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게 생존이라 항상 긴장과 스트레스를 받으며 살고 있다. 사람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자신의 내, 외부를 인식하는 기준 잣대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보통, 자신에게는 관대하고, 타인에게는 다소 엄격한 경우가 많은데, 어찌하였거나 기대 수준과 결과가 맞지 않으면 불만, 짜증이 난다. ‘그 사람 그렇게 보질 않았는데 어쩌면 나에게 그럴 수 있지’ 혼자서 중얼거린다. ‘나는 이 정도밖에 안 되나?’ 등등 많은 생각과 상념이 마음을 흔들어 불편하게 만든다.
생각의 잡념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파도를 만들고, 망각의 시간이 지나면 언제 그랬나 싶을 정도로 다시 고요해진다. 그러다 어떤 계기가 되면 다시 물결이 일렁인다. 자신과 연결되어 있는 끈(인연)과 기대(욕심)를 정립하지 못하고 유지하기 때문이다. 성철스님께서 말씀하신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말은 생각난다. 자신을 둘러싼 삼라만상을 분리시켜 무심(無心)하게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자신의 안경을 벗고 그 본연 차제를 보라는 말이 아닐까?
기대의 끈을 끊고 산에 들어가면 마음을 좀 더 객관적으로 바라볼 것이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기에 속세에 남아서 왜 화가 나는지에 대해서는 답을 찾아야 한다. 그래야 다음부터 그 상황이 오는 그냥 지나가는 것이다. 자신과 연결된 것들은 시간 차이가 있지만, 사람, 사물, 기억도 다 지나간다는 사실이다. 잠시 같이 있고, 가지고 있을 뿐이지 영원히 내 것이라 착각하면 곤란하다. 내 것이 없기에 기대 수준에 맞지 않다고 실망할 필요가 있는가? 없다.
기대의 끈은 소유하고 통제할 수 있다는 환상을 깔고 있다. 하지만, 그것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계속 변하고 있다. 그래도 무언가로 인해 계속 화가 난다면, 손에 쥐고 있는 끈을 놓아야 할 때도 있다. 우리는 마음으로 시작된 한그루 나무다. 주기적으로 가지치기를 해야 한다. 실제 나무도 일정한 시기에 가지치기를 해 균형에 맞지 않거나 웃자란 가지를 잘라 건강하게 만든다. 어떤 가지는 미련이 남겠지만 자를 때는 과감해야 남아 있는 가지들은 살 수 있다.
새로운 끈을 만드는데 시간과 공을 많이 드는데 정리 기준은 뭐냐고 물어본다. 치우치지 않는 균형이라 말하고 싶다. 음식도 골고루 먹어야 건강하듯이, 사람, 사물 관계에서도 한쪽으로 쏠림이 있으면 강한 바람에 넘어진다. ‘가지 많은 나무 바람 잘 날 없다’는 말처럼 가지와 잎사귀가 많으면 작은 바람에도 이리저리 휘둘린다. 가능하면 주위 사람, 환경도 심플하게 가는 것이 복잡다단한 세상에서 맞지만, 자신을 지도해주고 가르치는 훌륭한 멘토는 찾아야 한다.
자신의 힘으로 직접 만든 기대의 끈은 잘 키워야 한다. 그러나 길을 가다 주운 것은 언젠가 지나가기에 미련을 갖지 말자. 사람은 있을 때 잘하고, 돈이나 물건의 경우 잘 사용하고 보내주면 된다. 손에서 놓치지 않으려고 하면 힘도 많이 들고 상처가 생긴다. 또한 새로운 것이 올 때 잡을 기회도 사라진다. 진정한 내 것이 아닌 것에 화가 날 이유가 없다. 그것은 욕심이다. 마음의 자유는 기대의 끈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시간이 되면 풍선처럼 날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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