사건 자체보다 의미심장한 것은 다음 날에 그렇게 싸워놓고 함께 멀쩡하게 티비를 보고 있는 부모님을 목도한 은희의 표정이다. 깨진 유리병과 아버지의 상처를 보는 은희의 시점 숏, 묵묵히 밥을 먹는 은희의 표정이 내제되어 있는 가족 간의 심연을 암시한다. <벌새>는 폭력적인 상황과 단절의 모티프로 가득하다. 

하지만 폭력적인 사건 자체는 <벌새>에서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닌 것 같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은희가 폭력과 단절을 체험할 때 카메라는 반드시 사건으로부터 돌아서서 은희의 얼굴을 응시한다는 사실이다. <벌새>에서 사건이 다루어질 때, 사건보다 중요한 것은 그 사건에 대한 누구나 느껴보았을 감각이다. 영화는 구체적인 사건을 통해 독창성을 확보하되 결코 보편적인 감각을 잃지 않는다. 어떤 사건이 일어나더라도 결국 핵심은 만남과 헤어짐이 반복되는, 그럼에도 끝나지 않고 초연하게 흘러가는 세상사다. 폭풍 같은 실연과 싸움이 지나가도 결국 다시금 꽃 피는 관계와 질긴 삶. 그 모든 사건을 떠나보내고 성수대교를 응시하는 은희의 얼굴은 관객에게 “그럼에도 괜찮다”고 말하는 것만 같다. 영지 선생님의 말처럼 지나고 보면 세상은 참 신기하고 아름답다. 김보라 감독은 가장 개인적인 경험을 통해 가장 창의적인 형태로 관객에게 위안을 전한다. 관객이 이 영화에서 발견한 독창성과 희망은 은희의 감각에 집중하는 <벌새>의 작동 방식이 지닌 이점일 것이다. 그러나 개인적인 이야기를 십분 활용한 영화의 이점에도 불구하고 나는 <벌새>의 작동 방식에 동의할 수 없었다. 특정한 장면에서 이 영화가 타인을 다루는 방식에 대한 거부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개인에게 집중하는 과정에서 소외된 타자-

내가 거부감을 느꼈던 장면은 은희가 눈물을 흘리는 아버지와 오빠를 당혹스럽게 쳐다보는 신이다. 이전까지는 가부장적인 모습밖에 비춘 적이 없던, 심지어 은희가 도둑질을 했을 때는 문방구 사장님에게 그냥 경찰에 넘기라고까지 말했던 아버지가 은희가 수술을 한다는 말을 듣고 눈물을 흘린다. 서사적으로는 폭압적으로 보이던 아버지가 사실은 은희를 걱정한다는 의미의 문제 될 여지가 없는 신이다. 하지만 나는 눈물을 흘리는 아버지의 모습이 관객에게 기이하다 못해 우스꽝스럽게 보인다는 점에서 꺼림직한 느낌을 받았다. 아버지의 눈물이 당혹스러운 이유는 영화에 그가 흘리는 눈물의 기반이 되어줄 만한 장면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그의 성격이 드러나는 대목이라곤 그가 가족들에게 폭력적인 언사를 쏟는 장면뿐이다. 이는 오빠가 눈물을 흘리는 신에서도 마찬가지인데 그가 눈물을 흘리기 전까지 그에 관해 알 수 있는 사실은 그가 은희를 자주 괴롭히곤 했다는 사실과 그가 부모님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는 점뿐이다. 그들이 눈물을 흘리는 신은 서사적으로는 그들을 단순한 악인으로 묘사하지 않으려는 장면이지만, 기실 다른 사실을 드러낸다. <벌새>에서 아버지와 오빠는 철저한 타자다. 정확히 말하면, <벌새>에서는 은희와 영지를 제외한 인물 전부가 평면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영화가 끝날 무렵, 선배를 좋아한 건 지난 학기의 일일뿐이라고 말한 유리에게 화가 난 은희는 지숙에게 배유리가 이상한 애라며 불평을 한다. 그때 지숙이 말한다. “배유리 얘기 이제 그만하자. 우리 부모님.. 이혼할지도 모른대. 나 아직 누구랑 살지도 결정 못 했는데. 너 그거 알아? 너 가끔 네 생각만 한다.” 은희의 자기 연민만이 나오던 영화에 처음으로 지숙의 고민이 나오는 장면이다. 이 장면은 아버지와 오빠가 우는 신처럼 영화에 등장하는 은희의 입장과 타인의 입장의 비중을 편의적으로 맞추기 위해 배정되어 있다. 그리고 아버지가 우는 신과 마찬가지로 지숙의 고통은 짐작만 가능할 뿐 철저히 대상화되어 있다. <벌새>의 시야는 항상 은희에게 머물러 있다.

타인에 대한 영화의 얄팍한 묘사는 숏을 볼 때 더욱 명료하게 드러난다. 나는 앞서 <벌새>의 카메라가 특정한 상황을 맞닥뜨렸을 때 상황보다는 은희에게 관심을 가지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이때 카메라가 관심을 가지지 않는 대상에는 사건뿐만이 아니라 은희와 영지 이외의 인물도 포함된다. 일례로 은희가 영지와 처음 만나는 장면을 떠올려보자. 영지는 은희와 지숙에게 돌아가면서 자기소개를 하자고 제안한다. 뭘 좋아하냐는 영지의 질문에 지숙은 자신이 시험을 잘 볼 때마다 어머니께서 사주시는 캘빈클라인을 좋아한다며 운을 뗀다. 카메라는 웃음기가 가득한 지숙의 얼굴과 은희의 얼굴을 함께 비춘다. 이내 은희가 자기소개를 시작했을 때 카메라는 영지와 은희에게 한 발 다가가 클로즈업 숏으로 지숙을 배제한 채 그들의 대화를 비춘다. 바짝 다가간 미디엄 클로즈업으로 인해 관객이 바라보는 둘 사이의 물리적 거리가 좁혀진다. 캘빈클라인을 사줄 수 없는 집안 형편을 쑥스러워하며 자신은 만화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은희와 “저도 만화 좋아해요”라며 미소를 짓는 영지 사이에 묘한 유대감이 형성된다. 수업이 끝나고 교실을 뜰 때 지숙은 인사 한 마디와 함께 자리를 뜨지만 은희는 영지와 긴 호흡의 인사를 나눈다. (“은희라고 했지? 잘 가.”) 이 시퀀스는 은희와 영지가 처음 만나는 장면인데도 영지가 지숙에 비해 은희를 유독 편애한다는 인상을 준다. 카메라가 지숙을 배제하고 영지와 은희가 서로를 쳐다보는 눈빛을 끈적하게 담아내었기 때문이다. 은희가 가족과 대화를 할 때도 카메라는 은희에게만 관심을 가진다. 은희의 어머니가 “나는.. 사는 게 하나도 없어”라며 탄식하는 장면에서 카메라가 비치는 것은 어머니를 쳐다보는 은희다. 대사가 아니라 숏을 보았을 때 이 장면에서 중요한 것은 어머니의 비애가 아니라 어머니를 보며 비애를 느끼는 은희다. <벌새>에서 타인의 고통은 결국 그것을 바라보는 은희의 자기 연민으로 귀결된다. 이런 자폐적 시야가 가장 꺼림직한 장면은 영지 선생님의 가르침으로 능동적으로 변한 은희가 무너진 성수대교를 바라보는 장면이다. 이 장면에서도 서사적으로나 형식적으로나 성수대교 사건보다 중요한 것은 성수대교 사건을 바라보는 은희다. 단절된 관계를 환유하는 성수대교와 자신을 성장시키고 떠나간 사람을 기리는 은희. 성수대교가 무너질 때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은 죽었지만 관객들은 성수대교가 아닌 은희를 본다. 어느새 성장한 은희의 처연한 표정을 보며 그녀의 앞날에 서린 희망을 본다.

김보라 감독은 가장 개인적인 경험과 그 경험에서 느껴지는 감각에 오롯이 집중함으로써 희귀하면서도 원형적인 영화를 완성했다. 그러나 그 성취의 이면에는 자기 연민과 타자에 대한 공감의 부재가 있다. 자기 연민이 나쁘다는 소리가 아니다. 문제는 타인의 고통을 자기 연민을 위해 소비하는 태도다. 타자를 온전하게 바라보지 않고 타자에 대한 시선에만 집중하는 태도가 잘못된 인식이나 편견을 낳지 않을 수 있을까. 영화의 완성도와 별개로, 나는 <벌새>를 지지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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